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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라도 시작하는 게 훨씬 낫지 - 80이 넘어 내가 깨달은 것들
메흐틸트 그로스만.도로테아 바그너 지음, 이덕임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4월
평점 :

나의 쿨하고 세련되며 꽤 근사한 노년의 삶을 상상하게 하는 책!
영화 <미나리>로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서 손주 데이비드가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라고 대사하듯 영화 속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할머니상으로부터 살짝 비껴간, 따뜻하면서도 역동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그러고 보면 영화 <돈의 맛>, 드라마 <그들의 사는 세상>, 그 외 다수의 작품에서 그녀는 한결같이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남다른 역할을 선보여 왔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이지만, 나는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기 앞에서 ‘절실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놀랍다. “저를 일하게 만든,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라며 애정과 위트 있는 말로 수상소감을 전한 부분 역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자 멋진 엄마로서 두 아들의 자부심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문득, 『늦게라도 시작하는 게 훨씬 낫지』에서 읽었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나이가, 많은 이들을 두렵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사람들은 백발과 삐걱거리고 아픈 관절, 그리고 은퇴 후의 하품으로 점철된 공허한 날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가 나이 들어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 하나이다. 인생 최고의 시기는 노년에서 끝나지 않는다!’ 80대의 저자 메흐틸트 그로스만은 노년은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그저 세월을 흘려보내는 시기가 아니라 내가 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 그리고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때라고 말한다. 여전히 내 인생의 봄날을 꿈꾸면서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 또한 기를 수 있어야 하는 것, 나는 오늘 두 ‘그녀’들 덕분에 ‘꽤 근사한 노년’이란 무엇인지 대해 이렇게 배운다.
어쩌면 노년은 단지 시작일지 모른다. 무릎이 쥐어짜듯 아프건 말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크고 다채롭고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16p
나이가 드는 것에 겁먹지 마세요
『늦게라도 시작하는 게 훨씬 낫지』는 어느 80대 독일 할머니의 싱글 라이프를 담은 책이다. 그녀는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조간신문을 읽고, 이따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달콤한 디저트나 근사한 와인까지도 즐길 수 있는 지금을 무척 사랑한다. 간혹 사고 싶은 코트 앞에서 그것을 입을 수 있는 봄날이 얼마나 될지 먼저 계산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한 봄날은 찾아오는 법이라고 긍정하고,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가 먼저 떠난 남편이 그립지만 이따금 근사한 파트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다. 물론 거울을 보다 주름진 모습을 보거나, 산책할 때 지팡이나 보조 보행기가 유용할 만큼 육체의 노화를 실감할 때도 많지만 육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그것을 품위 있게 받아들이려 애쓰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가족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사실 더 어렵다.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전화해서 물어볼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싶다. 내 가까운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 바쁘게 산다. 나는 바쁜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모르는 걸 물어 보며 귀찮게 구는 늙은이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전화를 걸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멋진 늙은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 32p
때로 내 입에서도 ‘절대로 다시는’이라는 말이 나오려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몇 년 전 나는 이에 대한 규칙을 세워두었다. 할 수 없는 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불만이 올라올 때마다 내가 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 그리고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 66p


가족 사이에서 ‘홈 메이드 통조림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는 항상 꽤 많은 양의 잼 병을 채운다고 한다. 가족과 친구들, 보행자 구역에서 만나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지인들까지 그녀가 만든 잼을 찾기 때문이란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잼을 좋아해주니 행복하다고. 하지만 잼을 건넬 때 일부 사람들의 반응은 그녀를 괴롭힌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케이크를 선물로 가져오면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환호하지만 늙은 여자가 같은 일을 할 때는 ‘어머, 또 케이크를 만드셨네요!’ 같은 소극적인 반응이 뒤따르는 것이다. 노인이 하는 일 중에 어떤 일은 더 이상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고 당연시하게 되는 게 그녀로서는 불편하다. 뿐만 아니라 노인이라면 스타일에 대한 고려보다는 편안하고 튀지 않는 색깔을 권하고, 노인을 속여서 충격에 빠뜨린 다음 이들의 무력감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범죄자들도 그러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는지 함께 고민해볼 문제다.
같은 백발을 하고 있어도 남자는 매력적으로 비춰지지만 여자에게는 미장원에 갈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이 사회는 여자들을 마치 이마에 유통기한이라도 적혀 있는 것처럼 대한다. 게다가 그 유통기한은 너무나 빨리 지나버린다. 끔찍한 일이 아닌가. / 88p
당시에는 경구피임약이 시중에 없을 때였다. 콘돔은 살 수 있었지만 요즘처럼 쉽고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약국에 가서 하얀 약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는 듯한 과정을 견뎌야 했다. 울리도 나도 결혼반지를 기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의심의 여지가 있을 경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섹스를 하고 싶다면, 기꺼이 아이를 가질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 당시 대중들의 인식이 그랬다. 그리고 울리와 나는 섹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성장했다. / 188p
그래도 차를 파는 것은 나로서는 힘든 결정이었다. 노인이 되면서 나는 끊임없이 나의 한계를 맞이해야 한다. 내가 더 이상 많은 물건을 운반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더 이상 예전처럼 잘 들을 수 없다는 사실, 아침에 신문을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했다. 나에게 자동차는 독립과 자기 결정의 마지막 상징과도 같았다. / 195p
그녀는 죽음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장례식은 어떻게 진행되기를 바라는지, 병들고 늙은 어머니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고 몹시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기에 연명 치료 거부 의향서를 적절한 시기에 미리 작성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해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누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라기보다 일찌감치 요양원을 선택해 아이들과 손주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덕분에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태도로 삶을 연명하기보다 살아나갈 가족들의 삶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그녀의 뜻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나 역시 죽음이 가족의 수고로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매년 모여서 제사를 지내기보다 10년에 한 번씩(이 정도는 괜찮잖아?) 손자와 손녀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모여 자신들이 그동안에 읽은 가장 감명 깊었던 책 한 권을 골라와 그 자리에서 나눠가지는 작은 이벤트를 열어주었으면 좋겠다. 어린 아이가 어른의 책을 갖게 된다면, 언젠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것을 읽어보라고 한 의미를 알 수 있었으면 한다. 반대로 어른이 아이의 책을 갖게 된다면 왜 아이가 이것을 선택했는지 혹시 그 속에 아이의 고민이 들어있는지는 않은지 당장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역사 속에 조금이라도 좋은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질 뿐이다. 곧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공포가 된다. 하지만 말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을 거둘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곁에서 노인의 죽음을 겪어보는 것도 그에 대한 공포를 줄여줄 수 있다. / 97p
이 글은 일종의 안내서이다. 따라서 내가 죽고 난 후에 가족이나 친척들이 이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또한 내 친척의 숫자를 훌쩍 넘어서는 나의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그들의 장례식에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서로 의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누구도 결혼식을 꿈꾸듯이 장례식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하는 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걸 안다는 건 위안이 된다. / 98p



『늦게라도 시작하는 게 훨씬 낫지』는 나의 쿨하고 세련되며 꽤 근사한 노년의 삶을 상상하게 해서 계속 생각날 것 같은 책이다. 지금부터라도 그때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꾸준히 생각해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당장 지금의 나의 태도부터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기에.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