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문 특서 청소년문학 19
지혜진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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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넘어서려 할 때, 마침내 자신만의 시구문을 넘어 새로운 문이 열린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어가기 위해 문을 하나 건너야 했으니 그 이름이 바로 시구문(광희문)이다. 이 문을 건너면 이승의 삶이 저승의 삶으로 뒤바뀌는 일인데, 시구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회한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을까. 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잇달아 겪어야 했던 인조 시대, 소설은 시구문의 안팎에서 곤궁한 삶을 근근이 이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무당의 딸인 기련은 오늘도 시구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기웃거리며 죽은 자의 시신이 옮겨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난 하루빨리 돈 모아서 집을 나갈 거야. 도망칠 거라고.” 동무인 백주에게 늘 하는 말이다. 집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는 기련으로서는 돈을 모으는 일이 시급하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토록 싫어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억울한 죽음을 이렇게 내보내면 쓰나. (…) 원통한 마음을 풀고 나가야 할 텐데…….” 죽은 사람에 대한 측은한 마음 또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액땜을 해준답시고 돈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속이는 것은 아니다. 죽은 손녀딸을 지게에 지고 나가는 노인이 마음에 쓰여서 자신이 신고 있던 버선을 거무죽죽한 죽은 아이의 발에 신겨주기도 한다. 또 마냥 헛소리를 지어내는 것만도 아니다. 언젠가부터 기련의 귓가에 아주 가느라단 풀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람소리가 아닌,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 들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게다가 느닷없이 보이기 시작한 검은 형상까지. ‘신내림은 대를 통해 전해진다는데, 딸년도 제 어미 인생 따라갈 거 아냐.’ 사람들 역시 이렇게 수군거린다. 하지만 기련은 소문, 진실, 운명, 그런 것들 따위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다. 자신이 믿어버리면 그것이 사실이 될 것 같아 두려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정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열 다섯 살의 소녀 기련으로서는 자신을 둘러싼 운명이라는 그 몹쓸 것 때문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다.

 

 

 

 

“난 하루빨리 돈 모아서 집을 나갈 거야. 도망칠 거라고. 지금 좋은 방법 같은 건 없어.”

백주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내가 얼마나 우스워보일지를 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아까 시구문 길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들렸던 그 풀피리 소리도 신경 쓰였다. 요즘 들어 그것과 비슷한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도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러나 아무것도 못 하고 어머니처럼 운명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 23p

 

 

“그날 저녁에 백주 아버지 방 문 앞에서 이상한 풀피리 소리를 들었어요.”

어머니가 콩을 담던 손을 멈췄다. 알 수 없는 적막이 어머니와 나를 에워쌌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 들리는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얼마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지 겁부터 났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더라도 나는 그 운명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신이든, 어머니든 누군가 정해준 건 내 것이 아니었다. / 108p

 

 

 




 

 

 

 

  한편, 양반댁 규수인 소애는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역모죄에 몰려 참수를 당하는 변고를 겪는다. 관아에서 나온 사람들이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사이 몸종인 향이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쳤지만, 당장에는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평생 반역 죄인의 딸로 멸시를 당하다 죽을 이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아버지의 효수가 시구문 밖에 매달렸는데도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그저 원통할 따름이다. 때마침 이 광경을 보게 된 기련이 한때 소애와 향이의 도움 덕분에 목숨은 물론 아버지의 유품까지 구할 수 있었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가 대신 나서기로 한다. 아버지의 터럭이라도 구해오고 싶은 소애의 원통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동무인 백주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다.

 

 

 

사람의 기억이란 지나간 사람의 기억을 이어 붙여 또 끝끝내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육신이 여기 없어도 그 사람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 기억 속에 함께 이어져 있다. / 123p

 

 

 

  이렇게 소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무당인 어머니가 부끄러워서 하루빨리 도망치려고 하는 기련, 모함을 받아 몰락한 양반가 규수인 소애, 편찮은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책임지고 있는 소년 가장 백주를 통해 당시 십대들이 겪어야 했던 삶과 죽음, 운명이라는 서글픈 비애를 조명한다. 신분의 한계, 타고난 운명, 가족 간의 갈등, 가진 자들에 의해 아무렇게나 내팽겨지고 마는 삶의 얄팍함이란 그들에게 매순간 위기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다다를 데 없이 마지막까지 내몰린 순간에도 살아있는 한 아직까지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소중한 것은 사실보다 마음속 진실이라는 것을 가족에게서, 함께 의지하는 동무들에게서 배운 기련과 소애는 이제 살아가는 내내 자신이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로 다짐하며 운명의 문을 넘는다.

 

 

 

살아가는 내내 기억해야 했다. 앞으로의 삶이 힘들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기꺼이 문밖의 길을 내어준 어머니와 백주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운명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닌, 내가 운명을 이끌어보겠노라 다짐했다. 두렵지 않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두 사람의 손을 꼭 쥐었다. / 180p

 

 

 



 

 

 

 

  『시구문』은 비록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십대라면 마주하게 되는 고민과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정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넘어서려 할 때, 마침내 자신만의 시구문을 넘어 새로운 문이 열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 문 너머에도 커다란 시련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늘 위기는 매순간 찾아오겠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한 반드시 희망은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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