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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김초엽, is 뭔들”은 아무래도 계속 될 것 같다!
나의 우주와 당신의 우주가 교차하는 순간에 발화하는 그 모든 에너지를 민감하게 품어보는 것. 그건 아주 중요한 거야!
하늘을 나는 자동차,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컴퓨터, 우주 정거장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고속 레일… 초등학생 시절, 이따금 상상하곤 했던 미래의 모습 속에는 분명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도 있었다. 피부색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심지어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외형을 가진 그들이지만 그림 속에서 나는 그들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다. 거기엔 우리가 철저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종이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 이 넓고 넓은 우주에 우리만 존재하고 있었던 건 아닌 거야. 이 단 하나의 믿음 앞에서 나는 우리의 우주가 보다 넓어지는 상상을 했다. 아마도 김초엽이 보여준 세계 역시 이런 그림을 상상했던 게 아닐까. ‘안녕, 하고 여기서 손을 흔들 때 저쪽에서 안녕, 인사가 되돌아오는 몇 안 되는 순간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되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살아가게 하는 교차점들. 그 짧은 접촉의 순간들을 그려내는 일이, 나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완전히 하나로 포개어질 수는 없어도 나의 우주와 당신의 우주가 교차하는 순간에 발화하는 그 모든 에너지를 민감하게 품어보는 것. 그러함으로써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힘을 믿었던 게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저마다의 우주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
인류의 이기로 인해 초래된 지구 위기, 낯설지 않은 미래의 현실을 생생하게 구현해낸 소설 『지구 끝의 온실』 이후에 만난 김초엽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아주 작아 보이는 것들이 일으키는 파동을, 여린 온기가 불어넣은 생명의 힘을 희망으로 엮어낸 전작의 전율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서 만난 작품이라 더 특별하고 반갑다. 『방금 떠나온 세계』에는 <최후의 라이오니>를 비롯해 총 일곱 편의 단편작이 수록되어 있다. 전작이 지구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극복의 희망 연대기를 그려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우주 밖으로까지 외연을 확장시켜 거대하고 초월된 시공간적 세계관을 완성해나간다. 다른 시대, 다른 환경, 다른 신체 능력을 지닌 이들, 다시 말해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이 빚어내는 마찰음에 촉각을 드리우면서도, 그 안에서 서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서로로 하여금 각자의 세계를 보다 넓혀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한 편 한 편에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유능한 유품정리사이자 멸망의 단서를 탐색하는 1급 수사관 ‘로몬’(<최후의 라이오니>),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모그’(<마리의 춤>), 신체를 변형하고 개조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인 ‘트랜스휴먼’(<로라>), 음성 언어를 이용하지 않고 호흡 즉,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입자를 통해 의미를 인식하는 ‘숨그림자 사람들’(<숨그림자>), 거대한 격자 구조의 인지 공간에 자신의 기억과 정보를 저장하고 공동 지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인지 공간>), 불의의 사고로 인해 다른 이들과는 다른 아주 느린 시간대를 살아가는 언니(<캐빈 방정식>) 등이 그러하다.
그날 사건 현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모그들이 언제부터 그 일을 기획했는지. 마리는 어떻게 그 일의 주축이 되었는지. 사람들은 사라진 마리가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지, 다음 테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제2의 마리’ ‘제3의 마리’가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아니, 우려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가 돌아오기를, 또 다른 마리가 등장하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기대하는 듯하다. / <마리의 춤> 중에서 59p
인간은 고유의 신체 지도를 가진다. 팔과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때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고유수용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긋난 고유수용 감각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잘못된 지도’를 가진다. / <로라> 중에서 106p
조안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단희는 이제 조안의 음성 언어 일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희를 제외한 사람들은 대개 조안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발성기관이 퇴화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진동일 뿐이었다. 반대로 조안이 입자 언어를 배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조안은 외형이 유사할 뿐, 후각 수용체와 언어 회로는 숨그림자 사람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다른 종이나 마찬가지였다. / <숨그림자> 중에서 170p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 <숨그림자> 중에서 182p
그들은 우리가 흔히 정상인이라고 간주하는 일반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모그들은 자신들이 ‘결핍’된 존재들이 아니라 ‘변화’이자 ‘진보’일 수 있음을 피력하며 정상인들에게 테러를 일으키고(<마리의 춤>), 진의 만류에도 로라는 기존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고 더 나은 신체 기능을 얻기 위해 세 번째 팔을 갖는다(<로라>). 이브는 집단 지성의 힘을 믿는 공동체 사람들의 공간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인지 공간>), 뇌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회로에 문제가 생긴 언니는 자신의 감각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적극적인 치료에 매달리기를 요구하는 동생으로부터 떠나기도 한다(<캐빈 방정식>).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치부되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그들을 껴안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돌아오겠다는 인간 라이오니의 약속을 기다리며 멸망이 지연시키고 있던 기계 문명의 리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인 척하며 떠나지 않는 ‘나’가 있고(<최후의 라이오니)>, 몸 정체성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쫓으며 그들과의 이해를 시도하는 진이 있다(<로라>). 또 과거로부터 온 조안이 숨그림자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돕는 단희가 있으며(<숨그림자>), 언니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나 관람차에 올라타 보기도 하는 동생이 있다(<캐빈 방정식>).
이렇듯 각각의 소설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일으키는 갈등과 간극 속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인지 끊임없이 가능성을 모색하며 더 위대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 <인지공간>에서 ‘저 밤하늘에는 별이 너무 많아서 우리의 인지 공간은 저 별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저 별들을 나누어 담는다면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침내 이 행성 바깥의 우주를 온전히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곳을 향해 갈 수도 있을 것’이라던 문장처럼, 각자의 소우주를 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더 큰 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라이오니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이오니는 우리의 두려움에 공감하는 유일한 복제였죠. 기계들에게도 소멸의 공포가 있다는 것을, 다른 복제들은 이해하지 못했지요. 라이오니는 남아서 기계들을 터널 밖으로 안전하게 데려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어요. 불멸인들의 기술 라이브러리에 복제의 권한으로 접근해 보호 설계 방법을 찾겠다고 했지요.” / <최후의 라이오니> 중에서 43p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 <숨그림자> 중에서 188p
먼 우주에서 온 탐사선이 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 오브들은 탐사선에서 내린 작은 생물들을 면밀히 관찰했어요. 그리고 오브들은 곧 알아차렸습니다. 이 개체들은 다른 환경에 취약하고 지극히 생태 의존적인 생물이며, 심지어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두 자아를 가지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요. 오브들에게 우리는 불청객이었지요. 그들은 우리가 단지 죽어가도록, 절망하도록,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연민할 줄 아는 존재였으니까요. / <오래된 협약> 중에서 222p



이제 김초엽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확실히 한국 문단 내에서 김초엽은 점점 확고부동한 자신의 위치를 찾아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창작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는 젊은 작가가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