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벼랑 위의 집
TJ 클룬 지음, 송섬별 옮김 / 든 / 202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꿈꾸는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
외모, 인종, 종교, 혹은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을 끝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 소외당하고 있는 자들의 목소리!
귀하가 마르시아스섬에서 하게 될 과제는 중요합니다.
귀하의 보고서에는 고아원이 운영을 지속할지, 또는 영구 폐쇄될지를 결정할 때
필요한 정보들이 담기게 될 것입니다. 아서 파르나서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큰 책임을 맡게 되었지만, 그 신뢰가 여전히 유효한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과 귀를 활짝 열도록 하십시오, 베이커 씨.
한순간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귀하가 보여주었던 혹독할 만큼의 솔직함을 기대합니다. - 찰스 위너 / 77p
마법아동관리부서(DICOMY) 소속 연구원인 라이너스 베이커는 마법아동 고아원으로 파견을 나가 해당 시설이 안전한지 조사하고 보고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최고위 경영진으로부터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가족이나 친구, 애인은커녕 존재감이라고는 제로지만 업무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판단에 능한 그를 눈여겨 본 최고위 경영진들은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기밀 업무를 맡긴다. 이제껏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극도로 특이한 유형의 여섯 아이들이 모여 있는 마르시아스섬의 고아원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마르시아스섬에 도착한 라이너스는 그간 비밀에 부쳐져 있던 섬 아이들의 신상 정보가 담긴 파일을 열어보자마자 기절하고 만다. 이름은 루시퍼(애칭: 루시), 나이는 6살 6개월 6일, 어머니는 미상, 아버지는 악마, 종족 분류는 적그리스도. 이른바 악마의 아들로 종말을 불러오는 자의 피를 가진 이 어마어마한 존재로 인해 충격에 빠진다. 여기에 여자아이지만 턱수염이 나 있고 꽃의 말소리를 드는 여자 노움인 ‘탈리아’, 먼 옛날 지구를 헤매던 고대 파충류의 후손이자 멸종 위기 종족인 ‘시어도어’, 꽃과 나무를 피워내는 숲의 정령 ‘피’, 덩치는 크지만 낯선 이와 큰 소리를 경계하는 셰이프시프터 ‘샐’, 종족 미상에 눈은 하나이고 두 개의 더듬이가 솟아 오른 초록색 덩어리 ‘천시’까지. 여섯 아이들은 이제껏 수많은 마법아동들을 만난 라이너스조차도 적응하기 어려운, 일반 사람들에게는 위험스러운 존재다. 여기에 아이들을 돌보는 섬의 정령인 채플화이트(조이)와 원장 아서 파르나서스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닌 게 분명하다.


“나는 그저 한 장의 종이. 얇고 찢어지기 쉬워. 해를 향해 들어 올리면 빛이 나를 통과해. 내게는 글자가 씌어지고, 그러면 다시는 쓸 수 없지. 이 자국들은 역사야. 또 이야기야.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사람들은 글자만 보고 글자가 쓰인 종이는 보지 않아. 나는 그저 한 장의 종이, 나 같은 이들이 많지만 똑같은 건 하나도 없어.” / 199p
평소 수줍음이 많고 말이 없는 샐이 직접 쓴 글을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다. ‘나는 그저 한 장의 종이. 얇고 찢어지기 쉬워.’로 시작하는 샐의 글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지만 ‘비도덕적’이며 ‘혐오’스러운 존재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샐은 학대당하고 방치당하며 자신이 가진 능력 때문에 여러 시설을 전전해야 했다. 누군가는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피는 종족이 아무런 지원 없이 분리되는 바람에 어머니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사를 하는 비극을 마주해야 했다.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지만 외모 때문에 평생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여야 했던 천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장인 아서와 섬의 정령인 조이로 하여금 아픔과 편견을 극복하고 함께 성장함으로써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는 법을 배운다. 고아원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존폐 여부를 결정짓는 ‘눈’이 되어야 했던 라이너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 역시 그 안에 점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당연히 그렇지. 그래도 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거든. 그게 꼭 그 재능을 가진 사람의 잘못인 건 아니란다.” / 10p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존재를 두려워 해. 두려움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혐오로 바뀌고, 사람들은 섬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두려워서, 그 애들을 혐오하는 거야.” / 94p
“당신도 해야 할 일이 있겠지. 그 일이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을 테고,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 애들한테 기회를 주라는 게 다야. 그 애들은 파일 안에 담긴 것 그 이상의 존재거든.” / 97p
“우리가 우리인 건,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저 흑백으로 나눌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DICOMY로 돌아가 최고위 경영자들을 마주한 라이너스는 마법이 있든 없든,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아이들을 4등급 위험 요소로 분류하고 격리하여 사람들에게 편견을 심어 놓은 조직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작가 TJ 클룬은 이처럼 라이너스의 목소리를 통해 단순히 소설 속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외모, 인종, 종교, 혹은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을 끝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 소외당하고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한편으로는 진짜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직시하게 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DICOMY의 승인을 받은 고아원이라면 어디에나 걸려 있는, ‘관리자의 지시를 따르면 행복해져요’ ‘조용한 어린이가 건강한 어린이입니다’ ‘무언가를 보면 말해야 한다’와 같은 포스터 따위는 우리 사회가 제도라는 틀 안에서 얼마나 많은 자유와 자아를 통제하려 드는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넓은 범위에서 사회 곳곳에 장치된 편견과 혐오의 요소들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판타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여기,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감각에 보다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괜찮아.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두려워할 수 있거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너머를 못 보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면 돼.” / 156p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베이커 씨. 세상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영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죠. 그리고 그 수수께끼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눈앞에 있는 것들을 놓치고 말아요.” / 171p
“어떤 사람은 부당한 행동을 한단다. 하지만 네가 지금처럼 공정하고도 친절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나중엔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게 될 거야. 혐오는 목소리가 크지. 하지만 그건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고래고래 외쳐대기 때문이라는 걸 너도 알게 될 거야. 그 사람들의 마음을 영영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만 않는다면 이겨낼 수 있어.” / 416p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나 결말은 비록 우리가 상상하는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곳곳에서 빛나는 사랑스러운 문장과 마음을 단단하게 일으키는 이야기의 힘은 우리를 위대한 여정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쩌면 『벼랑 위의 집』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가 아닐까. 존재감이라고는 없던 라이너스가 “변화란 소수의 목소리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저는 그 소수가 될 겁니다” 하고 당당하게 외치는 저 장면 속에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성장의 기쁨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다운 곳에 살고 있나요? 이 질문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진정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으리란 이 책의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에 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