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배신의 시대 - 격동의 20세기, 한·중·일의 빛과 그림자 역사의 시그니처 1
정태헌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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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시대정신을 들여다보는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인문 교양서!

과거를 통해 오늘을 비추는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오롯이 전달한 책!

 

 

 

  20세기 초제국주의민족주의사회진화론 등 근대화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가 동아시아전체를 뒤흔들었다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의 개념으로 무장한 사회진화론이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군림하며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나 각국의 정체성을 무력화시켰다아편전쟁 이래 제국주의 침략은 동아시아가 약하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됐다이에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해 동아시아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피점령국의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기 시작했다이 무렵엘리트라 불리던 지식인들은 근대 이데올로기와 일본의 군국주의 정치 몰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그대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인가혹은 거부하고 투쟁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때문에 그들 중 누군가는 평화와 독립을 외쳤고 또 누군가는 침략전쟁에 나서거나 조국을 버렸다.

 

 

 

  『혁명과 배신의 시대』 는 이 무렵에 활동한 ··일의 상징적인 인물 여섯 명을 통해 당대 지식인들은 저마다 어떠한 신념을 품었으며 20세기 동아시아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되짚어본다제국주의사회진화론근대주의근대화론(), 평화 등의 키워드를 통해 근대화라는 탈을 쓴 침략 전쟁의 이데올로기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자세히 살펴본다중국인을 깨운 문학혁명가 루쉰오직 권력을 추종하며 친일파의 상징이 된 왕징웨이식민지 조선에서 희망을 엿본 조소앙내선일체를 부르짖은 친일파 이광수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변호한 후세 다쓰지일본을 제국주의의 몽상에 빠뜨린 도조 히데키. 20세기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하는 이 여섯 명의 대조적인 삶을 쫒아가다 보면,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격동의 20세기혁명과 배신의 시대 속 빛과 그림자

 

 

  일본이 막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을 무렵중국의 지식인 루쉰과 왕징웨이 역시 사회진화론을 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회진화론은 강자가 약자를 이끌며 자행되는 약탈과 학살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입했다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Q정전광인일기를 쓴 루쉰은 진화론의 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 등을 수성’ 즉 짐승의 본성에 비유하며 침략론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했다따라서 남을 침략해야 만족감을 느끼는 부국강병론의 근대주의적 수성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약육강식에 종속된 수성보다 정신 계몽을 통한 개개인의 문명화와 개성 해방을 강조한 것이다반면왕징웨이는 일본의 침략 논리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권력 장악이라는 목표가 가장 중요했던 그는 일본에 종속된 정권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세력이 새로 구성될 중앙정부의 주도권을 잡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가령 말일세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머지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그렇다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있었지만희망을 말하는 데야 차마 그걸 말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도 글이란 걸 한번 써보겠노라 대답했다이 글이 최초의 소설 광인일기. / 34p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발자국을 남기면 그것이 곧 문화가 되고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그가 찾는 희망은 여기에 있었다.

루쉰은 중국이 하루빨리 구습을 타파하고 근대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근대화가 오로지 서구가 만들어낸 방법 그대로의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이런 특징은 사회진화론의 본질을 파악한 그의 인식에서도 확인된다. ‘자득자결로 분투하는 깊은 고민의 과정은 중국의 현실에 절망하면서도자신이 발 딛고 있는 그곳에서 희망의 에너지를 찾는 배경이 됐을 것이다. / 45p

 

 

 

  어째서 조소앙’ 이 이름 석 자가 나에게 이리도 낯선 것일까. 1904년 일본에 파견된 황실 특파 유학생 50명 중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는 단 4(조소앙최린최남선김지간)뿐이었는데그나마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계속 활동한 사람은 조소앙 그 뿐이었다고 한다또한 그는 1919년 김교헌김규식김동삼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이기도 하다그는 우리 민중은 무산계급 독재도 자본주의 특권계급의 사이비적 민주주의 정치도 원하는 바가 아니요오직 대한민국의 헌법에 제정된 균등사회의 완전 실현만을 갈구할 뿐이다이것은 인류의 이상이 지향하는 정상적 요구이며 그 실현을 촉진함은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민족적 최대과업이라 했는데저자는 조소앙의 이러한 메시지야말로 21세기 한반도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과제임을 강조한다개인적 우월감 속에 제국주의적 근대주의에 갇혀 자기 민족과 역사를 비하했던 이광수그의 그늘이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업 역시 마찬가지다.

 

 

 



 

 

 

 

군국주의와 전제정치를 없애버림으로써 민족 평등을 전 지구에 두루 펼치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 독립의 첫 번째 의미인 것이다… 모든 동포들에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재산을 베풂으로써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고르게 살 수 있도록 하며 … 모두가 동등한 지식과 동등한 수명을 누리도록 하여 온 세상의 인류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니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라를 세우면서 내세우는 깃발인 것이다. - 대한독립선언서(1919) / 151p

 

 

 

다윈의 진화론이 마땅히 성경을 배신할 것 … 힘이 옳음이다힘센 자만 살 권리가 있다힘센 자의 하는 일이 옳다!’ 나는 이러한 도덕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이광수가 수용한 진화론은 다윈의 것이 아니라독일의 에른스트 헤켈이 주장한 국가주의적 진화론이었다헤켈은 적자생존가장 우월한 자의 승리라는 전제 없이는 자연도태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 201p

 

 

자진해서 침략전쟁의 나팔수가 된 이광수는 민족의 해소가 내선일체라고 선언했다의무교육을 통한 교육의 차별 철폐창씨개명지원병제와 징병제 시행은 내선일체가 실현돼 가는 구체적인 과정이었다이광수는 이것이 조선 민족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길이라는 착각을 홀로 확신했다. ‘내선일체와 동아신질서를 민족적 차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 설정함으로써 민족을 버린 자괴감이나 패배의식도 상쇄시킬 수 있었다. / 244p

 

 

 

 ‘미국과 영국 두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아시아 민중이 모여 함께 싸워 물질 만능의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자!’ 정치군인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태평양전쟁의 구호를 앞세워 조선과 대만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 전체로 침략지를 확대해나갔다하지만 패전 후에는 대동아전쟁은 그들이 도발한 것이며 나는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자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당한 것일 뿐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메이지유신 이래 진주만 공습에 이르는 동안 일본 사회는 늘 침략전쟁에 환호했고 늘 먼저 전쟁을 도발했지만이를 망각하는 무책임의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에 그대로 배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반면의열단원 아나키스트 박열이 무죄 석방되도록 나선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민족을 넘어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그는 일본 사회가 군국주의의 열풍에 갇혀 침략에 환호하던 시절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일본이 주창한 식민지 조선 개발이 조선민족을 위해 슬픈” 일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나라와 이념을 넘어 진정한 박애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그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시대정신이 아닐까 싶다.

 

 

인종주의는 본성이 사악한 무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발현된다이런 점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평범함 속에서 악의 평범함을 지적한 것이다.

루쉰도 1928년 혁명문학 논쟁을 통해 민중은 무조건 혁명을 지지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고 입이 아프도록 지적했다실제로 세계의 혁명 역사를 돌아보면 민중은 변화와 혁명의 주체이기도 했지만동시에 반동의 지지자이거나 방관자이기도 했다.

다문화사회가 된 오늘의 한국 사회 역시 배제의 정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식민 지배의 경험을 안고 있는 국가로서후세가 말한 평화 국가로서의 한국이라는 이상적 내용을 얼마나 채우고 있는가? / 303p

 

 

 



 

 

 

 

 이처럼 혁명과 배신의 시대는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미래를 꿈꾼 여섯 명의 인물을 통해 20세기의 시대정신을 들여다보는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인문 교양서다. 20세기가 남겨놓은 시대유산과 과업들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극복하고 또 새로운 미래를 마주할 것인지 고민해보게 하는 책이다아울러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20세기 역사의 명과 암을 진득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기원전부터 현대까지 각 세기의 대표적 시대정신과 상징적인 인물들을 엄선한 시그니처’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만큼앞으로 출간될 책들 역시 무척 기대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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