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 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트라우마의 모든 것
김준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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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 부모들 그리고 예비 부모들이 한 번쯤은 꼭 읽어보았으면 책!

 

 

  “엄마, 나 속상해.”

  아이가 울먹이는 얼굴로 다가오더니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린다. 아차, 사실 십 분 전쯤부터 아이의 표정을 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이렇다 할 변화가 없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보다. 진즉에 아이의 마음을 살펴봐줄 수 있었는데 괜찮아 보이면 된 거라고 제대로 살펴봐주지 않았으니 잘못이라면 내게도 있다. 아이가 아빠의 휴대폰을 만지느라 알람을 꺼버렸고 이 때문에 늦어버린 아빠가 핀잔을 준 게 원인이었다. “많이 속상했지?” 나는 일단 아이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준 다음, 아빠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유독 눈물이 많은 아이에게 “울지 마. 울 일 아니야.”라는 말을 곧잘 하곤 했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울기 보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게 어느 새 훈육조의 말투로 으르게 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육아서가 아이의 감정을 먼저 살펴봐주는 게 먼저라고 조언하지만 일단 아이가 눈물을 터뜨리면 ‘이게 뭐라고 울어’, ‘또 울어? 에휴’ 같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다 문득, 유년시절에 나는 부모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속상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착하고 말을 잘 듣는 어른스러운 아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진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본 적이 없는 아이’에 가까웠다.

 

 

 

  그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 어딘가에 ‘울면 안 된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걸 꾸준하게 내 아이에게도 심어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예민하고 타인의 감정에도 민감한 아이가 좀 더 대범하게 자라났으면 하는 나만의 욕심 때문에 아이에게 ‘힘들어하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강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이 아이는 적어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상태이니까. 솔직해도 괜찮다고, 내 감정을 외면당하지 않을 거라고, 늘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줄 대상이 바로 곁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나는 그 어느 육아서보다도 절실하게 이 책으로 하여금 깨닫게 되었다.

 

 

 

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트라우마의 모든 것

 

 

“우리 삶에서 트라우마란 어찌할 수 없는 필수불가분의 것이다.”

- 《트라우마 상담 및 심리치료의 원칙》 존 브리에르, 캐서린 스콧

 

 

 

  끔찍한 사고나 전쟁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장애인, 성소수자, 빈곤층에 필요한 관심과 배려의 결핍 또한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트라우마에 취약한 이들도 있고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또한 비밀스러운 경험이기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치료기법들도 소개되고 심리 상담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지만, 트라우마란 곧 ‘문제 있는 사람’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어서 이에 대한 심리적 장벽은 아직 높아 보인다. 이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트라우마 연구자로 현재 서울 EMDR트라우마센터의 센터장을 역임 중인 김준기 전문의는 어떻게하면 일반 독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에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 가족 간의 연결을 보여주는 영화, 전쟁의 후유증을 보여주는 영화, 외상 후 성장을 보여주는 영화 등 25편에 이르는 영화를 통해 그 속에서 드러나는 트라우마에 관한 다양한 사례와 증상, 치유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스포트 라이트>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보스턴 지역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폭행 사건을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취재팀 기자들이 폭로하는 과정을 담은 실화다. 가톨릭 신도들의 반발과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의 끈질긴 취재 끝에 보스턴 지역에서만 약 90명의 가톨릭 사제들이 아동 성추행을 해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최대 30년이나 된 오래된 기억이, 트라우마가 어떻게 피해자에게 그토록 생생하게 각인될 수 있는지를 목격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반적인 기억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저절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형되어 가거나, 반복해서 떠올려 이야기하다 보면 더 유연하게 변화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사건 기억은 이상하게도 쉽게 변하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 이는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려 압도적인 트라우마의 기억을 전혀 가공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처리되지 않은 채 억압된 트라우마의 기억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트라우마 당시의 정보와 에너지를 그대로 담은 상태로 뇌의 신경회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가, 뭔가에 자극을 받으면 당시의 기억 정보를 그대로 생생하게 활성화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해리시켜 덮어둘수록 트라우마 기억은 무의식의 장막 아래에서 더 은밀하고 집요하게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트라우마의 기억을 자꾸 덮어두려 하는 습성이 있다. 이를 해리라고 하는데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본능적인 방어기전이다. 문제는 아무리 해리시켜도 트라우마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해리시켜 덮어둘수록 트라우마 기억은 무의식의 장막 아래에서 더 은밀하고 집요하게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자신의 지성과 의지라고 믿으면서 하는 결정이 사실은 처리되지 않고 덮어둔 트라우마 기억의 영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트라우마 기억을 통합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주체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33p

 

 

사건 자체의 요인, 개인적 요인, 사회적 요인, 이 세 가지 요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트라우마 후유증의 양상을 결정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고통받는 증상의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이 있다. ‘다른 사람은 극복했는데 넌 왜 극복하지 못하느냐?’는 말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또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도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은 다 극복했는데, 왜 나만 한심하게도 이겨내지 못하지’하며 자책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 50p

 

 

 



 

 

 

 

  트라우마에 얽힌 기억은 일반 기억과 무엇이 다르며 트라우마를 결정하는 삶의 요인은 무엇인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다크 나이트>, <굿 윌 헌팅> 등을 통해 1장에서 살펴본다면, 2장에서는 전쟁 트라우마, 감정 인지불능증, 아동기 트라우마 등 트라우마의 대표 증상들을 알아본다. 그 중에서도 <아무도 모른다>, <케빈에 대하여>, <똥파리> 등은 어린 시절 안정적인 애착을 경험했느냐 경험하지 못했느냐가 개인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어린 시절 받은 심한 정서적 학대나 신체적 학대도 분명 커다란 상처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없는 것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제 비난과 잔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보다 방임을 겪은 아이들이 더 해리장애를 겪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덧붙여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방공호에 격리되어 부모와 떨어져 지내며 비교적 안전하게 지낸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된 뒤에 더 부정적인 영향을 오랜 기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파괴된 건물과 고막을 찢는 포탄소리 그리고 처참하게 죽은 시체를 목격하게 되더라도, “괜찮아, 엄마가 같이 있잖아”하고 안아줄 수 있는 양육자의 존재가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더 강력하게 보호해준 것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외부 세상의 객관적인 현실보다 바로 옆에 있는 부모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안정적인 애착을 경험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신체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애착이론의 창시자인 존 볼비 역시 “엄마와 소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과도 소통할 수 없다”고 했다. 주 양육자인 엄마와의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통해 아이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며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있어서도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드시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 즉 관계가 주는 긍정적인 자원이 트라우마 치유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 <쓰리 빌보드>와 <룸>, <원더>를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과거에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가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다. 그래서 아이였을 때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 욕구들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이다.”라던 미국의 심리학자 존 브래드쇼의 말을 새겨둘 일이다.

 

 

 

독성이 강한 수치심은 항상 비난, 폭언, 폭력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아이의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주된 양육자가 못 알아채거나, 알아봐주지 않거나, 인정해주지 않을 때에도 수치심은 강렬하게 생겨난다. ‘아빠가 바빠서, 혹은 엄마가 우울해서 내 존재를 못 알아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고 한심하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도 내게 반응하지 않는 거구나’라고 어린아이는 상황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명백하게 보이는 학대보다 은근하게 일어나는 무관심이 독성이 강한 수치심을 더 자주 일으킨다. / 86p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의 결핍, 감정조절의 어려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기능을 조절하는 뇌 부위 중 하나인 전전두엽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하필 그 부위가 성장하지 못했을까? 우리의 팔과 다리 근육은 단백질, 필수 아미노산, 지방질, 무기질 같은 영양분으로 성장하는 반면, 공감 능력이나 감정조절 능력과 관련 있는 전전두엽의 발달은 놀랍게도 주된 양육자와의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전달되는 사랑과 애정을 먹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 176p

 

 

‘아이가 처음에는 힘들어할 수도 있어. 그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 그래도 아이를 믿고 보내야지. 아이가 힘들어하면 내가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잖아?’

이런 식으로 부모가 먼저 마음을 정리하고 침착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안심시켜주는 공감과 연결의 표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아이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부모가 먼저 소화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결국은 부모의 불안과 걱정이 전달되기 때문에 아이를 안심시키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 235p

 

 

 

  책을 읽으면서 영화 <굿 윌 헌팅>의 명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 양부모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한 것 그리고 엄마 혹은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을 오랜 시간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윌에게 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윌에게 무려 열 번이나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윌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안다고 대답하지만 이내 괴로워하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손 교수를 밀쳐내기까지 한다. 사실 그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숀 교수의 따뜻한 위로에 윌의 방어벽이 무너져 내리고 영화는 진정한 치유란 관계의 연결감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외상 후 성장은 그리 특별하거나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맹목적으로 성취와 성공을 추구하는 생활 태도를 내려놓고, 그 대신 감사한 마음을 자주 갖고, 작은 가능성에 즐거워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친근한 정을 나눌 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외상 후 성장이라고 한다. 개인에 따라 외상 후 성장이 일어나는 기간이 수개월이 되기도 하고 수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트라우마를 통해 오히려 이전보다 심리적으로 더 긍정적이고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를 제대로 직면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트라우마는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 되리라 믿는다던 그의 말이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렇듯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은 독자들이 영화를 보듯이 일상의 곳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를 바라보고 지나간 상처를 이해하며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간 수많은 육아서를 읽었지만 이 책만큼 부모로서 나의 아이들에게 진짜로 주어야 할 것이 무언인지 깊이 고민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비롯해서 많은 부모들이, 예비 부모들이 한 번쯤은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내가 지금 아이에게 보내는 눈길이, 사소한 말이, 쓰다듬어주고 보듬어주는 손길이 아이가 힘들 때마다 평생 꺼내 써먹을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비극은 제법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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