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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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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덮고서도 내내 휘슬스톱 카페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편견과 차별, 배제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
1985년 미국 남동부 앨라배마 주 버밍햄의 로즈 테라스 요양원. 에벌린 카우치는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를 방문했다가 두 사람을 피해 건물 뒤편의 방문객 휴게실로 향한다. 평소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과 그녀를 못마땅해 하는 시어머니로부터 달아나 편안하게 막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데라곤 그곳뿐이었다. 최근 들어 잦은 우울감을 느끼던 그녀로서는 그나마 달콤한 간식이 유일한 위안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신을 클레오 스레드굿 부인이라 소개하는 한 노부인이 나타나 스레드굿 가에 얽힌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때는 1920년대, 버밍햄 인근의 작은 마을 휘슬스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뜻밖에도 에벌린 카우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인종과 차별을 뛰어넘어선 연대와 사랑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아기들이 태어났고, 우리가 수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인데……. 정말이지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삶이었다오.”
스레드굿 가는 언제나 시끌벅적, 객식구가 끊이지 않았다. 읍내에 가게를 둔 아빠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든 혹은 무엇을 필요로 하든 ‘안 돼.’라는 말 한 번 없이 자루에 담아서 때로는 외상으로도 가져가게 했다. 엄마는 낚시와 사냥을 좋아하고 언니의 결혼식에서 끝끝내 나비넥타이에 슈트를 입겠다는 막내 딸 이지의 성향을 너그럽게 인정해줄 줄 아는 이였다. 해서 네 살 때 폐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클레오 스레드굿 부인까지 거두어 함께 살 만큼 자애로운 부부 덕에 마을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사랑했다.
스레드굿 가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딸인 말괄량이 이지의 이야기는 에벌린을 매혹시킨다. 생기발랄하고 엉뚱한 구석이 많지만 늘 당당했던 이지는 오빠 버디가 기차 사고로 죽은 뒤 사랑을 거부하는 아이로 자란다. 그런데 이지가 열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스물한 살가량의 아름답고 다정한 소녀 루스가 우연히 스레드굿 가를 찾아오면서 이지는 다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약혼자가 있는 루스로서는 이지의 마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루스가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자 이에 상심한 이지는 루스를 원망하지만, 루스의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를 구해 온다. 이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안정을 되찾은 두 사람은 작은 카페를 열고, 루스의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가족들을 꾸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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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작은 공간 하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요.” 훗날 마을의 소식을 전하는 닷 윔스는 이지와 루스의 카페를 두고 이렇게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휘슬스톱 카페는 온갖 떠돌이 부랑자들이 모여들고,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흑인들도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스레드굿 부인 역시 에벌린에게 도대체 손님을 끌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금전 등록기는커녕 돈은 그냥 시거 박스에 넣어두고 거스름돈도 각자 알아서 꺼내 가게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풋토마토 튀김, 버터밀크 비스킷, 붉은 그레이비 소스를 곁들인 햄 구이, 폭찹과 그레이비 소스, 메기 튀김 같은 맛있는 음식들은 아낌없이 모두를 품어주었다. 때문에 휘슬스톱 카페는 사회적 약자나 소외받은 이들도 누구나 갈 수 있는 따뜻한 안식처 같은 곳이었고, 이곳에서 받은 사랑과 우정을 기억하는 이들은 언젠가 이지와 루스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가족처럼 발벗고 나서서 도와준다. 여기에는 타인을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어떠한 차별이나 배제 없이 존재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알았던 이지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지는 아무도 나에게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해선 안 된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죠. 클레오는 이지에게 홀로 KKK단에 대항하는 거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이지에게 간섭하는 건 허용하지 않았어요. 이지가 마음이 고운 만큼이나 용감하기도 하다는 사실은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드러났답니다…….” / 74p
“그렇지. 게다가 네가 늘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게 또 있다. 이 땅에는 굉장히 멋진 것들이 있단다. 그것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지. 그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 말 알겠니?” / 178p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이 들려주는 이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간 그녀는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순결을 지켰고, 노처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다. 불감증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오르가슴을 연기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가졌다. 괴상하다거나 남성 혐오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고,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바가지를 긁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시대의 변화하고 있었지만 적응하기 힘들었고, 과거의 완벽한 여성이란 기준과 개방적인 신여성들의 삶 사이에서 자신은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을 연상시키는 자신을 삶을 내내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레드굿 부인을 만나러 가면서 에벌린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이지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장점을 알아봐주고 죽음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줄 알았던 스레드굿 부인의 영향 덕분이기도 하다.
“한 개 정도라면 괜찮겠죠. 예닐곱 개가 아니라면요. 정말로 뚱뚱해져서 아예 포기해 버릴 배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체중을 줄여서 정말로 날씬해질 만큼 의지력이 있던가요. 저는 그저…… 딱 그 중간에 끼어 있는 기분이에요. 저에겐 여성 해방 운동이 너무 늦게 왔어요…….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더라고요. 부인께서는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네요. 제가 뭘 알았겠어요? 이젠 뭔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인생이 그냥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만 같아요.” / 95p
애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에게 이곳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음, 있어요, 가끔 느껴요.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떠나 버렸으니……. 가끔 교회 사람들이 보러 오긴 하지만 그저 안부 인사나 나누고 가 버리죠.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만나고 작별하는 거죠. 가끔 클레오와 어린 아들의 사진을 보면서 지난 일들을 그려 본답니다.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스레드굿 부인은 에벌린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힘이에요, 에벌린. 꿈, 내가 보낸 시절에 대한 꿈이죠.” / 294p
이전에는 에벌린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우선 그녀 자신부터가 그랬다. 스레드굿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자꾸 하자 에벌린은 점점 더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마음속 토완다는 갈수록 유순해졌고, 에벌린은 어느새 분홍색 캐딜락 뒤에 서 있는 날씬다고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바로 그 일요일, 에벌린은 마틴 루서 킹 기념 침례교회에 갔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생각을 멈추었으며 자신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468p
이처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여성들의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담은 ‘여성을 위한 희망 연대기’다. 편견과 차별, 배제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이지의 모습은 202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특별하다. 작품 속에서 이지와 루스는 레즈비언으로 묘사되지만, 이들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고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인간적인 사랑의 형태를 그리고 있기에 이 연대가 보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때문에 스레드굿 부인이 남긴 작은 상자와 그 속에 담긴 스레드굿 가의 추억을 들추어보던 에벌린이 흐느껴 우는 대목에서 나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고작 작은 상자 하나에 담기기에는 이 작은 여성들의 사랑과 온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서 그만 참을 수 없이 눈물을 쏟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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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문득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가 생각이 났다. 억압과 부조리 그리고 차별과 폭력의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온 20세기 신여성의 삶이 이 땅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또 어떻게 21세기 여성들에
게 길을 열어주었는지 심시선이라는 한 여성의 목소리와 가정사를 통해 보여준 이 작품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어쩐지 닮았다. 그만큼 유머와 미스터리, 감동, 인종과 차별을 뛰어넘어선 연대와 사랑이란 메시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이라 내내 기억될 듯하다. 죽음을 앞두고 나는 내 곁에 있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상상해본다. 후회로 가득한 과거 이야기가 아닌, 스레드굿 부인처럼 내 삶 속에서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희망을 전달할 수 있을까. 나의 여생은 아마도 그러한 바람을 실천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다짐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