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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통조림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절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읽지 마세요, 미리 경고합니다!
웃기다가도 짠하고 유쾌하다가도 서글픈 우리 모두의 이야기!
『복숭아 통조림』은 일본에서 일명 국민 애니메이션으로 통하는 「마루코는 아홉 살」의 작가 사쿠라 모모코의 에세이다. 학교, 가족, 직장 등 소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의 이야기들이지만, 유쾌하고 엉뚱하며 때로는 짠내가 풀풀 풍기는 에피소드들이 마치 한 편의 시트콤처럼 펼쳐진다. 때문에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절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읽어서는 안 된다고. 방심하다가 푹, 하고 터지고 마는 나의 웃음에 번번이 민망해지고 말테니까.
무좀이란 아저씨들의 지병으로 한번 걸리면 축축해진 발에서 심한 악취가 나며, 그 사람이 신은 신발과 양말은 가족 사이에 오물로 취급되는 무서운 병이다. / ‘기적의 무좀 치료’ 중에서 10p
첫 에피소드는 ‘내 나이 열여섯 살의 여름, 어쩌자고 그런 엄청난 병에 걸리고 말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은 물집 같아서 ‘어, 벌레한테 물렸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동안에 발등의 피부를 양분 삼아 쑥쑥 자라고 있던 바로 그것은, 무좀균이다.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무좀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소문은 온 가족에게 퍼져 “오, 무좀녀, 큰일 났네”하고 놀림을 당한다. 심지어 아빠는 축축한 자기 발보다 더욱더 혐오스러운 발이 등장한 사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더 짜증나는 건 냉혹하기 짝이 없는 나치 사령관 같은 얼굴로 화장실 슬리퍼 신지 마라, 방에 맨발로 다니지 마라 등등 10초 만에 규칙을 몇 개나 만들어버리는 언니다. 졸지에 무좀녀가 되어버린 ‘나’는 다음 날부터 하루의 70퍼센트 이상의 시간을 무좀 연구에 투자한다.
첫 에피소드는 이렇게 열여섯의 소녀에게는 다소 치명적인 질병, 무좀을 없애기 위한 고군분투기를 다루고 있다. 표백제를 넣은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갔는데 효과가 있었다더라는 말에 실험해보고, 발 각질 제거용 경석으로 피가 보일락 말락 할 때까지 환부를 문지른 다음 시판 무좀약을 섞어서 발라도 보고, 책상 스탠드의 100와트 백열등을 환부에 바싹 대고 극한의 열기와 싸우기도 하면서 온갖 황당한 치료법을 시도해본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언니도 무좀균을 옮게 되었으니, 마음속으로 언니의 무좀이 낫지 않기를 빌어도 본다. 뭐, 너도 당해봐라 이런 심리가 아닐까.


무좀에 관한 에피소드 외에도 황당무계한 일들은 계속 펼쳐진다. 누구나 그렇듯 ‘이런 물건 괜히 샀어’라고 후회하는 물건이 꼭 있기 마련이다. 새벽 무렵에 타이머를 해두고 렘수면이 시작되면 베개가 영어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여 잠을 자면서도 영어 단어를 암기할 수 있다는 ‘수면학습 베개’를 구입한 게 문제였다. 그녀는 엄마에게선 “자면서 암기가 된다면 너는 매일 수업 시간에 졸고 있으니 시험 치면 만점 받겠네.”하고 욕을 먹고, 언니에게선 새벽에 울려 퍼지는 베개의 속삭임에 잠을 자지 못했다며 민폐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래서야 가족들로부터 ‘거 봐, 노력하지 않고 암기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바보야’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베개의 체면을 위해, 오직 베개의 힘만을 이용해 암기한 척 하기 위해 가족 몰래 단어를 백 번씩 쓰며 외웠다는 후문이 있다나 뭐라나. 고백하자면 나도 그녀처럼 물건을 사놓고 ‘쓸 데 없이 데 돈을 썼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열심히 사용하는 척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씁쓸하게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남자 팬티를 널어놓으면 변태가 접근하지 않을 거야”라는 결론에 이르러,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빠 팬티를 보내줬다. 아빠의 엉덩이에 깔려 방귀를 참고 견딘 이 팬티가 여차할 때 나를 지켜줄 거라는 생각에, 난 내 생명의 무게가 100그램 정도밖에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 ‘공포와의 직면’ 중에서 75p
책에는 밑도 끝도 없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어느 날 “지금 엄청난 똥을 쌌는데 얘기 좀 들어줘”하고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의 내용이란 게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오고, 그것도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더니 그 높이가 50센티미터가 되었다는 이야기, 3년 전에 친구가 군고구마 주스라는 캔 주스를 샀는데 심지어 탄산이 들어간 것도 있더라는 이야기(영양가도 없고 맛도 없을 것 같은데 대체 누구보고 마시라고 개발하는 건지 개발 회사에 물어보고 싶어지는 이야기), 야오야마의 카페에서 남자친구와 이별이라도 할 듯한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옆테이블의 샐러리맨이 소변을 보러 다녀왔다가 “제 팬티의 얼룩 말인데요. 연한 노란색이었지 뭡니까”하며 싹싹하게 말하는 소리에 이별이고 뭐고 헤어지지 않고 결혼까지 했다는 이야기까지.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들의 연속이긴 한데 그러면서 남긴 그녀의 마지막 글귀가 뜻밖에도 마음을 붙든다. “한창 그 상황에 있을 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도 인생을 통해서 보면 뭔가의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것이라고 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만큼 공부가 되는 것도 없다.” 그래, 세상엔 ‘이유 없는 이유’는 없는 법이지.
그러나 그 친구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녀의 대장 안에서 50센티미터나 되는 변이 보관돼 있었다는 게 경이롭다. 과연 사람의 몸은 얼마만큼의 똥을 수납할 수 있을까. 또 사람은 일생 중 얼마만큼의 똥을 배설할까.
그녀가 던진 50센티미터의 파문은 내게 줄줄이 의문을 불러일으켜서 한가할 때에는 그것만 생각할 정도로 마음속에 큰 존재가 돼 남아 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 중에서 135p
캔에는 군고구마 그림이 그려져 있고, 탄산이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것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친구는 둘 다 사서 먼저 탄산이 없는 쪽부터 마셨다.
그건 그야말로 군고구마 맛으로, 그 맛이 액체가 돼서 목구멍을 따라 흐르다 위장에 안착했단다. 천천히 마시면 군고구마의 탄 맛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액체 군고구마를 마신 느낌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마신 사람밖에 모르는 참맛이라는 게 있는 걸까. /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 중에서 139p


시답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도 삐딱한 세상에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일화들도 있기에 이 책은 마냥 가볍지 않다. 한심한 기사들로 점철된 주간지들, 모호한 근거에 제멋대로 창작된 기사에 마음이 상한 적이 있었던 그녀는 이렇게 촌철살인 같은 경고를 남긴다. “모호한 근거로 억지로 창작한 기사는 방귀와 닮았다. 실체가 없는데 악취가 난다. 방귀를 뀐 사람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냄새를 맡은 사람은 얼마나 민폐인지 한번 자기 항문과 콧구멍에 호스를 연결해서 그 가스를 단숨에 맡아보길 바란다”고. 또 수학여행이라든지 합숙훈련이라든지 단체 생활을 하다보면 강요 아닌 강요의 형태로 목적도, 의미도 알 수 없는 일에 무조건 따라야만 현실에 부당한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학교뿐만 아니라 집단이란 무언가의 억압이 있다. ‘이렇게 하라’라고 시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싫든 말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건가’ 하고 포기한 채 시간은 흘러간다.
급식을 다 먹지 못해서 방과 후에 울면서 먹는 학생이 있었다.
학교 급식에 싫어하는 것이 나와도 먹어야 하는 건 어째서인가. 선생님은 어째서 화를 내는가. 어른들은 싫어하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잘살고 있지 않은가. 어린이도 좋아하는 게 있고 싫어하는 게 있다. 어른이 되면 먹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지금 이걸 야단맞으면서까지 먹어야 하는 건가. / ‘무의미한 합숙 편 그 후의 이야기’ 중에서 205p
이 책을 읽으며 유일하게 아쉬운 게 있다면 사쿠라 모모코가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쉬운 대로 이 책과 함께 시리즈로 나온 『원숭이의 의자』, 『도미 한 마리』를 읽어보는 수밖에. 그나저나 내가 이야기를 놓친 게 있었던가. 제목이 왜『복숭아 통조림』인 건지, 누가 대답 좀 해줬음 좋겠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