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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불끈거리는 맥박, 마음에 일렁이는 감정의 파문이 무시로 요동치던 십대 그 어느 시절!
솔직하고 치열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혹은 사랑하기를 바랐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
두 개의 점을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너와 나로 이루어진, 오직 두 점만을 견고하게 잇는 우리만의 세계. 존재만으로도 삶을 살아갈 이유가 충분해지는, 그 어떤 거창한 가치마저도 소환할 수 있는 너와 나라는 위대한 세계.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1차원의 세계 속에서만 머무르고 싶은 혹은 머물렀던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두 개의 선이 우연히 한 점에서 만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고야만다. 진심이라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떤 형체가 실은 매우 얄팍하고 연약한 것이었음을 꼭 상처투성이가 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불끈거리는 맥박, 마음에 일렁이는 감정의 파문이 무시로 요동치던 십대 그 어느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의 초상은 왜 꼭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세계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끝내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건 어쩌면 인생이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어느 찬란한 봄 햇살과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 우리 1차원의 세계에 머무르자.”
네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너와 나라는 점, 그 두 개의 점을 견고하게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말이야.”
지금도 방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면 너를 생각해. 숨막히게 나를 짓누르던 너의 질량과 그 무게가 주던 위안을 기억해. / 130p
박상영 작가의 신작 『1차원이 되고 싶어』는 2000년대 초반, 제2의 강남이라 불리는 D시를 배경으로 십대들의 사랑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우울한 민낯을 담은 소설이다. 수성구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널따란 팔 차선 도로를 기점으로 학군이며 집값이며 동네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건너편 아파트로 위장전입 해야 했던 주인공 ‘나’를 중심으로, 학업이라는 치열한 생존의 무게를 견뎌내며 어그러진 분노와 불안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청소년들의 감정을 세밀한 필치로 담아낸 작품이다.


‘ 나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이 벌어지던 2002년의 여름날, 텅 빈 독서실에 혼자 앉아 있던 ‘나’는 전 우주가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기원하는 이 순간에 한가롭게 〈중경삼림〉을 보는 윤도에게 마음이 기운다. 다른 애들은 모두 삼삼오소 모여서 축구를 하는데 홀로 벤치에 앉아 <해리 포터>를 읽던 ‘나’를 기억하고 있던 윤도는 그를 ‘해리’라고 부른다. 윤도와 해리. 그의 이름과 그가 붙여준 별칭을 나란히 놓으며 ‘나’는 제발 누군가 나를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구원해줬으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게 손을 내밀어줬으면 했던 나날들을 어쩐지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위안을 얻는다.
나는 그런 윤도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감동 같은 것을 받아버렸다. 나도 윤도처럼 못하면 못하는 대로, 별로면 별로인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별거 아닌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고, 아니, 귀엽다못해 안타까웠고, 안타깝다못해 동경하게 되었다. 부리처럼 가는 윤도의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입김이 내 얼굴에 닿았다. 붓 안에 어느덧 윤도의 숨결이 가득찼다. / 103p
절반만 진실이었다. 밤마다 홀로 청승을 떨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 그것만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나의 부모와 나의 집, 나의 성향과 취향, 나의 말 못할 비밀과 우울, 내가 혼자임을 버티는 방식, 그러니까 나 자신의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나 자신을 감추려 해왔던 것이고. 그렇게 나의 비밀 중 하나를 맥없이 들켜버렸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은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 106p
그렇게 같은 영화와 음악, 만화를 읽는 취향을 공유하며 두 사람은 가까워지지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감정에는 일종의 검열과 조롱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나’는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발설하지 못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기대는 가난 속에서 더 위력을 발휘했고, ‘정상’이라는 범주 내에 속하지 않으면 우정조차 허락되지 않는 학교생활 속에서 ‘나’는 이 관계가 파괴될까 두려워진다. 심지어 애정이란 감정은 그 무엇보다도 폭력적이고 직설적인 감정으로 돌변하기 마련이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보다 끝끝내 부정하기를 택한 윤도에 의해 철저히 내쳐지고 만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을 수 없게 된 ‘나’는 도리어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태리를 수성못으로 밀쳐버린다. 그날 검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받아들여지지 못한, 돌려받지 못한 그 모든 마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래전 내 손으로 검은 물에 밀어넣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때 내 팔에 담겼던 적의와 분노에 대해서. 누군가를 밀치고 짓밟고 간신히 도망쳐온 이곳에서도 나는 고작 이렇게 살고 있구나. 그 시절의 내가 너무나도 간절히 바랐던 삶이 이렇다는 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도착한 곳이 여기라는 사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나의 감정은 알지 못한 채 무심히 흘러만 가는 검은 물. / 397p
한 학년에 열 명 남짓의 아이들이 있어. 순수하고 맑아. 그런데 그 맑고 순수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개미를 밟아 죽이고 고양이에게 돌을 던지기도 해. 그 작은 집단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따돌리고, 진심을 다해 증오하기도 한다는 걸 매일 배우고 있다. 그럴 때면 네 생각이 나. 어쩌면 일종의 놀이이자 화풀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누구보다도 이기적이었던 건 네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하게 됐어. / 390p



대학 진학이라는 치열한 생존의 무게와 불안한 미래, 그 속에서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던 단 하나의 사랑을 갈망했던 ‘나’의 모습은 우리가 지나온 청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는 십대 퀴어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솔직하고 치열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혹은 사랑하기를 바랐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역시 누군가에 있어 윤도가, 무늬가, 태리가, 희영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이 차마 들여다보거나 끝내 솔직해질 수 없었던 치기어린 과거의 나와 화해를 시도하거나 여전히 어른거리고 있을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