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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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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뒤에도 오늘, 바로 지금 현재를 살라는 이 60대 노인의 가르침은 이토록 생생하다!
조르바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내내 기억될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우연히 읽은 한 조사 결과 때문이었다. 교보문고 소설 전문 팟캐스트 ‘낭만서점’에서 2008년부터 2017년에 이르기까지 주요 10개 세계문학전집 브랜드의 연령대별 판매 선호도를 분석한 결과였다. 흥미롭게도 10∼20대는 『데미안』을, 30대는 『위대한 개츠비』를, 50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장 많이 사 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데미안』이야 워낙 청춘의 애독서로 손꼽히는 고전인 데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꿈과 이상, 뒤틀린 열정의 초상을 담은 고전으로 30대의 호응을 얻을 만한 작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리스인 조르바』라니… 이 작품이 유독 50대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도 그럴 것이 20대 후반쯤에 이 책을 4분의 1 가량 정도 읽고 나서 덮어버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색한에 여성을 비하하는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조르바라는 노인과 먹물 먹은 젊은 부르주아가 철학을 운운하는 모양새가 적잖이 불쾌감을 주었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그런 작품이 여전히 위대한 고전으로 불리며 회자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그것도 한창 무르익어 원숙해진 50대라는 시기에 이 작품의 어떤 부분에 영감을 받는 것인지 사뭇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20대 후반에 마주했던 조르바는 잠시 잊기로 하고, 조금씩 자신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 조르바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를 중요시하는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작중 화자인 ‘나’는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도중, 그곳에서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난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 헌털뱅이 같은 이 60대 노인은 대뜸 ‘나’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왜 당신을 데려가야 하냐고 묻는 ‘나’에게 조르바는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하고 도리어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로 쏘아붙인다. 뜻밖에도 ‘나’는 근심 걱정이 없는 곳에서 산투르를 연주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고, 도자기를 만드는 데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렸다는 이 노인의 기이한 행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심지어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하고 스스럼없이 ‘이성’을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취급하는 조르바의 거침없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마침 ‘나’는 사랑하는 친구가 그리스의 민족주의 혁명에 동참하여 떠난 뒤 홀로 남아 스스로를 ‘삼류글쟁이라는 한 마리 구더기’ ‘책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자’라 비난하며 원고를 내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에 뛰어들기로 결심하던 차였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인 조르바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그러나 만날 수 없었던 자일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본능적으로 이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과거에 광부로 일했다던 조르바를 자신의 탄광사업을 지휘하는 일을 맡기기로 하고 크레타섬으로 함께 들어간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지금 크레타의 외로운 해변에서 이 편지를 쓰네. 여기서 몇 달 머물면서 나는 운명과 맞붙어 놀이를 해보기로 했네. 내가 자본가 노릇을 하는 놀이일세. 이 장난이 성공하면, 나는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 일대 결단을 내려 내 삶의 양식을 변혁한 것이라고 말하겠지.
떠나면서 나더러 책벌레라고 했던 말 기억할 걸세. 그 말이 적잖게 마음에 걸렸던 나는 종이에다 끼적거리는 버릇을 한동안 ? 아니면 영원히? - 집어치우고 행동하는 삶 속에 뛰어들기로 결심을 했다네. 나는 갈탄이 매장된 산 하나를 빌렸네. 나는 여기에서 인부를 고용하고 직접 곡괭이, 삽, 아세틸렌 램프, 소쿠리, 손수레를 쓰고 다루네. 내 손으로 갱도를 열고 들어가기도 하지. 자네 말을 무색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이야. 갱도를 타고 땅속에다 길을 내는 것으로 책벌레는 두더지가 된 셈이지. 자네는 나의 이 변신을 인정해 주었으면 하네. / 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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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한때 크레타에 모여든 네 강대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의 제독을 상대했다던 카바레 여가수 오르탕스 부인의 여인숙에서 머무르기로 한다. 그곳에서 ‘나’는 낮에는 탄광을 돌보고, 밤에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조르바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온갖 관념과 형이상학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던 자신과 달리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이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춤에 몸을 맡기고, 여인을 향한 자신의 욕망에 항상 충실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일마저도 거리낌이 없는 조르바의 행동에서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 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그는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을 믿고,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데 주저함이 없다.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 노인의 언어에는 그 어떠한 이미지도, 체면도, 양식도 없다. 때문에 저 조르바 앞에서 스스로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던 ‘나’의 고백은 곧 나 자신의 것이자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고백이 되고 만다.
「마음이 내키면, 알죠? 마음이 내키면 말이오. 일이야 당신이 바라는 만큼 해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마음이 내키면 칠 거요. 또 노래도 할 거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추고.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에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 24p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진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비의 날개가 도로 접히더니 쪼그라들고 말았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오는 과정은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했고, 날개를 펴는 과정은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온통 구겨진 채 집을 나서게 강요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 177p
동네 청년이 과부에게 마음을 표현했다가 거절한 일을 계기로 자살하면서 마을 일대가 소란했던 날, 과부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 세운 건 조르바였다. 그는 온마을이 여자 하나를 죽이려고 몰려다니는 비인간적인 태도에 분노하며 그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이들은 과부를 기어코 죽이고, 오르탕스 부인이 죽을 때에도 내내 그 앞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다 그녀의 물건들을 죄다 제 것처럼 쓸어간다. 이때 그들을 바라보며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불의, 불의, 불의입니다!” 하고 외치는 조르바의 음성은 여느 때보다 처절하고 날카롭게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던 조르바였기에,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하려 했던 이였기에 이 사건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만 더욱 뚜렷이 확인한 채 조르바와 ‘나’ 모두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는다.
열정과 광기로 싸우는 자가 행복하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자네 식으로 말하면, 나는 행복을 내 키에 맞게 재단했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네. 용케 그렇게 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위대한 사람일 것일세.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맞추어 키를 늘이고 싶네. 그리스의 가장 먼 변경까지 말일세. 그러나 말이 쉽지……. 자네는 크레타 해안에 드러누워 바다 소리와 산투르 소리를 듣고 있으리. 자네에겐 시간이 있는데, 내게는 그것이 없네. 행동이 나를 삼키고 말았네만, 나는 이게 좋아. 친구여, 행동하기 싫어하는 내 스승이여. 행동, 행동…… 구원의 길은 그것뿐이네.」 / 206p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모든 문제가 일을 어정쩡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을 박을 때도 한 번에 제대로 때려 박는 식으로 해나가면 우리는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들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 331p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실어 내보낼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함께 놀았다. / 416p
이윽고 두 사람이 헤어질 무렵, 당신이 읽는 그 빌어먹을 책에는 뭐라고 써있냐고, 그 위대하다고 하는 책들이 대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해줄 수 있는 거냐고 부르짖었던 조르바의 말이야말로 어쩌면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평생 질문처럼 품고 산 말은 아니었을까.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이상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면 자신의 문학은 어디로 나아가야하는 것인지 작가는 끊임없이 고뇌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스스로 자유로워졌다고 믿는 ‘나’에게 조르바가 한 말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나와 타인 혹은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하거나 끊임없이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잘라내려는 부단한 시도와 행동하는 자세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자유를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문학이 그러한 길을 제시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것이 『그리스인 조르바』가 품고 있는 함의이자 당대인들을 비롯해 오늘날까지도 큰 울림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곧잘 친구들에게 이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성보다 더 깊고 더 자신만만한 그의 긍지에 찬 태도를 존경했다.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 년을 걸려 도달할 정신의 경지에 그는 단숨에 가닿았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다. <조르바는 위대한 인간이다!> 때로 그는 그 경지를 훌쩍 넘어 더 멀리 나가 버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말했다. <조르바는 미쳤다!> / 4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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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 따르면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자기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을 만큼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호쾌하고 농탕한 사나이 조르바는 떠도는 인간 카잔차키스가 한동안 쉬어 가고 싶어 하던 구원의 오아시스이자 자유의 상징이었다. 완벽하게 실제 성격 반영한 것인지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얼마간 가미한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확실히 조르바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덕분에 사회적 제약이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갈구하는 그에게 왜 유독 50대가 특히 공감하는 것인지 적잖이 이해가 된다. 한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는 것도 이 책을 깊이 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과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유와 독립을 꿈꾸었던 그리스인들 전체의 소망이 이 작품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면 인물 하나하나의 삶이 보다 풍부하게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464p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알았지만, 이윤기 작가 님의 번역으로 보석 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은 독자들에게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 될 듯하다. 20대 후반에 읽었다 그대로 쭉 덮어두었다면 이 작품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혹여 이 책을 책장에 묵혀두고만 있을 또 다른 분들에게 언젠가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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