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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것들의 미학 -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포 영화까지, 예술 바깥에서의 도발적 사유 ㅣ 서가명강 시리즈 13
이해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상식과 고정에서 탈피할 것! 비판하고 또 비판할 것!
성적인 욕망, 뒤틀린 유머, 공포와 연민 같은 감정들에 대한 지적 사유!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열세 번째 책의 주제는 ‘미학’이다. 미학이란 미와 예술이라는 문제를 철학이라는 방법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그 중에서도 분석미학은 ‘우리가 최대한 명료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견해를 가진 철학이다. 이를 테면 미와 예술에 관련된 전통적 주제들(예술의 본질과 정의, 예술작품의 존재론, 표현과 재현, 의미의 해석, 미적·예술적 가치의 문제)에 관해 적절한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합리적인 논의들을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학교 미학과 교수이자 분석미학자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위작, 포르노그래피, 농담(그중에서도 도덕적 문제가 있는 질 나쁜 농담), 그리고 소위 B급 장르의 대중예술인 공포물을 분석미학에 적용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위작, 포르노그래피, 나쁜 농담, 공포 영화의 미학적 담론들
판 메이헤런의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 식사>는 위작의 논란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은 판 메이헤런이 페르메이르의 뛰어난 작품들을 위조하기 위해 여러 습작을 거친 뒤 만든 위작이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위작을 제작한 동기에 대해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운 추상회화에 대한 반감과 이를 높이 평가하는 당대 평론가들의 감식안 부족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댔다. 비록 그 의도를 파악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는 어찌되었건 평론가들을 딜레마에 빠뜨렸다. 위작이지만 파괴하기에는 아까운, 원작 못지않은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윤리적이거나 예술사적인 이유 말고도 위작이 원작보다 무조건 열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을 예술적 이유가 있을까?’ 우리 대부분은 이에 대한 답이 ‘그렇다’이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가진 원작에 대한 선호가 예술적인 이유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살펴보아도 ‘뭐가 달라도 다른 점’이 없는 복제품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는데, 그림이 가짜라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면? 1950~60년대 초창기 분석미학의 기초를 일구어놓은 먼로 비어즐리는 맨눈으로 보아 구별할 수 없는 두 대상이 어떻게 서로 다른 미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각적으로 식별할 수 없다면 미적 가치도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 언제 그렸는가가 예술사에서는 중요한 사실이지만, 미적 가치와 형식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미적인 것만큼 예술의 고유한 가치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예술의 고유한 가치는 단지 미적 가치뿐일까? 레싱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독창성’이야말로 금전적, 교훈적 가치 같은 우연적이고 부수적인 효용과는 구별되는 예술의 예술로서의 가치 중 하나로 인정한다. 단토의 경우 ‘예술철학을 배경으로 위작을 본다면 위작은 작가의 관점이 투사되어 은유적 구조를 드러내는 대상이 아니다. 예술사적으로 거짓된 맥락에 놓여 있는 위작은 마치 어떤 진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진술은 결코 해석을 요청할 수 있는 진정한 진술이 아니다’고 하여 위작은, 위작임이 드러나는 순간 ‘해석될 자격’을 잃게 되고 따라서 동시에 예술의 지위도 잃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도 원작의 가치를 보호받지 못하면 예술 고유의 가치를 전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에도 오류는 있지 않을까? 이처럼 1부 ‘위작, 가짜는 가라! 그런데 왜?’ 편에서는 위작의 딜레마를 통해 우리를 미학 논쟁의 중심으로 뛰어들게 한다. 아울러 미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인 미적인 것과 미적 가치에 대해 고심해보게 한다.
미와 예술도 만만치 않은 검은 고양이들이다. 문화의 힘이 중시되고, 상상력과 창조성, 인간의 감성 능력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지자 그동안 삶의 여분이나 장식품, 아니면 그저 도구적 효용성의 영역에 머문다고 보았던 미와 예술은 점차 인간다움의 정수, ‘완성형 인간’의 필수 요소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인간 이해의 핵심으로 그 지위가 옮겨가는 듯하다. 미학은 그것들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 27p
“두 그림 중 하나가 위작이라는 나의 지식이 결국은 내가 두 작품 간의 차이를 지각적으로 구분하도록 나의 지각을 구성할 것”이라는 굿맨의 설명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상황은 두 그림에 차이가 있고 그것이 너무 감쪽같이 감춰져 있었는데 훈련을 통한 눈으로 결국 그 차이를 발견해냈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 차이’ 같은 것은 굿맨의 이론에서는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 즉 하나가 진품이고 다른 하나가 위작이라는 우리의 앎에 상대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지각은 결국 차이를 ‘구성’하여 그것을 ‘볼’ 것이고, 그러면 거기 차이가 ‘있는’ 게 될 것이다. / 71p
2부에서는 포르노그래피도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각종 도덕적·미학적 논쟁에 대해 살펴본다. 그렇다면 포르노그래피란 무엇일까? 이른바 ‘음란물’ ‘성인물’ ‘야동’으로 언급되며 애매모호한 경계수위를 넘나드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정의해보고, 포르노그래피는 과연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해본다. 한편 검열이라는 수단을 통해 국가가 포르노그래피의 문제에 개입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에 대한 탐구도 이어간다. 다음 3부 ‘나쁜 농담, 이따위에 웃는 나도 쓰레기?’ 편에서는 유머의 본질은 무엇이고 작품의 비도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농담의 도덕성과 예술적 가치의 문제, 농담의 윤리 문제에 대해 논의해본다. 여기에서는 비도덕성이 예술적 가치를 감소시킨다는 윤리주의의 주장과, 반면 어떤 농담이 감상자들에게 일부러 인종차별적인 관점을 취하도록 함으로써 그것의 어리석음이나 천박함을 실감하도록 하는 게 가능하다면 비도덕적 관점을 가진 농담이 곧 비도덕적인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의 대립 등을 통해 우리가 예술의 도덕적 측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유머가 될 필요충분조건이란 “그것이 저변의 다른 이유 없이 단지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적절한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즉 정보의 측면, 태도의 측면, 감정의 측면에서 준비된 사람)에게 특정한 쾌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며, 이때 이 반응의 정체성은 웃음이라는 추후의 현상을 자아내는 경향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제안한다. 즉 유머 반응의 특징은 ‘웃음을 웃게 하는 경향성’을 필연적 특성으로 가지고 있는 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181p
우리는 머리를 풀고 TV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에 공포감을 느끼지만 사실 그러한 존재가 현실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좀비가 나오거나 에이리언이 나오는 각종 괴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허구가 우리에게 연민과 공포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 같아 보인다. 따라서 4부에서는 우리가 왜 굳이 불쾌하고 감내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키는 공포물을 찾아보는 것인지, 이른바 ‘공포물의 역설’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가능한 것이 되는지에 대해 모색해본다.
이렇듯 제대로 된 감정에는 우리의 내적 느낌의 상태뿐만 아니라 그것을 외부 상황과 연결하는 다리가 필요하다. 앞 장의 끝에서 소개한 대로 감정의 핵심은 느낌이 아니라 판단이나 믿음 같은 인지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지주의자라고 한다. 이들은 바로 누군가 내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내 속에서 느껴지는 ‘화났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 화가 난 감정 상태로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즉 느낌만이 아니라 느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275p
스머츠는 쾌가 아니더라도 다른 식으로 가치 있는 풍부한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다면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경험하는 것이 역설이 아니라는, 역시 어느 정도 상식적인 주장을 제안한다.
특히 풍부한 경험 이론은 공포물을 즐기는 우리의 행태를 해명하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애초에 왜 우리는 부정적 감정이 예상되는 작품을 경험하려 하는가?’라는 동기적 차원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어서 더 선호된다는 입장도 있다. / 303p
이렇듯 『불온한 것들의 미학』은 예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감성의 저변에 놓인 성적인 욕망, 뒤틀린 유머, 공포와 연민 같은 감정들에 대한 지적인 사유를 시도해보는 책이다. 그 과정 속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관점들에 비판을 가하고, 또다시 그 주장에 비판을 가해보는 이러한 방식은 독자들을 유쾌한 미학 논쟁에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저자 스스로도 ‘미시적 문제들 속에서 가끔 방향을 잃기도 하고 한 방이 없는 전개가 답답한 경우도 있겠지만, 특정 이념에 박제되는 일 없이 언제나 진행형인 것도 분석미학의 특징’이라고 분석하는 만큼 사유하고 통찰해가는 과정이 간단명료하지 않고 다소 더딜 수는 있겠지만 상식과 고정에서 탈피해나가는 과정이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다. 미학에 대해 알고 싶거나 예술 관련 서적 혹은 철학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
이 도서는 21세기북스의 협찬을 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