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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011_1.jpg)
세상 모든 여성들의 자서전이 된 소설!
이름 없는 화자에게 나의 이름을 덧입히느라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몸살을 앓을 것만 같았다!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되려는 욕망은 죽여야 한다. 그것 아니면 고독. / 126p
2022년 노벨문학상에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선정되었다. “사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한 작가”라는 평과 더불어 ‘소설적 장치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쓴다’는 그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관이 사뭇 궁금해졌다. 『빈 옷장』, 『한 여자』, 『단순한 열정』 등 작가를 대표하는 다수의 작품들 중에 『얼어붙은 여자』를 택한 건 ‘얼어붙은’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혹여 그것이 독립적인 삶을 살기를 희망했던 한 여성이 사회가 정해놓은 성 역할에 따라 고립되고, 경직되어버린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책을 집필하면서 작가는 남편과 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소설 출간 몇 해 후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전통이란 이름으로 사회가 정해놓은 성 역할 안에서 이내 얼어붙고만 한 여성의 이야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리얼하다. 결혼과 육아, 사회와 교육이 만들어낸 여성과 남성의 비합리적인 차이를 이토록 치열하게 다룬 작품이 또 있을까. 책에서 묘사된 ‘얼어붙은 여자’의 이야기는 그러한 이유로 세상 모든 여성들의 자서전이 된다.
수백 년 전의 그녀들이 그러했고, 수십 년 전의 그녀들이 그러했듯
작중 화자는 남성과 여성에게 정해진 역할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일상을 공유했던 부모의 영향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일 집에서 커피와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요리하고, 채소 손질을 한다. 스웨터 소매가 팔 위로 말려 올라가지 않게 그녀에게 손으로 소맷자락을 붙들고 코트 입는 법을 가르쳐준 것 역시 아버지다. 반면 작은 상점 겸 카페를 운영하며 장사하는 걸 더 좋아하는 어머니는 여자아이가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기쁨,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잘 정리하고 ‘얌전하게’ 식탁을 치워주는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따윈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별나고 우스꽝스러운 커플이란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들의 세계 속에서 화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소녀로 자라난다.
그렇게 “넌 너만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화자지만,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를 벗어나면서 성별에 따른 역할과 남녀 간의 차이로 가득한 세상의 논리에 시시때때로
상처받는다. 여성의 헌신과 희생을 자극하는 말, 몸은 불결한 것이고 재능은 죄악이라는 것, 내가 식료품점 주인의 딸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과 어린애를 애지중지하고 유아차를 미는 그 이상의 운명은 없으리라는 미래에 관한 말들. 내 에너지의 일부를 매력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써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어느 남자아이의 마음에도 들지 못할 것이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는 인생은 살 가치도 없다는 인식들. “너는 결혼 안 하고 늙을 작정이냐!”는 은밀한 압력 아래 나는 그저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연속된 깨달음. 이렇듯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의 삶에 매겨진 공식에 가까운 관습들은 성장하는 내내 그녀의 발목을 붙든다.
무엇이 어머니를 전시회며 중세의 시가지로, 느긋하게, 밖으로 나가게 하는 걸까? 왜 어머니는 가난하고 불구인 사람들을 방문하는 자원 봉사 노릇을 할까? 여자로서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 조용히 머무르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내게 던지는 질문이라도 되는 듯, 나는 어머니가 완벽했다고 결론내렸다. 세상이란 거기에 뛰어들고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 무엇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 42p
그중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도대체 저게 커서 뭐가 될까, 라고 한다. 경멸하는 어투. 위협. 나는 남자들의 대화를 엿들어본 적이 많아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한다. 하지만 뭐라고 응수해야 할지 모른다. 남자애들처럼 싸우기 좋아하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과, 그들 말처럼 잡년이 되는 것 사이에 어떤 확실한 관계가 있는지 그때까지 몰랐다. 상처받았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최악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그에게 덤벼들어 때려주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 52p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몸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남자아이의 마음에도 들지 못할 것이고, 절대 사랑받지 못할 것이고 인생을 살 가치도 없어질 것이다. 마음에 든다는 것과 사랑이라는 인수는 존재의 목적과 같다는 아름다움의 방정식이 성립하고, 그 방정식은 아주 쉽게, 그리고 ax² + bx + c = 0 라는 방정식보다 더 교묘하게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 그 공식은 곳곳에 쓰여 있다. /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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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봐야 진짜 여자가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것, 결혼은 곧 ‘완성’을 뜻하는 또 다른 말임을 우리는 부단히 들어왔고 또 그렇게 믿으며 살아간다. 결국 화자는 결혼 이후의 불확실한 삶, 출산에의 공포까지 짓눌러버리는 저 당연해 보이는 말과 아름답고 지적인 커플의 결합이라는 감동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며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남성과 여성에게 규정된 확고하고도 분명한 역할론 안에서 질식할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다른 여자들보다 미숙한 데다 식사 때 남이 차려놓은 음식을 편하게 먹으면 되는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으름뱅이며, 달걀도 깔끔하게 깨지 못하는 쓸모없는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아직 말 못 하는 아이와 남겨진 빈방들의 고독. 내 삶의 모든 자유는 아이의 오후 수면 상태에 달려 있으며 ‘모든 것이 세 살 이전에 결정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저주에 따르는 완벽한 양육에의 강박까지.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럼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지. 너희가 좋아서 아이를 낳은 거잖아.
정오와 저녁에 나는 냄비 앞에 혼자가 된다. 나는 그보다 더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그저 빵가루 묻힌 송아지고기 커틀릿, 초콜릿 무스나 할 줄 알았지, 특별한 것은 할 줄 몰랐다. 그나 나나, 어머니 치마폭에서 요리를 도운 과거가 없었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 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 어떤 우월성을 명목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 181p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먹을 것과 똥, 거기에 세균과 아이 기분을 맞추기에 대한 강박관념. 물론, 하찮은 집안일을, 많은 사랑이 필요한 훌륭한 일 등으로 찬양하고, 똥을 미화해야 한다. 방울져 떨어진 우유의 흔적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서 시를 찾아야 한다. / 198p
심지어 여기에 더해, 완벽한 여자가 되려는 충동 속으로 빠져들었다. 살림, 아이 그리고 프랑스어 수업 세 개를 모두 홀로 감당하고, 가정의 수호자이자 지식의 분배자, 단순히 지적일뿐만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 조화를 이루는 슈퍼우먼, 결국 이 모든 것을 절충하고 긍지를 느끼는 여자가 되려는 충동. / 2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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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도록 섬세하고 신랄한 묘사들은 문득 잊고 지냈거나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던 불편한 감정들을 들춰내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름 없는 화자에게 나의 이름을 덧입히느라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몸살을 앓을 것 같기도 했다. 때문에 이 책이 출간된 지 40년이 흘렀지만, 책 속의 묘사된 남녀의 본질적인 부분들은 의외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인식은 점점 해소되어가고 있으나 여전히 타고난 성의 역할과 그 안에 내재된 모순 속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가 묘사한 화자와 여성으로서의 삶은 우리 시대와도 깊은 공감을 이룬다. 무엇보다 아니 에르노는 처절했고, 치열했던 자기 역사의 글쓰기가 어떻게 문학이라는 장르로 탄생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가란 생각이 든다. 덕분에 앞으로의 나의 글쓰기 역시 ‘나는 나에게 얼마나 진실한가’를 물어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