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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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한 나르시스트의 끔찍하고 추악한 범죄 행위 뒤에 어른거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쉽게 자행한 가스라이팅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기묘한 현상 하나가 있다.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에 조작을 가해 자신을 불신하고 가해자에 의존케하여 심리적 학대를 가하는 행위, 바로 가스라이팅 (Gas-lighting)이다. 주로 연인이나 자녀, 부부, 직장에서와 같이 아주 가깝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애착의 형태를 띤 채로 나타나거나 비대칭적 권력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이뤄지게 된다. 대체로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가해자들은 나르시시즘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며, 이들은 널 위해서’, ‘내가 널 잘 아는데’ ‘널 사랑해서와 같이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가스라이팅을 진행하기 때문에 피해자 대부분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단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완전한 단절이 어려운 부모-자녀의 관계 속에서는 지속적인 피해가 더욱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정유정의 소설 완전한 행복은 바로 이러한 가스라이팅, 심리 조작으로 인한 지배가 타인의 삶을 휘두르는 순간 발생되는 악에 주목한 이야기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며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나르시스트 신유나를 중심으로 소설은 주변 사람들이 그녀로부터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부모-자녀’, 유나-지유의 관계 속에서 이는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유는 평소 엄마인 유나의 사소한 눈빛과 말투, 행동이 보내는 신호에 유독 기민하게 반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유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엄마와 함께 지낼 때면 반드시 그녀가 제시한 규칙에 따르도록 주입 당해왔다. 그래야만 고아의 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유나는 지유가 자신의 규칙에 따르지 않을 시 친정에 지유를 맡긴 채 일주일, 더 화가 났을 땐 한 달 이상 데리러 오거나 전화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유는 엄마가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귀한 순간을 사랑한다. 그러한 순간이 있기에 엄마의 통제조차도 사랑이라 믿는 것이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니?”

엄마가 물었다. 지유는 움찔해서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고갯짓하지 말라고 했지?”

엄마의 목소리는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높고 가느다랗다.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다. 소리가 불안하게 떨리면서 끝이 올라갈 땐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신호니까. 바로 지금처럼. / 18p

 

 

안 돼.”

엄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안 돼로 바꾼 적도 없었다. 그러니 1층으로 내려가서 자는 엄마를 깨운 다음 인형을 가지고 놀아도 좋은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쭐나는 건 하루 한 번이면 충분했으므로. / 29p

 

 

 




 

 

 

 

  가스라이팅이 한 사람의 일생에 미치는 영향은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재인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재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언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동생 유나의 거친 폭력에 당하고만 살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돌이켜보며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당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적어도 아버지에게 유나와 똑같은 아이로 취급받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어른스러우며, 지혜로운 맏딸이어야만 아버지의 착한 딸로 남을 수 있다는 강박은 아버지가 믿는 딸이 될 때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기게 만들었다. 덕택에 상처와 공포는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 남았고, 그녀는 망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이따금 삶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아무 때나 기억이 튀어나와 그녀를 옥죄곤 했다. 그 결과, 자신의 동생인 유나로 벌어지는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그녀는 많은 것들을 스스로 습득하고 깨우쳤다. 어머니 눈에 띄지 않고 소리 없이 움직이는 법, 눈치껏 처신하는 기술, 하고픈 말을 참는 힘, 무안을 당해도 울지 않는 요령, 어머니의 표정에서 기분을 읽어내는 독심술, 착하게 굴어야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방식까지. / 154p

 

 

질문이 잘못됐다는 걸 지적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 자신을 제 모든 것을 앗아간 도둑년으로 취급하는 유나에 대한 분노. 자신으로 인해 유나가 할머니네에서 살았다는 죄책감. 최종 승자는 죄책감이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참는 쪽이 된 이유 중 하나다.

이 권력 구도는 양친에게도 확대적용 됐다. 유나는 2년씩이나 버림받았다는 점을 밑천 삼아 양친을 제 뜻대로 휘둘렀다. 어머니는 맹목적으로 유나의 편에 섰다. 죄책감을 더는 방법 중 가장 즉각적이고 가장 차감액이 컸을 것이다. 무엇보다 쉬웠을 것이다. 유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이용해 아버지를 조종한 걸 보면. / 191p

 

 

 

  가스라이팅은 부부관계인 유나와 은호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러시아에서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유나에게 단숨에 빠져버린 은호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두 번의 이혼은 불가하다는 생각에 유나의 일방적인 계획에 쉽사리 저항하지 못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발적 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유나가 툭 하면 딸인 지유를 데리고 친정에 가버려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노아를 서둘러 데려오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머니의 집에서 노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로 한 날, 노아가 질식사로 인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은호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이제껏 수면 아래에 잠재워두기만 했던 질문들을 꺼내 올리기 시작한다. 이른바 아내가 지적한 자신의 고약한 잠버릇이 아들 노아를 죽이게 할 만큼 치명적이었던가 하는 물음, 아내는 그간 정말로 친정을 간 게 맞는 것인가 하는 물음, 공교롭게도 아내의 주변 남자들에게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에 아내가 연루된 것은 아닌가에 대한 물음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제껏 그녀가 바랐던 완전한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섬뜩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동의할 수 없는 개념이었으나,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 112p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신호등이 몇 번이나 바뀌도록, 그는 눈만 껌벅이며 서 있었다. 아내의 대학 시절 남자와 유학 시절 남자와 아버지와 전남편, 그리고 노아. 행복은 가족의 무결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 아내의 신념. 머릿속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가 착,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서민영과 진우의 말을 조합해봤을 때, 남자 넷은 어떤 이유로든 아내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이었다. 변심, 해고, 이혼, 그 어떤 이유로든 간에. 노아는 다른 여자를 모태로 한다는 점에서 무결하지 않았다. 삶의 저류에 지속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아니면 존재 자체를 용서할 수 없었거나. / 390p

 

 

 



 

 

 

 

  『7년의 밤이 보여준 압도적인 서사와 강렬한 서스펜스, 28이 보여준 사회적 공포, 종의 기원에서 보여준 섬세한 심리묘사와 이 작동되는 방식을 치밀하게 엮어가는 구성까지, 이 모든 것들을 한 데로 정교하게 엮은 듯한 완전한 행복은 작가 정유정이 지닌 이야기꾼으로서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7년의 밤의 세령호가 그러했듯, 반달늪이라는 공간을 통해 독자들을 고립시키고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특유의 스타일은 확실히 더 능수능란해진 느낌이다. 무엇보다 한 나르시스트의 끔찍하고 추악한 범죄 행위 뒤에 어른거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쉽게 자행한 가스라이팅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하다. 나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가 아이에게 던지는 눈빛과 말에 담긴 어떠한 신호가 아이를 움직이게 하고 아이의 의지를 꺾게 했다면 이 역시 가스라이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운 적이 있었던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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