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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잊혀서는 안 될 중요한 페이지!
내가 이 땅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무명들의 희생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2년 5월, 군속 지원
<매일신보>에 군속 채용 선전 기사가 실렸다.
지원 자격은 일본어 사용 가능자,
보통학교 졸업자 이상의 학력자란다.
집안의 기둥인 형님과 어린 아우들은
전장으로 보낼 수는 없다.
급여도 많이 주고 2년 근무 만기라는데,
우리 집안을 대표해 내가 다녀오는 것이 맞겠지. / 12p
1941년 말,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군과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오고갔다. 이 무렵 조선 반도에서는 ‘거대한 서양 제국 연합에 맞서 태평양 한가운데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황군을 조선인이 도와야 한다. 내선일체, 즉 일본과 조선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조선인 역시 참전하여 총력전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반도의 조선인 청년들이 하나둘씩 일본군에 차출되기 시작했고, 스무 살의 청년 최영우 역시 집안의 기둥인 형님과 어린 아우들을 대신해 전쟁터에 다녀와야 했다.
가장인 작은아버지가 신문을 펼쳐놓고 최영우에게 말했다. 현재 일본군이 사로잡은 미군과 영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포로감시원, 즉 군속을 수천 명 모집 중이라는 것이다. 군속은 군인이 아닌 군대 소속 공무원으로, 월급도 많이 주고 총칼을 든 군인으로 참전하는 것이 아니니 안전하며 무엇보다 드넓은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2년만 눈 딱 감고 버티면 다시 늠름하게 고향으로 돌아와 대학에 가고, 하고 싶었던 일들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을까. 그를 비롯해 많은 조선 청년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줄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하여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만 5년 동안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된 조선인 최영우가 당시 있었던 일을 기록해 남긴 원고를, 그의 손자가 직접 탐사하고 새롭게 발굴해 재구성한 글이다. 스무 살의 한 평범한 조선 청년이 어떠한 경유로 인도네시아에 도착해 낯선 포로감시원의 신분이 되어야 했는지, 봉급을 받는 근무 계약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일본군 이동병보다 못한 최말단 대우를 받으며 거친 전쟁의 풍랑을 견뎌냈는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몸이 비쩍 마른 포로들, 젊은 군인들의 성욕을 만족시키고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군 부속 위안소로 강제 동원된 조선 여인들까지. 최영우의 기록 속에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의적인 판단,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에 동원된 수많은 청춘들의 참혹한 고통이 담겨 있다.
휴일에 부대에 설치된 위안소에 가 봤다. ‘부대가 가는 곳에 위안소도 간다.’라는 구호처럼 이곳에도 이미 여인 부대가 들어서 있다. 방이 스무 개나 될까. 방을 배정받은 병사들이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준비한 콘돔을 들고 문을 열고 들어가 일을 치른 후 30여 분쯤 지나 다시 방에서 나오는 그들의 안색은 야릇하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여인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피지배 민족의 비애가 뼛속까지 사무쳤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 81p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선은 포로감시원의 운명까지 마구 뒤흔든다. 일본군이 동남아 전선 곳곳에서 패전하면서 일본군 점령지는 점차 연합군 수복지로 바뀌어 갔고, 이로 인해 포로감시원들 역시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재배치 및 근무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네덜란드인의 기초적인 자치를 허락하고 외출입을 비교적 자유롭게 관리했으나 1942년, 전환이 불리해지면서 이들을 한 공간에 억류하는 조치를 대대적으로 시행한다. 초기 2천여 명에서 시작해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만여 명 이상이 억류되고, 이로 인해 포로수용소와 다름없는 처우를 받은 민간인 사망자가 다수 발생한다. 이는 종전 후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전범 용의자가 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이후 포로감시원들은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된다. 일본군 소속임과 동시에 일본에 의해 수탈당하던 식민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연합군으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처우에 관해 협상하기 위해 ‘조선인 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으나 오히려 테러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조직으로 인식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조선인 민회 안에 섞여 있던 최영우는 포로감시원에서 포로 및 전범 용의자 신분으로 전환되고 만다. 그는 다른 포로감시원들과 함께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로 옮겨져 여러 차례 취조를 받다가 자카르타 인근의 치피낭 형무소로 이감되는데 그 과정에서 겪은 고초는 차마 말로 다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굶주린 우리들은 밭에서 김을 매는 시늉을 하면서 뿌리고 잎이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 입에 넣었다. 우리가 밭을 완전히 망쳐 놓은 것이다. 그 후 그 작업은 중지되었다.
하루는 장작을 패라는 명령을 받고 아름드리 나무뿌리를 모아 놓은 광장으로 나갔다. 그것은 차마 먹을 수가 없는 나무였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배를 굶주린 우리의 눈에는 그것도 먹을 것으로 보였다. / 186p
나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 격이다. 언제 교수대가 나를 부를지 모른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는 운명의 장난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다른 감방에 남아 있는 자들은 서로의 심정을 헤아릴까? 설령 이해한다 하더라도 별다른 도리도, 수단도 없다. 그저 복도의 철창 밖으로 오늘의 조사나 재판 과정을 잠시 물어볼 수밖에. 내가 그들과 한몸이 되어 걱정을 한다거나 그들을 대신할 수도 없다. 아무 조언도 실효가 없다.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것이 최대의 위안일 것이다. / 199p
그간 일제강점기와 관련해서 다양한 증언들을 봐왔지만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된 조선인의 이야기는 상당히 낯설다. 어째서 일본은 굳이 조선인들을 동원해 적국의 포로들을 감시하게 했던 것일까. 책에서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첫째는 일본군의 병력을 전투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포로 감시 업무는 전투 행위가 아니므로 훈련을 받은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둘째는 포로와 일본군 간의 일상적인 접촉 중에 생길지도 모를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앞세워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우월한 민족으로 찬미됐던 백인들을 일본군이 포로로 잡았다는 것을 직접 목도하게 해 일본의 위세를 선전하기 위함이다. 이때 기록에 따르면 3천여 명의 사람들이 출발했는데 겨우 130여 명의 동료들만 남아 귀환선을 탔다고 하니,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청춘과 목숨을 갉아먹은 전쟁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포로감시원 생활이 억울하기도 했고, 그를 따뜻하게 받아 주지 못한 고국이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로감시원 모집의 특성상 채용 공고에 응시해 합격했기 때문에 강제 동원된 위안부나 징용자와 달리 겉으로는 자발적 참전자로 보이기도 했고, 전범 용의자 딱지가 붙여진 탓에 세상에 드러내 놓고 항변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그저 한 때는 손바닥만큼이나 좁아 보이던 고향에서 생업에 만족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 209p



전쟁은 소수의 위정자들의 결정으로 일어나지만,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 수많은 무명의 개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내가 이 땅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수많은 무명들의 희생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포로감시원들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이 책이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잊혀서는 안 될 중요한 페이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에 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