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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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예술로 기워낸 수용소 문학의 정수!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 올려야 하는 인간의 고독한 운명!

 

 

 

 

  순찰대가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를 찾아온 건 1945년 1월 15일 새벽 3영하 15도의 추위가 한층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꼼짝없이 러시아 강제수용소로 징집된 레오에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주었고그것으로 마음의 정리를 하는 듯했다반면 레오는 너무 나쁜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진즉에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열일곱 살의 동성애자였던 레오의 삶에 새겨진 혼돈의 무늬가 곧 혐오로 뒤바뀌리라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할머니는 떠나는 그에게 말했다너는 돌아올 거야.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수용소라는 단어에조차 무감각했기에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그였다하지만 그는 몰랐다그 말이 내내 자신과 동행하리라는 것을그 말이 자신이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심장삽의 공범이 되고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어주리라는 사실을.

 

 

 

참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었다. / 50p

 

 

 

  양배추수프만 먹던 뼈와가죽의시간이었다.

  훗날 레오는 수용소 시절을 이렇게 정의한다배가 고프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곳공복을 먹고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허기가 다른 모든 생각을 길들이는 굶주림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곳빵의 덫에 걸리지 않는 자가 없고빵의 법정 앞에서는 일반적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누군가의 죽음은 곧 그들의 옷과 아껴둔 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는 곳나의 오장육부를 초라하게 만들고 수치심이 사치가 되는 곳.

 

 

 

  뻐꾸기시계를 바라보며 지금은 몇 시인가보다 난 얼마나 더 살까를 더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삶이란 얼마나 처참한가수용소는 향수도소망도 박탈한다집이 있는 바깥세상의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면 집으로 가고 싶기는 한지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자문하게 된다또한 수용소는 무언가를 결정할 필요도결정할 의지도 사라지게 한다이따금 권태만이 그저 가끔 내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 할 뿐이다고된 노동을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가는 길을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부르게 될 줄 또 누가 알았을까.

 

 

 

수용소 시절 이전부터 이후에 이르는 이십오 년 동안 나는 공포 속에 살았다나라와 가족들에 대한 공포나라가 나를 범죄자로 가두고가족들이 나를 치욕으로 여겨 내쫓으리라는 이중 추락의 공포였다. / 12p

 

 

설원에 우리뿐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설원에서 서로서로 바짝 붙어 똑같은 걸 강요받는 우리 모습을 보는 이가 없어 얼마나 다행이던지나는 용변이 급하지 않았지만 바지를 내리고 쭈그려 앉았다그 밤의 세계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고 고요하던지서둘러 대소변을 보는 우리를 얼마나 웃음거리로 만들던지. (눈밭은 우리를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던지맨엉덩이를 드러낸 우리를 아랫도리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외롭게 버려두었다그 유대 속에서 우리의 오장육부가 얼마나 초라하던지. / 24p

 

 

죽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전리품만 보인다시체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다입장이 바뀐다면 죽은 사람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그리고 누구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흔들림 없이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 / 167p

 

 

 



 

 

 

 

  때로 물건들은 형언할 수 없는 의외의 섬세함을 가지게 된다.

  레오에게 있어 베개는 아껴둔 빵의 은신처이고건더기 없는 양배추 수프를 한 술 한 술 퍼올릴 때마다 달그닥거리는 소리는 시린 배고픔의 진한 양철키스한 달에 한 번 공장 경비실에서 배급받는 우유는 가혹한 노동의 화학냄새를 마비시키고 천천히 죽으라고 내어주는 다른 세상의 맛이다총알이 튕겨 오르듯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검은 포플러는 총살을 기다리던 날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고집에서 가져온 붉은 포도주색 실크스카프는 더 이상 나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하지만 때로 어떤 물건은 살아가야 할 의미를 주기도 한다레오는 어느 러시아 여인에게서 받은 하얀 아마포 손수건명주실로 손뜨개하고 작은 장미꽃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그 아름다운 손수건이 자신을 살게 했노라 고백한다수용소 안에서는 도무지 쓸 일이라고는 없지만수년 동안 물물교환 장터에서 먹을 것과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손수건만이 유일하게 운명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너는 돌아올 거야라던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의 모습으로 바뀐 게 틀림없다고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그를 보살펴준 단 하나의 존재였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이렇게 헤르타 뮐러는 단어와 대상의 거리를 좁히는 시도를 통해 수용소에서의 일상을 집약적이면서도 생생하고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독특한 언어 세계관을 완성해낸다.

 

 

 

고향에 돌아갔을 때 유리병들이 내 증인이 되어주리라 생각했던 걸까나는 믿음이 담긴 병과 의심이 담긴 병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뚜껑 있는 병에는 귀향을나무마개로 밀봉한 병에는 수용소에서의 영원한 삶을 담은 것이었을까.

(귀향과 수용소의 삶이 서로 반대말이었나그렇다면 나는 그 두 가지 모두에 맞서고 싶었다아마도 나는 그 순간부터 수용소의 삶아니 삶이라는 것이 희망에 의존하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매일매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런 마음에 휘둘리지 않도록 애썼다. / 182p

 

 

스카프는 트렁크 바닥 하얀 아마포 손수건 옆에 있었다손대지 않은 지 벌써 몇 달째였다스카프는 피붓결처럼 고왔다두려움이 엄습했다흐르는 듯 부드러운 마름모꼴 스카프를 보고 나는 수치심에 휩싸였다황폐한 나에 비해스카프는 예전처럼 나긋나긋했다광택과 무광택이 섞여 있는 바둑판무늬도 그대로였다스카프는 수용소에서 변하지 않았다바둑판무늬 속에서 조용히 자기 원칙을 지켰다스카프는 이제 내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었다다시 말해 나는 스카프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 201p

 

 

 

  5년 만에 레오는 고향으로 돌아온다수용소 사람들은 고향으로 갈 때쯤이면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을 거라고 수군댔지만모든 것이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기에 고향은 달라지지 않았다달라진 건 그자신뿐이다그는 고향 땅을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 틈에서 이방인처럼 현기증을 느낀다추락과 비굴함에 길들여진 그는 가족에게도결혼한 아내에게서도 정착하지 못한다자유인이 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수용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하여 너는 돌아올 거야로 시작된 이야기는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로 끝을 맺는다.

 

 

 

시간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차했고 세상과 끝장났으므로아니 세상이 우리와 끝장을 냈으므로. / 52p

 

 

너는 돌아올 거야삽질을 하며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슬렀고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배를 곯고추위에 떨고중노동을 하고 싶었다나는 할머니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나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그러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그래요할머니하지만 그거 아세요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 82p

 

 

 




 

 

 

 

  『숨그네는 전쟁의 그늘과 상처를 다루고 있지만근본적으로는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 올려야 하는 인간의 고독한 운명을 다룬 역작이다어쩌면 수용소란숨을 쉴 때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흔들리고 마는 인간의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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