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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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고 충격적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만 하는 이야기!

인간의 존엄성과 궁극의 선의를 믿는 한 흑인 소년의 위대한 용기를 담은 소설!

 

 

  경범죄, 구제 불능, 도망친 가출 소년들,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들. 니클을 가리키는 단어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은밀하고 불길한 폭력을 간직한 곳이었다. 예전에도 많은 이 학교 출신들이 땅 속 저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을 말하곤 했지만, 니클의 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흙이 이상해 보였어요.” 사우스플로리다 대학의 고고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발견한 곳에서 마흔세 구의 시신이 드러난 것이다.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은 일곱 구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린 두개골, 대형 산탄이 잔뜩 박힌 갈비뼈들이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진즉에 이런 조사가 이루어졌어야 했지만, 늘 그렇듯 가장 참혹한 진실은 보다 늦게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960년대는 노예제도로 박해받고 인종분리정책으로 비천한 취급과 굴욕을 당하는 흑인들의 인권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마침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의 판결에서 학교에서는 인종분리를 중단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인종차별정책에 진전이 보이는 듯했지만 그 누구도 단숨에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틀랜타에서 남쪽으로 230마일 떨어진 탤러해시에 사는 엘우드는 꽤 영리한 아이였다.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매일 삶의 여로를 걸을 때 이런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평소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새겨두고 있던 엘우드였다. 그는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청년들이 철봉이나 소방 호스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맞고, 성난 얼굴의 백인 가정주부들이 뱉은 침을 맞으면서도 인권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며, 자신도 그 속에 뛰어들고 싶은 열망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새 학년 새 학기 첫날, 링컨 고등학교 학생들은 길 건너편의 백인 고등학교에서 온 헌책 교과서를 받았다. 자신이 쓰던 교과서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던 백인 학생들은 다음 주인을 위한 글귀를 책에 남겨두었다. ‘죽어라, 검둥이!’ ‘너 냄새나’ ‘똥이나 먹어라’. 9월은 탤러해시의 백인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모욕적인 말들을 배우는 시기였다. / 41p

 

 

학기 마지막 날 힐 선생님에게서 제임스 볼드윈의 《토박이 아들의 수기》를 한 권 받았을 때는 마음이 요동쳤다. ‘흑인들은 미국인이고, 그들의 운명이 곧 이 나라의 운명이다.’ 그가 플로리다 극장까지 행진한 것은 자신이 포함된 흑인들의 권리나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고함을 지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한 것이었다. 나의 투쟁은 너의 투쟁, 너의 짐은 나의 짐. / 51p

 

 

 



 

 

 

 

  그런 엘우드에게 어느 날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고등학생의 자격으로 탤러해시 남쪽의 멜빈 그리그스 기술대학의 수업을 무료로 청강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엘우드는 대학 캠퍼스로 가는 길에 불의의 사고에 휘말리게 되고, 니클 아카데미라 불리는 감화원으로 이송되고 말았다. 1899년에 주 정부에 의해 플로리다 소년 산업학교로 문을 연 니클은 “어린 범법자들이 못된 친구들과 분리되어 신체적, 지적, 도덕적 교육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훌륭한 시민의 품성과 목적의식을 지니고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백인과 흑인을 구분 짓는 인종차별이 눈에 띄긴 했지만 엘우드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만큼은 나쁘지 않은 곳이라 생각했다. 이곳 소년들을 수감자가 아니라 학생이라 부르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을 것이다.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곳에 붙잡혀 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엘우드는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한다면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짧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우연히 화장실에서 벌어진 싸움에 끼어들었던 날 밤, 일명 ‘아이스크림 공장’이라 불리는 화이트하우스로 끌려가기 전까지는.

 

 

 

그는 니클 안에서 몇 번을 옮겨 다녔다. 어머니가 멕시코인이라 이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학교 측이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여기 왔을 때에는 백인 아이들과 함께 두었지만, 라임밭에서 하루 동안 일하고 난 뒤 피부가 까맣게 변해서 스펜서는 그를 유색인종 반으로 다시 배치시켰다. 그런데 제이미가 클리블랜드에서 한 달을 보낸 뒤, 하디 교장이 시찰을 나왔다가 까만 얼굴들 속의 하얀 얼굴을 보고는 그를 다시 백인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스펜서는 때를 기다리며 참다가 몇 주 뒤 그를 다시 흑인 쪽으로 보냈다. “나는 오락가락하고 있어.” 제이미가 솔잎을 긁어 한곳에 쌓으면서 말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 망가진 이가 드러났다. “저 사람들도 언젠가는 결정을 내리겠지.” / 81p

 

 

 



 

 

 

 

  니클에 있어서 정의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누가 무슨 이유로 일을 벌였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곳은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폭력이었고,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곳에 온 흑인 소년들을 얌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엘우드는 화이트화우스에서 자신이 몇 번 맞았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무자비한 폭력을 당한 뒤 쓰러졌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터너는 살아서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다. 운이 나빴다면 화이트하우스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과 같은 운명이 되어 저 땅 속 어딘가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그 날 이후, 엘우드는 처음의 의지와 달리 소등 시간까지 무사히 하루를 보내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가 된 자신을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코리는 70대쯤 맞았다. 엘우드는 중간에 몇 번 어디까지 헤아렸는지 잊어버렸다. 어쨌든 말이 되지 않았다. 괴롭힌 녀석들보다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 왜 더 맞아야 하는가? 이제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저 사람들도 숫자를 헤아리다 중간에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이런 폭력을 휘두르는 데 정해진 규칙 같은 것이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 여길 지키는 사람도 여기에 갇힌 사람도 모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를 수도 있었다. / 91p

 

 

“그놈이 어디에서 맛이 가는지 넌 모르잖아. 다른 놈들이 어디에서 맛이 가는지도 모르고. 밖은 밖이고, 여기는 여기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니클 사람들은 전부 다르다고 말이야. 여기 있다 보면 사람이 달라지니까. 스펜서랑 그 패거리도 마찬가지야. 어쩌면 바깥의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그놈들도 착한 사람일지 모르지. 잘 웃고, 자식들한테 잘 하는 사람인지도.” 그가 썩은 이를 입술로 빨 때처럼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랬는데 내가 한 번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여기에서 특별히 사람들이 변하는 게 아니야. 여기든 바깥이든 다 똑같아. 다만 여기서는 아무도 가식을 떨지 않을 뿐이지.” / 107p

 

 

치키는 지난 세월 동안 마주친 니클 아이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새미, 넬슨, 로니. 이놈은 사기꾼이고, 저놈은 베트남에서 팔 하나를 잃었고, 또 한 놈은 약쟁이가 됐다고 했다. 치미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한 적이 없던 이름들을 입에 담았다. 마치 치키 자신을 중심으로 낙오자 열두 명을 모아 놓은 최후의 만찬 그림 같았다. 그 학교가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학교를 나와도 벗어날 수 없었다. 거기서 사람을 온갖 방법으로 구부려놓기 때문에 똑바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돼. 거길 나올 때쯤에는 사람이 아주 뒤틀려버린다고. / 207p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우드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세상에 전했던 메시지를 결코 잊지 않았다. ‘짐 크로처럼 검둥이들을 계속 누르려고 하는 거대한 힘이 있고, 엘우드 너를 계속 누르려고 하는 작은 힘이 있다. 이를테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 이런 크고 작은 힘 앞에서 너는 꼿꼿이 일어서 너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소를 지으며 너를 속여 텅 빈 것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네게서 너의 자존감을 빼앗아가는 사람도 있다.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우리 모두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궁극의 선의를 믿을 것, 엘우드는 아무리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라도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독려했다. 마침내 엘우드는 이제껏 이곳에서 경험하고 눈으로 보았던 부정과 폭력들을 기록한 편지들을 세상 밖에 드러내기로 마음먹는다. 그 끝에 어떤 결말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매일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에게 이런 긍지가 없다면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 226p

 

 

 



 

 

 

 

  이처럼 소설 『니클의 소년들』은 인종 차별과 폭력이 난무한 시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궁극의 선의를 믿는 한 흑인 소년의 위대한 용기를 담은 이야기다. 2017년 수상작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이어 퓰리처상 100년 역사상 이례적인 두 번째 수상자인 작품인 만큼 강렬한 리얼리즘과 묵직한 필치로 독자들을 전율케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인간의 가치를 위협하는 세상 속에서 끝끝내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깊이 숙고하게 된다. 어쩌면 역사는 끔찍하고 추악한 것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극복되었고, 또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인종차별문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정인이 사건과 같은 학대 역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엘우드가 믿었던 우리의 가치를, 우리라는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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