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의 말
이예은 지음 / 민음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독 끈질긴 생명력으로 가슴에 남아 성찰의 촉매가 된 언어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언어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인지 고민해보는 데에서 삶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둘 무렵친구가 먼저 취직을 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콜센터 업무라고 했다평소 목소리가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던 친구라 구체적으로 콜센터 상담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단 취직이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좋아했다그렇게 3개월이 지나 만난 친구는 이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늘 활기찼던 음성은 온데간데없고상담 업무를 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푸느라 끊임없이 부정적인 언어만 쏟아내고 있었다그 어떤 직업도 쉬운 일이란 없겠지만당시에 나는 처음으로 감정 노동자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감정노동자. ‘감정을 숨기고 억누른 채 회사나 조직의 입장에 따라 말투나 표정 등을 연기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우리나라에는 대략 740만 명의 감정노동자가 있다고 한다콜센터 직원텔레마케터백화점 판매원 등 서비스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로 여기에 속한다콜센터의 말이란 책을 마주한 순간나는 그때 친구가 서러움에 복받쳐서 쏟아냈던 말들이 떠올랐다콜센터를 통해 오가는 그 불편한 언어들은 내가 세상을 참 말랑하게만 생각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다들 우리한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친구의 격한 토로는 순진했던 나에게 합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는 게 세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시간은 10여 년이 넘게 흘렀고감정노동자들의 처우가 예전보다는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들에게 박하다콜센터를 넘나드는 말의 무게에 대해수화기 너머로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그들의 진짜 목소리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이 세상에 누군가를 상처 주려는 말보다 보듬고 북돋아주려는 말이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때로는 회상하는 일조차 버거웠던 기억을 모아 기어코 책 한 권을 완성한 것은단지 이 말이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던 저자의 말은 여전히 무례와 비상식 속에서 고군분투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귀를 기울일 자세가 되어있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헤드셋 너머로 전해오는 감정의 언어들

 

 

  『콜센터의 말은 520일 동안 일본의 한 여행사 상담 콜센터에서 일하며 울고 웃었던 기록들을 담은 에세이다하루에 적게는 20~30많게는 70명이 넘는 고객과 대화를 나누며 실수와 부침을 거듭해왔던 과정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여기에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감염병이 몰고 온 혼란과 외국인 노동자로서 감내해야 했던 숱한 상처들까지총성 없는 전쟁터 같은 현장에서 묵묵히 나아가야만 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본다그러는 동안에 대부분의 말은 입을 떠나거나 귀에 들어오는 순간 소멸되었지만유독 끈질긴 생명력으로 가슴에 남아 성찰의 촉매가 된 언어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 많은 상담원이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하면 조금 아득해진다어릴 적 장래 희망으로 콜센터 상담원을 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낭랑한 목소리와 기민한 센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매력을 느낄 수는 있다하지만 콜센터가 삶의 1지망이었다는 사람은 콜센터 안에서도 찾기 힘들다상담원 일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높은 소득을 올리는 이들도 분명 있지만내가 경험한 콜센터는 각자의 이상적인 경로를 이탈한 사람들이 잠시 흘러 들어왔다 나가는 웅덩이에 가까웠다. / 8p

 

 

 




 

 

 

 

  고작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소리의 파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다니저자는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들을 필요가 없었을 표현들을 적잖이 만난다. “이봐요일본에서는 이럴 때는 알았습니다.’ 하는 거예요일본어 다시 배우세요.”, “여기 일본 콜센터 아닌가요왜 외국인이 받는 거죠?” 같이 외국인과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고 모욕감을 주는 이들이 있다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독단적으로 콜센터 상담사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무책임하다느니 상사를 바꾸라고 호통을 치는 이들도 있다. ‘콜센터에 전화만 하면 대체 왜들 그러는 걸까?’ 실생활에서 만나면 하나같이 차분하고 상냥한 이들이 비대면이라는 이유로고객이라는 이유로 언어라는 권력을 휘두른다덕분에 알게 된다인간은 사회적인 가면과 본능적인 욕구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평소에는 드러내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추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여행사도 잘못은 없는데 고생이네요.”, “솔직히 아가씨 잘못은 아닌데너무 뭐라고 해서 미안해요열심히 응대해 줘서 고맙고요.” 심장이 굳고 피가 식는 느낌을 번번이 경험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한마디와 사과를 건네는 고객들이 있기에 이를 치료제 삼아 견디고 또 견딘다무심코 건넨 배려 섞인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단비와 같은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체감한다.

 

 

 

  이치고 이치에일본어로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을 뜻한다고 한다상담원과 고객의 전화 한 통이야말로 어쩌면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일지 모른다한 건의 문의가 해결되고 나면 두 번 연결되는 일은 좀처럼 없고아무리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의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인생의 단 한번뿐인 만남에 누군가는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누군가는 다정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도닥이기도 한다나는 이쪽과 저쪽 중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가장 평범한 말이지만 이 말 한마디가 콜센터를 비롯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이자 하루의 고단함을 녹일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저도 초보 시절에 실수가 잦았어요누구보다 본인이 자책하고 있을 걸 아는데굳이 한 소리 더할 필요가 있나요.”

콜센터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이처럼 따뜻하지는 않았지만그 답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안 그래도 고객으로부터 매일같이 상처를 받는데 내부에서조차 감싸 주는 이 하나 없다면 어떻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실수는 불가피하다동병상련에서 오는 진한 동료애와 사려 깊은 리더십을 나는 콜센터에서 처음으로 체감했다. / 37p

 

 

이러한 노력이 통했는지 첫 석 달이 지난 후부터는 줄곧 평균 이상의 KPI를 유지했다. ‘고객을 감동시키되 전화는 최대한 빨리 끊어라.’라는 콜센터의 요구는디자인업계에 떠도는 화려하지만 심플하게라는 주문만큼이나 황당하고 비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객 감동과 최대한 빨리’ 둘 중 하나를 택한다보통 콜센터 KPI에 반영되는 비중은 통화의 질보다는 양이 높으므로어쩔 수 없이 상담원은 통화 시간에 민감해진다. / 52p

 

 

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나는 정해진 대본에 따라 누구보다 상냥하고 이해심 깊은 상담원을 연기해야 했다헤드셋을 쓰고 있는 나는 본래의 내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평소에는 타인의 일에 쉽게 간섭하지 않는 내가 고객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며 하나라도 더 도울 일은 없는지 끈질기게 물어봐야 했다. / 162p

 

 

 




 

 

 

 

  비록 1년 반 동안의 콜센터 상담원 시절은 고군분투의 연속이었지만저자는 이때 얻은 근력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산이 되어 다음 여정을 도울 것이라 믿는다아울러 고된 회사 생활이 자신을 끊임없이 생의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들에게나를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아득히 멀어 보이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무엇보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언어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인지 고민해보는 데에서 삶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나 또한 다짐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