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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힌 자리엔
홍우림(젤리빈) 지음 / 흐름출판 / 2022년 2월
평점 :

불안과 상처를 내내 움켜쥐고 있으면 어둠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판타지이나 과거의 과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삶을 매우 현실감 있게 그려낸 작품!
1900년대 초 경성. 점차 가혹해지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시대의 아픔과 의지가 한 데로 뒤섞인 격동의 시대. 안국정(안국동) 큰길을 따라 한 골목 들어가면 ‘오월중개소’라 불리는 올리브색 2층 양옥 건물이 있다. 주로 미술품과 골동품을 중개하는 상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는 ‘보통 사람들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최두겸이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이한 고민이 있거나 곤란을 겪을 때면 그를 찾아온다. 신이라 불리는 자들과 영물들, 억울함을 달랠 길이 없어 저승에도 가지 못하는 원혼들까지.
당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나요?
그렇다면 오월중개소를 찾아가보세요.
경성 외곽, 유독 화려해 보이는 어느 대저택에서 수상쩍은 모임 하나가 열린다. ‘저절로 움직이는’ ‘한밤중에 흐느끼는 소리’ ‘이유 없는 열병’…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란 게 보통 예사로운 게 아니다. 참가자가 기이한 사연이 얽힌 물건을 소개하면 사례금을 주고, 가장 흥미로운 사연을 지닌 물건을 가져온 이에겐 상금을 수여하는 행사로, 이른바 <괴기 물건 대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최한 이는 젊은 사업가 장영주다. 이 날 장영주의 소개에 따라 앞에 나선 김천호라는 청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범 잡아먹는 함이란 별칭이 지닌 오래된 함 하나를 선보인다. 그는 함에 얽힌 소름끼치는 전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금기사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함에 모신 신을 극진이 모실 것. 둘째, 신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신의 내력을 말하지 말 것. 하지만 금기를 무시한 탓일까, 청중들 앞에서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김천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얼굴을 시작으로 온몸에 멍이 찍히더니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엉거주춤 얼어붙었던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김천호는 피를 토하며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어 바닥에 쓰러진다.
장영주가 보낸 자동차를 타고 두겸이 장 씨 저택에 도착한 건 자정이었다. 두겸은 천천히 함이 들어 있는 응접실 안에서 김천호가 말한 ‘신’이 아니라 험한 죽음을 맞은 한 여자의 원혼을 마주한다. 함에 묶인 이 원혼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그대로 저주로 돌려준 게 분명했다. 심지어 원혼은 두겸에게도 살을 날리지만 이 원혼의 오랜 고통이 무엇인지, 왜 이 함에 묶이게 되었는지 사연을 들려주어야만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설득한다. 망설임 끝에 원혼은 두겸에게 개갈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개갈촌은 사냥꾼들의 마을로, 그곳의 부는 사냥에서 왔고 사냥은 하늘에서 내려준 붉은 눈썹을 가진 남자들만의 권리였다. 큰 짐승들이 사는 윗산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로지 눈썹 붉은 개갈촌 남자들뿐이었다. 외지인, 여자, 검은 눈썹의 남자들이 들어가면 산이 노하신다, 부정에 노한 산은 사냥꾼들을 잡아먹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것은 사냥이 유일한 부를 쌓는 수간인 마을에서 사냥을 소수끼리 독점하려는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금기였다. 하지만 부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사냥꾼들과 달리 늘 곤궁에 시달렸던 어정은 죽은 아버지가 가르쳐줬던 총 쏘는 법을 몰래 익혀 사냥을 시도하려 했다. 그리고 때를 봐서 사람들에게 누구나 사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사냥꾼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 귀한 사람이며 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하지만 이 계획을 눈치 챈 촌장이 일을 꾸몄고, 어정은 금기를 깨 신을 노하게 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발길질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두겸은 어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아린 듯 싸늘해진다. 개갈촌의 붉은 눈썹 사내들이 하는 짓이 꼭 조선의 양반 지배층들이 하는 행동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반들 외엔 인간 취급도 하지 않겠다는 그들만의 규칙을 만들어놓고, 양반이 아닌 사람들이 양반 될 기회까지 철저히 차단해 원하는 것마저도 죄악으로 만들어버린 시절이었으니까. 이 외에도 뿌리 깊은 악습과 부당함에 희생당한 자들의 회환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내로 태어났으나 반골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자로 키워진 고오가 그러했고, 몸이 아팠던 것인데 귀신에 들린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 우물에 내던져진 두겸의 동생도 그러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어부들의 념인 구앙을 물리치기 위해 대대로 자신의 몸을 바쳐야 했던 무녀도 마찬가지였다.
두겸은 고오의 손을 바라보았다. 거친 손이지만 젊다. 작게는 오 씨 가문의, 크게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뿌리 깊이 뒤틀린 가부장제에 오고오는 보란 듯이 커다란 한 방을 먹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통쾌한 것이었을까? 속 시원한 승리였을까? 아니, 그랬을 리 없다. 지금 오고오는 젊디젊은 모습으로 혼령이 되어 내 앞에 있지 않나. 원통함에 저승으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 38p
“바람(望)은 강력하단다.”
은자는 얼핏, 손님에게서 기쁨을 읽었다.
“원망 하나, 원망 둘, 원망 셋…. 바람이 모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 89p
도망친 정이 누님이 붙잡혀 왔을 때 사람들은 누님이 귀신 들린 꽃신 때문에 미쳐서 도망쳤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남편의 잦은 주먹질 때문이었다. 그가 걸핏하면 누님을 죽도록 두들겨 패는 걸 마을 사람들도 모르지 않았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왜 애꿎은 식칼이며 꽃신을 탓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고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했을 뿐인데, 그래서 소년은 마을의 눈엣가시 같은 아이였다. / 115p



소설을 읽다보면 ‘귀신’, ‘영물’을 소재로 한 흥미 위주의 기담집이 아닌, 개화기를 맞은 경성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과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삶을 매우 현실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원혼들이 품은 한은 한 개인의 사적인 염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악이라는 사실에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시작은 죄책감이었을망정 네 아이를 거두어 살린 온내가 있었고, 작은 짐승인 담비를 거두고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보살님들이 있었으며, 대철을 미워하면서도 그의 죽음에 대해 괴로워하던 은자와 소작제 개선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추진하던 조기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어둠이 걷힌 뒤에 다가올 빛을 볼 수 있는 법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지만 더 나은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 믿고 세상과 화해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해내왔어요. 정말 느리지만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들은… 아주 천천히 혐오와 차별, 그리고 폭력과 맞서 왔어요. 제가 사는 세상은, 제 아이들이 사는 세상과 다를 테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또 다를 겁니다.” 라던 두겸의 말을 믿고서.
비구니는 여러 해에 걸쳐 피폐해진 전국을 떠돌며 사람들을 구했다. 비구니가 살았던 당시엔 다려가귀라는 악귀가 많았다. 그것은 죽은 이가 하도 많아 피와 원념, 한숨이 깊이 서린 땅에서 솟아난 것들로, 원혼을 넘어서 사람을 해치는 악귀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땅 아래서 불쑥 나타나 사람들을 끌고 들어갔다. 다려가귀로 인해 사람들이 떠나간 지역들은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폐촌이 됨으로써 수탈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관리가 다려가귀보다 무서웠던 것이다. / 293p


불안과 상처를 내내 움켜쥐고 있으면 어둠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때로는 불가항력의 고통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릴 때도 있지만, 내 안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의지만은 나에게 있다. 카카오웹툰에서 누적 조회수 2천만 뷰를 기록한 동명 웹툰을 소설로 각색한 작품이라 해서 그냥 가볍게 읽기 좋은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연 하나하나에 담긴 메시지가 꽤나 묵직하게 다가왔다. 드라마 같은 제3의 작품으로도 만나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에 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