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어서는 안 될, 6.25전쟁 그날의 이야기!
억압된 여성 서사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소설!
칙- 치지이익-
흐릿한 주파수를 또렷이 잡으려는 아버지의 표정이 유독 심각해 보인다. ‘작금의 상황으로 인해 다시 안내할 때까지 수업은 모두 중단하는 바이다. 오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 될 것이다.’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며 신나서 뛰어오는 동생 영수를 보고 어리둥절해 있던 소라는 또렷해진 주파수 사이로 들려오는 선명한 두 글자에 날선 긴장감을 느낀다. 전쟁. 6월 25일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전쟁이 일어났다.
“6월 25일, 남조선 괴뢰 정권이 삼십팔도선을 침범하여 우리 북조선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으므로 이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이다.”
“하나 조선의 동무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용맹한 북조선 군대가 개성을 점령하였고, 곧 서울로 진격하여 미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킬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공산당이 조선을 통일할 것이다!” / 20p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 북쪽으로 이백 리가량 떨어진 시골 마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소라와 그녀의 가족들은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는 외삼촌 내외가 있는 곳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김씨 아저씨가 함께 탈출하자고 제안했을 때만 하더라도 감히 집을 나설 수 없던 그들이다. 하지만 집안의 가장들을 강제로 징집시키기 위해 잡아가고, 전쟁의 폭음이 점점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마냥 이곳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자유’가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 그들을 남쪽으로 이끈다. 하지만 채 얼마 가지 않아 전투기가 으르렁거리며 머리 위를 뒤덮고, 바로 그 순간 폭격이 시작된다. 그 길로 소라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지수를 놓친다. 가족을 찾기는커녕 빗발치는 총알과 “동무들, 아바지 조국으로 돌아오라우! 조국을 버리지 말라우! 남조선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다!” 하고 외치는 확성기의 위협으로부터 일단 달아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렇게 소라는 여덟 살 동생 영수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책이다. 여기 있는 건 다 마찬가지래. 기억 안 나니? 새 교장이 수업 과정도 다 바꾸고 다른 책은 죄다 금지했다.” 오빠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책들을 다시 가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신경한 손길이 꼭 죽은 조개를 골라 바다로 도로 던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오빠가 말했다. “그저 매일 저만 옳다 주장하는 것들을 읽는 게 넌더리 나서 그랬다. 맑시즘, 변증법, 혁명 이론. 모든 것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 얘기나 늘 되풀이하는 헛소리들 뿐이라우.” / 30p
아바지가 왈칵 얼굴을 붉히며 오마니를 돌아봤다. “무슨 천치 같은 소리래? 싹 다 변하는 기요!” 아바지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조선 반도 전체가 공산당한테 떨어지는 거라우! 자유로운 선거두, 바깥세상이랑 통하는 것도, 속에 든 얘기 자유롭게 하는 것두 다 끝이란 말이다! 계속 이렇게 살고 싶소? 시도 때도 없는 당원 모임에, 이웃들을 두려워하면서? 꼭꼭 숨어서 기도하면서? 임자 부모님 모신 선산에 다녀오는 것두 일일이 보고하고 허락 받아 가면서?” / 45p
빨강. 공산주의의 색깔. 그것은 마치 불꽃처럼 온 마을을 불살랐다. 빨간색은 마치 사람들의 팔을 쥐어짜듯 팔뚝에 단단히 둘러져 있었다. 빨간색이 집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었다. / 57p
소설 『지켜야 하는 아이』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은 한 소녀가 동생과 함께 부산으로 가기 위해 처절한 전쟁터 속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 북한군의 총알과 인신매매의 위협도 모자라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동생까지 들쳐 업은 채, 앞으로 나가고 또 나아가야 했던 소녀의 여정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전쟁의 상처와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따금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먼저 살리겠다고 아슬아슬한 얼음다리 앞에서 소라와 영수를 밀치고, 기침을 하는 영수로부터 병이 옮을까봐 동행을 거절하기도 한다. 서울을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열차에 더 이상 몸을 실을 수 없어 지붕 위에 올라갔던 이들, 기차가 속력을 높이자 우수수 떨어지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까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보다 더한 지옥도가 어디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져서 전쟁은 어느 쪽에나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을 깊이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기분을 느끼며, 시야 저 너머에서 시꺼먼 구름이 소리 없이 치솟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비명이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과 신음들.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도 남을 만큼 생생한 소리였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언덕 위에서 넘실거렸다. 얼굴이 델 듯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늘 위로 흔드는 팔도, 희망에 찬 얼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숯덩이들과 매캐한 연기, 이글거리는 불길뿐이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 117p
“떠나다니? 같이한 적두 없는데? 너, 내 이름도 모르지 않니?” 아주머니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잘 들으라우. 나는 내 딸을 지켜야 한다. 니 동생한테 병이라도 옮았다간 큰일 나지 않갓니. 네 동생은 니가 돌봐야지, 내 몫이 아니잖니? 니 동생한테 남은 건 너뿐이란 말이다.” / 149p
“울지 마!” 나는 화가 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결국 우리는 배에 타지 못했다. 나는 영수를 잡아 일으킨 다음 다시 길을 걸었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공산당이 우리 바로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미칠 듯 겁이 나서 영수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내 기세에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영수를 엄하게 꾸짖었다. “정신 좀 차리라우! 공산당이 잡으러 오잖니!” / 157p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낸 것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주인공인 소라를 통해 억압된 여성 서사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누구보다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좋았고,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딸은 집안일을 돕거나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는 오랜 관념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해야 했던 소라. 여성이 가진 자아와 재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고작 품을 수 있는 꿈이란, 찢기고 구겨진 세계 지도 한 장짜리의 어설픈 희망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겨진 지도를 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영수의 바람 같은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당당히 소리쳤던 소라의 목소리가, 엄마가 건넨 튼튼한 교복 한 벌의 의미가 이 땅에 새로운 여성 서사를 써나가게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웠다. 부모님을 따라 성인 당원 모임에 참여하면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된 소년단 모임이 아니라, 새로 부임한 선생 조 동무가 부모님이 집에서 흘리는 반공산주의 발언을 신고한 학생들에게 주는 사탕이 아니라, 가족보다도 당에 더 충성하는, 그래서 더 이상 친구라고 믿을 수 없는 급우들이 아니라….
공부가 너무나 그리웠다. 수학, 지리학, 과학. 집안일을 빼먹을 수 있을 때면 나는 학교 창문 옆 버드나무 뒤에 숨어서 수업 내용을 훔쳐 들었다. / 13p
“오늘부터 이 오마니도 밭일할 수 있도록 니가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오마니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는 이제 끝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라니요?” 머리털이 쭈뼛 서고 입술이 떨렸다.
“소라야, 뭐 그리 유난이니? 이제 집안일 돕는 법을 배워야지. 그거이 너한테도 더 좋지 않갓어. 니 앞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누구의 앞날? 내가 원하는 미래는 그게 아닌데. “그치만 저는 커서 작가가 되고 싶습네다.”
“뭐? 작가?” 오마니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소라야, 니 정신 차려라.” / 97p
영수가 지도를 찾지 못하게 아궁이 불꽃에다 던져 버렸어야 했는데. 그럼 눈감기 전날 밤 마지막 순간을 아무 쓸모도 없는 지도 따위에다가 낭비하지 않았을 테데.
그때였다. 유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건. 나는 놀라서 유미를 쳐다보았다.
“소라야,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 기다.” 유미가 말했다. “그러니까 세상 바라보는 걸 멈추어서는 안 된다. 영수는 니가 꿈을 포기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기야.” / 323p
미국 역사에서 6.25전쟁은 이제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끼여, 태평양 건너 작은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미국 내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미국뿐일까. 이제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우리 아이들 세대에게 있어 전쟁이란,
게임 속에서나 일어나는 전투극이자 영웅들이 벌이는 거대한 난투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아픔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다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러한 시도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년 6월 25일은 다가오지만 점점 이날의 역사를 기리고자 하는 의미는 퇴색되어가는 요즘, 이 책이 부디 많은 이들에게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