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이어령 유고집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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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큰 어른이 남기고 울림의 언어들!

당신의 미래를 이끌어갈 키워드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제목의 동요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어릴 적말놀이를 하듯 참 열심히 불러댔던 노래다작곡가가 누구인지작사가는 누구인지언제부터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인지원숭이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으로 마무리되는 이 난데없는 노래를 우리가 왜 이토록 오랫동안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언어 DNA’라는 게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쓰신 언어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라 쓰고 다시 나와 내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언어 유전자(이어령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거죠이 생물학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긴 말과 글 속에도우리가 사용하고 있는아침저녁으로 쓰고 있는 말과 글 속에도 똑같이 문화 유전자가 숨어 있습니다.’ 언어 즉 문화 유전자란 것은 내가 없는 세상우리가 없는 세상에도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해간다는 것이다그리고 바로 이 노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야말로 자신이 경험한 100년의 시간이 남겨놓은 시대의 기록이자 자취라 하며 이 책을 쓰게 된 소회를 풀어나간다원숭이사과바나나기차비행기이 다섯 가지 키워드의 마지막인 백두산에 오르기까지 우리가 가지고 살아왔던 게 무엇이고우리가 없는 세상 저 먼 미래에는 이러한 키워드들이 어떻게 바뀌고 거기에서 어떤 문화 유전자들이 이어져갈 것인가를 짚어보며백두산에 이어 새 시대의 중요 키워드가 될 만한 유산을 남겨놓고자 한다.

 

 

 

오늘 나는 그 이야기를 하렵니다우리 DNA의 네 가지 화학 기본 물질처럼 언어로 내 평생을우리가 겪은 이 시대를 나타낼 수 있는 소위 키워드, DNA 같은 말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내가 읽은 그 많은 책내가 들은 그 많은 노래그 모든 것을 찾아보고 그 안에서 몇 개의 단어를 추려봐라그것도 나 혼자 경험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를 기준으로 할 때 80 평생한 세기 100년에 가까운 개화기부터 내려온 그러한 우리 역사를우리 생활을공동으로 경험했던 것을너의 이야기가 됐든 나의 이야기가 됐든 그 이야기를 몇 가지 단어로 추려봐라.” / 9p

 

 

 

잘 있으세요여러분 잘 있어요

 

 

  놀랍게도 과거 이 땅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았다고 한다세종대왕 실록이나 성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진상품으로 받은 기록은 있으나 우리에게 원숭이는 상당히 낯선 동물임에 틀림없었다그러다 1909년 개화기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대중들은 처음으로 실제 살아 있는 원숭이를 보게 되었다개화기 때 처음으로 외국 사람을 본 것처럼어쩌면 원숭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원숭이라기보다는 일본 사람선교사외국 사람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는 왜 하필이면 손이나 발도 아니고 하필 엉덩이를 언급하는 것일까여기에서 이어령 선생님은압도적인 힘을 가진 외국의 위력에 놀라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업신여기고 비하하는 이중 감정을 지닌 개화기의 외국관이 곧 원숭이의 엉덩이를 상징하는 것이라 추측한다그들의 문화와 힘을 대단히 여기면서도 별 거 아니야’ 하는 오기 같은 것이런 감정이 4000년 동안 그 많은 외압과 그 많은 외래 문화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온(비록 단점도 있겠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 핵심적인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과의 의미를 무엇일까요그냥 먹거리가 아닙니다사과라는 말 속에는 그대로 서양 문명이 압축된 상징적 이미지가 있어요. 19세기 헝가리에 아주 유명한 수학자가 하나 있었어요보여이 야노시노라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창안한 수학자이지요이 사람이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서양 문화는 딱 사과로 얘기하면 풀리지요아담의 사과선악과인류가 이렇게 해서 생겼잖아요기독교 문화종교 등 오늘날 유럽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복잡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든 것은 아담의 사과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사과로부터 시작돼요종교에서 시작된 거죠유럽의 모든 문화 문명을 이끌어온 기독교 정신이 바로 아담의 사과예요. / 29p

 

 

놀라운 건요이 바나나가 근대화 과정에서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는 거예요일본 사람을 바나나라고 그랬어요바나나명예백인얼굴은 노란데우리 같은 황색 인종인데쫙 껍질을 벗겨보면 하얗다일본 사람은 겉으로는 동양 사람이지만 안은 완전히 서구화됐다서양 사람들이다그래서 일본 사람들을 바나나족이라고명예백인이라고 불렀어요사실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원숭이 노래에서 백두산만 빼놓고 모든 게 그래요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도양 사람이지만바나나처럼 껍질을 벗겨보면 어느새 100년 동안 하얀 사람이 되어버렸어요이렇게 보면 바나나의 상징성은 더욱더 짙어져요. / 39p

 

 

 



 

 

 

 

  선교사들이 직접 나무를 갖다 심은 사과바다 너머의 서양을 상징하는 외국의 맛 바나나식민 정책에 의해 놓인 기찻길 그리고 저항과 눈물의 역사를 담은 열차. ‘떴다 떴다 비행기날아라 날아라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비행기도 못 만들고 비행 실험 하다 떨어져 죽은 모험가도 없지만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그걸 띄우는 노래를 만들었던 우리들이렇듯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속에 담긴 키워드와 그 안에 얽힌 시대의 정서를 읽어내는 이어령 선생님의 글에는 살아 마지막까지 성찰하고 사유하고자 하는 빛나는 지성인의 숨결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2008학년도 서울대 입학식에서 한 축하연설이 마음을 울린다그는 여기에서도 <떴다 떴다 비행기동요로 운을 뗀다뜬금없는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부터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날아야 된다라이트 형제 전에도 상당한 글라이더 비행선이 있었는데왜 엔진을 달고 활공이 아닌 제 힘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느냐글라이더와 플라이어는 다르다너희들은 지금까지 글라이더였다자기 힘으로 무엇을 한 게 아니다대학에 들어온 오늘부터 너희들은 목표를 가져야 한다자기 엔진을 가져야 되고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날아야 한다그것도 그냥 나는 것이 아니라 높이 높이 날아라우리 비행기처럼.” 하고자기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자기 엔진이 없으면 금세 고꾸라진다고스스로 에너지를 만들고추진력을 가지고실력을 가지고 날 수 있는 엔진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어린 당부가 깊은 울림을 준다.

 

 

 

저항이었죠기적 소리와 함께 간 우리의 슬픔을형님의 눈물을누님의 눈물을어린애가 뭘 안다고 기차가 가면 이렇게 욕을 했어요기차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을 꺾은 그 역사로부터 출발합니다기차 얘기를 하면 한국에선 참 슬픈 이야기들이 나와요트로트 기사들만 봐도 전부 비 내리고 완행열차예요그런데 슬프기만 하냐아니죠완행열차에다 야간열차에다 비 내리는 가장 열악한 기차 속에는 한국인의 정이 잔뜩 담겨 있어요. / 47p

 

 

내가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키워드들이 만들어지려면 지나간 나의 이야기다섯 개의 키워드역전의 드라마로서우리가 이제는 세계를 향한 발신자로서 세계와 친구가 되고외국인이 더 이상 원숭이가 아니고더 이상 사과나 바나나가 기차나 비행기가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이 되어버린 이 근대화 100년 속의 그 슬기가 필요해요종이비행기가 아닌 진짜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고또 그 비행기가 오가는 비행장이 세계 1등이 됐습니다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뜨기만 했지 날아야 할까요날려면 이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자기 엔진이 있어야 합니다. / 66p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원숭이사과바나나기차비행기로 상징되는 외국의 것을 열심히 쫓으며 뛰어왔다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다른 나라다른 문화의 것만 보고 따라갈 것인가이어령 선생님은 이제 백두산 그 이후의 키워드백두산부터 새롭게 시작될 키워드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고 강조한다. 100년 동안 우리 것을 다 내주고 버려뒀던 것들에게서양극화하지 않고 융합시켜서씨앗이 되고불씨가 되고작은 터널 속 빛이 되어줄 미래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무엇보다 디지털 세계와 아날로그 세계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디지로그 시대생명의 가치가 제일이 되는 시대가 되기를 바라며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잘 있으세요여러분 잘 있어요이제 그의 인사는 여기서 그치겠지만 지난 시간 그가 우리 시대에 전해준 언어는 오랫동안 살아남아 눈 먼 현대인들에게 맑은 지혜를 줄 것이라 믿는다.

 

 

 

100년 동안 살아온 내가앞으로 100년 동안 살아갈 어린아이들이 부르게 될 키워드 하나중요한 낱말 중에 하나를 꼽으면 버려둬입니다내가 살았던 시대의 가장 소중한 다섯 가지 키워드 속에서 잃어버렸던 그것이 그냥 버려지지 않고마치 누룽지처럼 묵은지처럼 우거지처럼 버려두었던 것이 우리 식탁에 올라올 새로운 메뉴로서 21세기앞으로 100년을 끌어갈 새로운 언어가 될 것입니다그것을 우리가 함께 경험하자는 것입니다내가 다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가슴속에 미래의 어린아이가 어떤 노래를 부를지 어렴풋하게 떠오를 겁니다우리가 새로 만들어낼 중요한 단어들이 무엇일지 짐작이 갈 겁니다. / 138p

 

 

 




 

 

 

 

  유고집 작별을 끝으로 이어령이라는 이 시대의 큰 어른은 우리와 이별했다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언어라는 유산은 우리에게 훌륭한 자양분을 주었다이제는 우리가 그에게 보답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오늘 내가 쓰는 언어가 미래 세대의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을 테니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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