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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ㅣ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메이지유신을 통해 들여다본 일본인들의 역사의식!
일본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곧 우리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던 뼈아픈 경험이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한 뿌리 깊은 반일감정과 경쟁의식은, 때로는 우리를 분발하게 했지만 때로는 눈을 가리기도 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와 이유는 무엇인지, 왜 독도를 끊임없이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것인지. 우리가 그저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사이, 그들은 교과서를 비롯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압박해오고 있다.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의 저자 박훈 교수는 일본인들의 역사관과 의식에 이 같은 주장이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이고, 이에 맞서 우리가 일본을 상대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보다 전략적이고도 냉철한 감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본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일본을 아는 첫걸음, 메이지유신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프랑스대혁명에서 찾고, 미국인들은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물을 때 독립혁명의 아버지들을 소환한다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일본은 근현대 일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메이지유신을 불러낸다. 때문에 우리가 현대 일본의 유래와 현재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깊게 이해하려면 메이지유신에 대한 식견이 필요하다. 이에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에서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적 상황과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주역들의 삶을 통해 그 속에서 근대 일본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과 전략을 분석하고자 한다.
18세기 전반, 조선은 대략 10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3000만 명이 넘었으며 특히 수도인 에도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급속도록 발전한 일본은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했으며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수준에 이르러 다도, 가부키, 기모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가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하지만 높은 생산력과 상업 발달은 빈부격차를 낳았고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한 계층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봉록 수준이 낮은 하급 사무라이들은 물가가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경제적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도쿠가와 시대는 사무라이 국가이면서도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250년간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기에 이들은 출세할 일도 없고 주군이 맡긴 자잘한 사무나 보며 빈곤한 녹봉으로 근근이 생활해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유학, 그중에서도 주자학을 익히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투 대신 천하대사의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증기선을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났다. 아울러 청나라에서 발생한 아편전쟁은 당시 쇄국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일본에 대외 위기의식과 대내 위기의식을 크게 고조시켰다.
신식화기로 중무장한 영국의 증기선 앞에 대청제국은 맥을 못 추었다. 하지만 일본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청과 남경조약을 맺은 영국이 뱃머리를 일본으로 돌릴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쇄국이 국시인데 청나라처럼 개항을 할 수는 없었다. 개항을 거부하면 전쟁은 당연했고 전쟁을 하면 필패였다. 사무라이 정권인 막부는 청 조정처럼 서양 오랑캐 따위는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막부이기에 전쟁에서 지면 끝장이었다. / 36p
해리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막부는 1858년 무역을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했다(미일통상조약). 이어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제 일본은 본격적으로 서양과의 무역에 뛰어든 것이다.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이 1876년이었으니 그보다 20년 가까이 빠른 것이었고, 서양 열강과 조약을 맺기 시작한 것이 1880년대 초였으니 약 25년 정도 전의 일이었다. / 38p
이렇게 서양 열강의 침략 움직임과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다. 당시 일본은 해군이 전무한 상태였는데, 페리가 일본 앞바다를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니고 에도만에 깊숙이 진입하며 위협을 가해도 해상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쇼인은 해군 육성을 재촉했다. 뿐만 아니라 쇼인의 해외팽창론과 체제 혁신은 당시 그가 이끌던 송하촌숙의 젊은 사무라이들의 리더와 인재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고 해외팽창의 발판으로 울릉도를(당시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불렀다) 주목한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해 오랫동안 일본인의 조선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쇼인의 양이론은 맹목적인 통상 반대는 아니었다. 그는 서양에 맞서려면 그만한 경제력이 필요하고 그것은 무역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부국강병론과 가까운 것이었다. 아울러 서양과 싸우려면 강력한 국내 개혁을 통해 임전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의 양이론은 대외강경론인 동시에 체제개혁론이었으며, 수구적인 입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양이론이라기보다는 ‘양이개혁론’이 더 적절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 85p
도쿠가와 시대 사람들에게 ‘국가’는 일본 전체가 아니라 자기 번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국가의 틀을 넘어, 천하로 인식되던 일본을 ‘새로운, 유일한 국가’로 창출해가는 것, 그리고 번주에 대한 충성을 천황에 대한 충성(존왕주의)으로 전환해가는 것,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과정이었다. / 111p
요시다 쇼인이 해외팽창론을 제기하고 강렬한 일본정신을 강조했다면 사카모토 료마는 개국론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일본의 국민작가라 불리는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외 각종 대하드라마를 통해 잘 알려진 그 사카모토 료마다. 현재 일본 사회가 국제적인 마인드를 중시하고 아시아와의 협력을 중시할 때는 료마가 곧잘 소환된다. 반대로 일본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아시아에 대해 날선 자세를 보이는 정치세력은 요시다 쇼인을 즐겨 소환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대표적이다. 저자인 박훈 교수가 ‘쇼인은 강렬하고 어둡지만 료마는 명랑하고 밝다. 나는 일본 시민들이 쇼인보다는 료마를 더 주목해주길 희망’한다고 밝히는 데서 우리는 강렬할 일본우월주의를 낳은 메이지유신의 한계와 약점을 엿볼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 못지않게 일본 역사인물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이 무렵에 등장한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사이고는 ‘최후의 사무라이’이자 ‘근대 일본의 로망’으로 국가의 생존을 위해 급격한 서구화 변혁을 수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사무라이들의 상실감을 그는 이해한 인물이었다.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고 그 사이에 끼어 죽었다. 때문에 메이지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무도 그를 반란의 수괴로 여기지 않았다. 나라의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서구화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민족적 상실감을 사이고를 통해서 만회하려고 했던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반면 유신삼걸 중에 한 명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살아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이자 냉혈한 독재자로 비난을 받았지만 ‘서양을 배워 그보다 강한 일본’을 구축하고자 하는 메이지유신의 개혁과제를 수행하고 근대 일본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기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메이지유신은 존왕양이를 부르짖던 사무라이들이 주도했다. 천황을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쫓아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집권 이후 곧바로 서구 열강과의 화친을 선언했다. 막부가 맺은 조약도 그대로 계승했다. 존왕은 실천했으나 양이의 약속은 배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무라이들의 분노는 들끓었다. 사무라이들은 서양과 전쟁을 하기는커녕 날로 서양화되어가는 일본의 현실에 반란을 일으킬 조짐마저 보였다. 그들이 숭배하는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서양과 결탁한 정부 지도자들과 달리 사이고는 일본 혼을 실현해줄 인물로 여겨졌다. / 226p
오쿠보 도시미치의 리더십은 무엇보다 현실주의적이었다. 무모한 양이운동에 동조하지 않아 대중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자신이 속한 사쓰마번의 권력을 이용해 막부타도 운동을 벌이고, 정한론을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으며, 독일을 모델로 한 행정부 중심의 국가 운영과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을 시행했다. / 281p
정리하자면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인 사무라이층 내부의 다툼과 그 파장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 속에서 급진개혁파가 주도권을 잡아 이뤄낸 변혁이었다. 저자는 이런 메이지유신의 성격은 일본 사회에 보수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한다. 보수성이라고 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변혁을 보수세력이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수행했다. 그러니 변혁이 진행되어도 사회질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일 없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대중은 정치참여에 관심이 덜한 듯하다. 정치란 어차피 특정 사람들이 사는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가만히 있어도 지배층이 점진적 개혁을 진행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일본의 위기는 이 패턴이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일본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도 구분되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농민이 굳이 사무라이가 되려 하거나 상인이 애써 농민이 되려 하는 일은 잘 없었다. 각자가 자기 신분에서 자기 집안에 주어진 일(가업)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우리가 일본에 가서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몇 대째 가업을 잇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100년 된 스시집, 5대째 이어오는 포목상 등 그 연원은 이처럼 깊다. 도쿠가와 일본 사회는 가업이 기초가 되는 사회였다. / 139p
서가명강 시리즈답게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은 일본의 근현대사와 그 속에 얽힌 일본인들의 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쉽고 명쾌한 강의다. 여러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정치의 핵심인물로 자리 잡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책은 무조건적인 배척과 경쟁의식이 아니라 좀 더 유연한 사고와 통찰력을 통해 일본 역사를 바로 들여다보기를 독려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우리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만큼 일본이나 중국과 같이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변국들의 역사까지 바로 아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식을 가지는 데 이 책이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