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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조남주 작가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여성주의가 남녀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사랑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틀렸다. 나는 여성주의야말로 사랑을 향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던 최은영 소설가의 말을 기억한다. 여성주의 혹은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 자신들의 권리와 주체성을 옹호하고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적극적인 자기 인식을 통해 남녀 서로가, 그리고 각자가 온전히 삶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한 진지한 고민에의 의지다. 여성의 오랜 서사 속에서 그들은 이제 막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을 뿐이다. 여전히 ‘투쟁’에 가까울 만큼 진정성을 의심받고 때로는 전투력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만, 차마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던 것들로부터 혹은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상처의 근원으로부터 서로를 해방시키기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쓰고’, ‘써야 할’ 이유다.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여성의 서사
페미니즘 소설이 하나의 장르라면 본인의 뜻이든 아니든 조남주 작가는 그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을 기점으로 잇따라 발표한 소설집 『그녀 이름은』, 「현남 오빠에게」 그리고 다수의 작품들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작 『우리가 쓴 것』에 수록된 작품들 역시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품고 있는 삶과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다. 성희롱에 노출되어 있는 10대 소녀들, 가스라이팅, 가부장제, 돌봄 갈등, 페미니즘 소설가로서의 고뇌, 여성 노년의 삶 등 우리 사회에 주요 화두로 떠올랐던 여성 문제들을 관통하고 있다.
첫 번째 수록작 「매화나무 아래」에서는 오랜 세월 여성, 딸이라는 사회적 관습 아래에서 살아온 80대 여성이 등장한다. 어려서는 가난한 부모 대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고, 결혼하고는 무능한 남편 몫까지 성실하게 일하며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충분히 먹이고 가르친 억척같은 큰언니가 이제는 치매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같은 노년의 시선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에 질문을 던져보는 작품이다. 반면 「가출」에서는 평생 가장의 역할에 최선이었던 아버지가 “이제 나를 찾지 말라”는 편지만 남기고 가출해버린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비록 아버지란 자리는 현재 부재중이지만 이로 인해 평소보다 더 자주 가족들이 모이게 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서는 병원 홍보대행사에서 누구보다 능력 있고 열심히 일하지만 결국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쫓겨난 미스 김이 등장한다. 뒤늦게 회사는 그녀의 부재로 인해 업무상 대혼란을 겪지만 또 그런대로 흘러가고 마는 아이러니한 광경을 보여준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현남 오빠에게」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일명 ‘가스라이팅’으로 통하는 연인 사이의 권력과 폭력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30여 년 전 가정폭력상담소를 열었던 엄마 아래서 자라온 여성이 이제는 남학생들의 성희롱 문제를 고발하는 딸을 바라보며 집요하고도 불편한 여성 문제의 현실과 여성운동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남편은 노인네들 병원에서 아니면 이름 불릴 일이 어디 있다고 다 늙어 개명을 하느냐고 비웃었다. 반대도 아닌 무시. 딱 한 번 말을 꺼내고 이후로 일절 이름 얘기는 입에 올리지 않고 살았다. 남편 장례가 끝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개명 신청이었다. 누가 알았으면 기다린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 ‘매화나무 아래’ 중에서 19p
미스 김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있었다. 대리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고 실장도 아니고, 경력은 길지만 직급은 제일 낮고, 연봉도 제일 낮은 미스 김이 회사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조율하고 진행했다. 그렇다고 미스 김을 승진시키거나 연봉을 올려 줄 수는 없었다. 미스 김은 미스 김이니까. / ‘미스 김은 알고 있다’ 중에서 132p
그 일 이후로 저는 남자 지인들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혹시 나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내 말이나 행동을 오해하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그들이 보내는 성적인 메시지를 내가 제대로 못 읽고 남자들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뭐랄까, 이런 표현 별로지만, 헤픈 여자가 된 느낌이었어요. 나를 더 단속하게 되었습니다. / ‘현남 오빠에게’ 중에서 163p
엄마가 모르는 아저씨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 아무리 도움을 요청해도 출동하지 않던 경찰은 아내가 감금되었다는 남편의 신고가 있다며 한 번씩 사무실과 쉼터와 우리 집까지 헤집어 놓았다. 엄마의 일을 곱게 봐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분란을 일으킨다고 거북해하는 사람이 절반쯤, 저런다고 뭐가 달라지느냐는 회의적인 사람들 절반쯤, 대놓고 그만두라고는 안 하셨지만 할머니도 가시 돋친 말을 툭툭 내뱉고는 했다. / ‘여자아이는 자라서’ 중에서 274p



「오기」에서 작가는 작중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덕분에 많이 읽히고 팔렸던 것을 사실이다. 다시 더 많은 말들이 만들어졌고 또 팔렸고 또 말이 만들어졌던 일은 선순환이었는지 악순환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작중 화자는 페미니즘 소설로 일약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소설가로, 여성의 경험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데 대한 거센 저항과 집요한 공격을 악플러들로부터 받는다. 그런 와중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공감을 표현하며 소설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지만, 막상 그런 상처가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중 심리로 인해 도리어 공격적으로 입장을 전환하는 모습은 페미니즘 논쟁의 딜레마와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오기’라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꾸준히 여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조남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에 가깝게 읽히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선생님, 세상에는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폭력을 경험한 여자들이 너무 많아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은 꽤 흔한 일이잖아요.”
- 일? 참 쉽게 말하네. 작가님 작가님 떠받들어 주니까 바닥에서 악다구니하는 여자들이 우습지? 대충 끌어다가 보편이니 평범이니 하면서 납작하게 뭉개도 될 것 같지? 네가, 그리고 네 소설을 읽은 사람이 세상 여자들의 삶이 모두 다르다는 걸, 제각각의 고통을 버티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 ‘오기’ 중에서 73p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요즘 여자애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되바라졌는지,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요즘 남자애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고 있는지 내게 따져 물었다. 알바하던 카페의 중년 사장이 전화를 해서 “여어, 대모님! 아, 이제 말조심해야 하나?”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다른 여성 작가의 훌륭함을 말하기 위해 내가 비교 대상으로 끌려 나오거나 비평과 논쟁과 담론 안에서 내 소설이 납작한 퍼즐 조각으로 잘려 끼워 넣어진 일은 셀 수도 없다. / ‘오기’ 중에서 74p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단연 「오로라의 밤」이다.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시어머니와 함께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여행을 떠나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결혼한 후로 항상 2인분 혹은 3인분의 생활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과 피로가 있었다’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뒤늦게 자신의 원하는 것을 좇아 마침내 그 앞에서 목 놓아 우는 장면은 나의 엄마와 나의 미래를 생각하게 해서 울컥거렸다. 또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딸 역시 다시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새롭게 쓰일 여성 서사에 대한 긍정성을 제시하고 있어 의미 있게 읽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 / ‘오로라의 밤’ 중에서 246p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지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 / ‘오로라의 밤’ 중에서 250p



김미현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집을 여러 시간대에 속한 각각의 김지영‘들’이 누비이불처럼 서로 연결되면서 존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김지영‘들’로서 각자의 이야기를 누비이불 기워내듯 말하고, 귀를 기울이고, 쓰고, 읽는 작업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각자의 이야기로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을 수도, ‘뒤에 오는 여성과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고, 앞에서 걸어가는 여성의 등에 기댈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조남주의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