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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평점 :
소외된 소통, 상대방이 듣지 못해도 닿길 바라는 목소리가 전하는 깊은 울림!
어딘가에는 말할 곳이 있다는 생각이 바스러져가는 사람들을 일으켜줄 수 있기를!
여러 대의 아날로그 전화기가 보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벨이 울리고 있습니다.
“차마 말하지 못해 부재중 통화가 되어버린 이야기,
당신에게도 있나요?
이제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당신의 ‘하지 못한 말’을 남겨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그 어떤 말도 괜찮습니다.” / 15p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는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이 열린 2018년 12월, 6평에 이르는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전시이다. 전시장에는 여러 대의 다이얼 전화기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벨을 울리고 있다. 전화기에 다가가 보면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를 받아보세요’라는 글이 적혀 있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어보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떨리는 목소리, 망설이는 목소리, 울먹이는 목소리, 살기 힘들다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헤어진 연인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사람, 엄마를 부르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 이 목소리는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궁금해지는 순간, 전시장 한쪽에 있는 커다란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곤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의 출처를 알아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남길지 말지 고민한 후, 조심히 손잡이를 돌려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면 파도 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자신의 하지 못한 말을 남기기 시작한다.
넘쳐나는 소통의 시대, 당신의 소통은 안녕한가요?
하루 평균 손바닥 안에서 150미터의 스크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통의 양이 활발하진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좋아요’로 정의되는 소통의 단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환영받을 만한 것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고 나머지는 점점 자취를 감추는 심각한 불균형의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내가 실제 경험하는 삶과 보여지는 세계가 다른 데서 발생하는 괴리감, 공허함, 소외감은 진정한 소통의 부재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는 사이 진정 하고 싶은 말들, 누군가에게 흐르지 못하고 어딘가 묻혀 있는 말들, 신호가 왔지만 받지 않은 우리의 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국내 웹아트 1호이자 인터넥티브 스토리텔러인 저자 설은아는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전시를 통해 소외된 소통, 상대방이 듣지 못해도 닿길 바라는 목소리를 ‘부재중 통화’라는 모티프로 하여금 누군가에게로 전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저장된 통화 원본을 하나씩 들으며 텍스트화한 전시 도록이자, 홀로 수많은 말을 삼켜야 했던 이들의 나직한 고백이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터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까운 사람보다 낯선 나라에서 우연히 스치는 여행자에게 오히려 속마음을 고백하기 더 편할지도 모른다. 거기엔 어떠한 선입견도 후처리도 필요 없는 홀가분함이 있다. 진정한 소통 한 조각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서로의 치유자가 될 수 있다. / 13p
모든 이야기는 소통의 공간이 필요하다. 소외된 말일수록 더욱 그렇다. 어쩌면 ‘하지 못한 말’ 그 속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진실한 삶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미고 치장한 이야기가 아닌, 거울 앞에 선 맨 얼굴의 이야기들. 머리가 아닌 가슴이 하는 말들. 혼자 끌어안고 있는 이야기들에게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이제는 자유로워지라고 말을 건네고 싶었다. / 122p
누군가 쏘아 올린 주파수가 당신의 마음에 닿기를
여기, 이 세상의 누군가를 향해 자신의 ‘하지 못한 말’을 꺼낸 10만 통의 부재중 통화가 있다. 열일곱 살인데 M자에 원형 탈모까지 생겨서 인생이 망한 것 같다는 고백, 방시혁을 닮은 남자친구를 보며 이왕이면 재력도 닮았으면 하는 바람, 그 날 변기 사고(?)가 어쩐지 나인 것 같다고 커밍아웃한 사연에 이르기까지. 민망해서 말하기 힘든 웃픈 고백들이 담겨 있는가 하면 가족이라서 더 솔직해질 수 없었던 사연들도 녹음되어 있다. 여러 번 죽으려 해서 미안했다고, 사실은 나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다고, 평생 원망만 해서 죄송하다고, 엄마 몫까지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누군가는 50년이나 살았는데 가진 건 없고 빚만 가득한 이 생을 더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게 되묻고, 자신을 성형수술하게 만든 이 불친절한 사회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고 일에서도 멀어지다 보니까 어느 순간 나의 유능함을 사라지고, 사람들이 내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거 같아서 속상하고, 실제로 나도 이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까 봐 두렵고 망설여지고, 꿈 많고 예뻤던 한 사람이 사라지는 거 같아서 속상하다. / 41,002번째 통화 32p
누가 먼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괜찮다고 답해도 끈질기게 물어봐주면 좋겠다. / 92,201번째 통화 241p
저자는 총 10만 통의 이야기 중 유의미한 내러티브가 있는 약 1만 1천 개의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가 다소 흥미롭다. 주로 어떤 대상에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지 살펴보면, 불특정한 누군가에게 남겨진 말(36%)이 가장 많았고 혼잣말과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27%)이 다음으로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그것을 흘려보내고픈 욕구가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남긴 ‘하지 못한 말’ 속에 내포된 감정을 살펴보면 바람(16.4%)이 가장 많았고, 슬픔(9%), 괴로움(6.4%), 안타까움(5.9%), 미안함(4.3%), 싫음(3.9%) 등의 부정적 감정이 사랑(6.4%), 고마움(5.3%) 등 긍정적 감정보다 더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 표현에 더 소극적이고, 보다 더 많이 가슴에 묻고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소통이란, 할 수 있는 말보다 하지 못하는 말에 보다 진실한 속살이 숨겨져 있음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진심은 결국 전해지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세상 끝의 바람 속으로. / 259p
2019년 2월, 저자는 세상의 끝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첫해에 모인 부재중 통화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곳에 내 목소리가 놓아지면 좋겠다’라는 장소가 나타날 때마다 잠시 멈춰서 그곳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놓아주었다. 그렇게 지구 반대편에서 모인 부재중 통화들이 하나씩 바람 속으로 흩어져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세상의 끝에 잘 놓아주는 의식을 치렀다. 이후 모인 부재중 통화들은 사하라 사막에 흩어질 예정이라고. 비록 전시는 끝이 났지만, 전화번호 1522-2290에 전화를 걸면 언제든지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에 접속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도착하는 한, 계속해서 이 번호를 열어둘 예정이라고 전한다. 만약 당신이 어디에도 할 수 없었던 말들로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면, 세상의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말이 어딘가에 가 닿기를 바란다면, 이 번호로 걸어보시길 바란다. 나 역시 다이어리 한 쪽에 이 번호를 새겨둘 예정이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있나요?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는 전시 과정과 작업물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긴 특별한 작품이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 수화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또 다른 수화기를 든 사람들에게 가 닿고, 또 세상 끝에서 자유롭게 흩뿌려지는 퍼포먼스를 기획한 작가의 예술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도 이내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 앞에서 한참동안 먹먹해지는 것은 결국 나의 이웃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내 이야기이기도 한, 너무도 공감이 가는 진실된 목소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퍼포먼스가, 소외된 소통을 연결해주는 따뜻한 시도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더 많은 목소리가 그곳에 담겨지길 바란다. 어딘가에는 말할 곳이 있다는 생각이 홀로 바스러져가는 사람들을 일으켜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에 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