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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레모사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평점 :

김초엽이 김초엽했다!
재난을 사이에 둔 힘겨루기, 재난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유독성 화학물질들. 그 물질들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형성하고, 비를 내리며, 렘차카 특별 구역과 인근 도시들과 농작지와 식수원을 광범위하게 초토화해버렸다. 당국이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결정한 건 수돗물을 받아 마셨다가 이름 모를 질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이후였다. / 51p
렘차카. 서쪽으로는 거대한 산맥을 등지고, 동쪽으로는 우회하여 진입해야 할 만큼 고립된 이곳은 한때 군사 특별 구역이었다. 전쟁 중에 가까운 도시 델프스가 폭격 당했을 때도 이곳은 아무런 대피령도 경고도 없었을 정도로 철저히 은폐된 곳이었다. 하지만 2003년,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면서 렘차카에 건설되어 있던 공장과 연구소에서 유독성 화학물질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농작지는 물론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이름 모를 질병에 걸리면서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그렇게 렘차카 구역 일대는 인간이 밟을 수 없는 죽음의 땅이자, 유령 도시로 전락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흐르자, 기이하게도 이 죽음의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치명적인 후유증을 앓고 신체가 좀비처럼 끔찍하게 변이되었다던 귀환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귀환자들의 마을인 므레모사는 국제 구호기관과 원조 단체들의 지원 외에는 세간의 모든 관심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철저히 모습을 감추어왔다. ‘우리는 여기서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겠다. 방해하지 말라.’ 그런데 그간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해온 바로 그 므레모사가 갑자기 외지인들의 방문을 받아들이기 위해 투어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유안이 므레모사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귀환자들의 도시, 므레모사
소설은 한때 무용수였던 유안이 오랫동안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죽음의 땅 므레모사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유안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므레모사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다섯 명의 일행은 이 유령 같은 도시에 서린 비극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므레모사가 여전히 오염된 땅일 것이라는, 이곳의 주민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첫날부터 어긋난다. 지금까지 지나온 협곡의 모든 장소들이 날카로운 가시철망으로 둘러싸인 것과 달리 므레모사는 아늑해 보이는 돌담과 달콤한 향기가 감도는, 적어도 여행자들이 상상해온 절망의 땅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모습이 정말 므레모사의 진실일까.
숲의 안쪽에서 발견된 귀환자들의 시체, 광장 한편에 모인 대여섯 명의 귀환자들이 하고 있는 기이한 행동, 어제까지만 해도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없다고 주장하던 투어객들이 한껏 들뜬 분위기로 갑자기 이곳에 좀 더 오래 머무르길 희망하는 모습들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유안은 므레모사 주변으로 흐르는 기묘한 공포가 점점 자신을 조여 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투어에 참가한 일행 중 한 명이자 의문의 인물, 레오와 함께 이제껏 철저히 비밀에 감춰져 있던 므레모사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나의 실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증명이 필요했는데, 이후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알게 됐지. 인류의 역사는 끔찍한 실패로 점철되어 있고, 나의 비극은 비극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걸. 므레모사가 처음으로 외부에 개방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게 내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일 중 하나가 될 거라고 확신했네. 너무 많은 사람이 다녀가면 비극은 희석되어버리는데, 나는 그 ‘다듬어진 비극’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것의 비극을 마주하게 된, 무척 운이 좋은 동지들이군.” / 25p
“아무도 그게 함정인 줄 모를 거예요. 그리고 함정에 빠졌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요. 자발적으로 구멍에 들어가거나 혹은 이 함정이 보물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떠벌려댈 겁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부품이 될 거예요. 이 함정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게 이 덫의 구조예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 81p


이처럼 『므레모사』는 전쟁 중 생화학 무기를 연구하다 유출 사고로 황폐해진 도시 ‘므레모사’를 중심으로 ‘재난 이후의 비극’을 재현한다. 소설의 특이점은 “끔찍한 비극 이후에도, 기이하게도 이 죽음의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재난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귀환자들이 신체 이상 증세를 겪으며 좀비가 되었다는 실체 없는 소문을 흩뿌린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으로 상징되는, 전쟁과 재난 그리고 참사 등으로 인한 비극의 장소를 찾는 이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자 다듬어지지 않은 낯선 비극을 목격할 수 있는 환상지로 작동될 뿐이다. 소설 속 일행들이 므레모사를 찾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재난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그 끔찍한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을 떠나지 않으려 하거나, 다시금 재난의 현장으로 돌아오려는 ‘귀환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바로 재난이 일어난 곳에서만이 내가 겪은 재난의 트라우마를 온전히 수용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게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소설은 재난의 내부에 존재했던 자들이자 자신들의 고통을 뿌리삼아 새롭게 재건한 공간을 지키려는 자들과, 재난을 신화화하거나 선의를 가장하여 자신들의 삶을 위안 받으려는 외부자들의 힘겨루기를 공포화하여 새로운 비극의 역사를 구현해낸 작품이다.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다리가 중얼거린다. 그것은 때로는 주먹만 한 크기로,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로 나의 신체에 덧붙여진다. 원래 나에게 존재하는 신체처럼,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발끝을 접었다가 펴고, 발목을 움직이고, 발바닥을 아치 형태로 만든다. 그 감각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림자 다리가 나에게 말한다.
그것 봐. 이제 나를 잘 봐.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 / 14p
“사실은 알 것 같아요. 언니는 므레모사의 귀환자들을 만나러 온 거죠? 죽음의 땅에서도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희망을 가지고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정말로 좀비처럼 변했어도 뭐 어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분명 우리가 귀환자들에게 배울 게 있을 거예요. 반대로 언니가 그 사람들에게 영감이 될지도 모르고요.” / 70p


우리는 그들에게 기대한다. 죽음의 땅에서도 다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겠느냐고 위로하고, 강조한다. 다리를 절단한 뒤 환지증을 겪는 주인공 유안은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더는 아름답지도 강인하지도 않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우리가 기대하는 ‘극복의 서사’가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왜 나를 당신들이 원하는 극복의 역사로 삼으려 하는가. 이겨내지 못하면 나는 실패자가 되는 것인가. 재난 이후의 재난, 재난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