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특별판)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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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이 있는 한 이 세계는 어쩐지 아름다울 것 같다!

말랑말랑하지만 견고한 정세랑의 언어는 늘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 학교에는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 출근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안은영은 유감스럽게도 평범한 보건교사가 아니었다. 은영의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이 들어 있다. 어째서 멀쩡한 30대 여성이 이런 걸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하나 속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은 멀쩡하지 않아서겠지. 안은영, 친구들에게는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받는 소탈한 성격의 사립 M고 보건교사, 그녀에겐 이른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18p

 

 

 

  엑토플라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들을 안은영은 볼 줄 아는 아니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일종의 미색 젤리 같은 이 응집체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지개빛 플라스틱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 그리고 은영 본인의 기운이 필요하다. 비비탄 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여기에 이집트산 앙크 십자가와 터키의 이블 아이 혹은 바티칸의 묵주와 부석사의 염주 같은 영험한 것들의 힘을 빌리면 스물여덟 발에서 19분까지 늘일 수 있다. 가운 안, 허리 뒤쪽으로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꽂고 다니는 30대 여성의 보건교사라니. 어쩐지 내막을 안다 해도 그건 꽤나 엉뚱해 보이고, 내막을 모르면 더더욱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2학년 1반의 담임이자 한문 과목을 가르치는 홍인표에게도 안은영은 어딘지 미덥지 않아 보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상한 여자 경보기’를 울리게 한다. 평소 교무실과는 데면데면했던 은영이 대뜸 그를 찾아와 자신의 반 학생인 승권이가 뭔가에 물린 것 같다며 조퇴시켜야겠다고 하자 난색을 표한다. 사실 인표는 M고의 설립자인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교직을 택했지만 이 학교에선 해마다 자살을 선택하는 아이가 생겼고, 각종 사고와 비행의 빈도 역시 상당히 심각해서 상당히 난감해하던 중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반 학생이 어딘가 나빠 보였다는 은영의 말에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직접 승권을 찾아나선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인표는 승권을 찾아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여겼던 게 틀림없다. 학교 지하실에, 할아버지 때부터 지하층 입구를 동여매고 있는 쇠사슬 저 너머에 사특한 기운을 품고 있는 어떤 존재가 아이들을 헤치려 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안은영의 눈에만 보이는 지독한 사념의 유기체들이어서 마침 지하실을 살펴보던 은영을 따라 우연히 지하실로 들어간 인표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봉인되어 왔던 뜻밖의 미스터리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지하 깊숙한 곳에서 몸을 잔뜩 부풀린 존재가 인표로 인해 봉인 해제되고, 학교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우리의 보건교사 안은영이 무지개빛 플라스틱 칼과 비비탄 총을 든 채 스타킹 발을 하고서 학교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 못생긴 새끼,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 43p

 

 

 

 

 

보건교사 안은영은 내 친구

 

 

 

   『보건교사 안은영』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M고 보건교사 안은영이 한문 교사 홍인표와 함께 학교에 깃든 미스터리를 해결해나가는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안은영은 주말이면 남산 타워에 가서 연인들이 채워 놓은 자물쇠로부터 사랑의 힘을, 명승지나 절 탑에서는 소원의 힘을 에너지로 삼아 소모되는 기운을 충전하고 때로는 욕도 서슴지 않지만,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통굽 슬리퍼를 벗어던진 채 스타킹이 찢어지도록 뛰어다닌다. 뭐 이렇게 명랑한 러브젤리매직파워판타지히어로가 다 있는지. 죽은 자의 영혼을 보거나 퇴마사를 소재로 한 장르물은 많이 봐왔지만 플라스틱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든, 그것도 누구도 쉽게 주목하지 않는 보건교사가 히어로로 등장하는 작품은 처음이 아닐까. 다소 유치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쿨하고 발랄한 영웅의 등장은 이제껏 우리가 기다려왔던 여성 캐릭터를 드디어 만난 것 같은 가슴 벅찬 느낌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 가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아이처럼 보였던 정현이 점점 젤리처럼 보였다. / 51p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 123p

 

 

 

 

 

 

 

 

   왜 정세랑은 학교를 배경으로, 하필이면 보건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학교의 그 수많은 선생님들 중에서 보건교사(나 때는 양호실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건실은 학생들이 자주 오가는 교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특별히 아픈 일이 없으면 보건교사와 얼굴을 마주할 일도 없다. 심지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에서는 보건실이 복도 끝의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해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보건실은, 보건교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늘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세랑은 어떤 교리나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학생들의 안전과 안녕을 우선으로 살펴봐줄 수 있는 한결 같은 존재에게서, 그들의 사소해 보이는 친절에서 영웅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들여다본 게 아닐까.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우리의 자아를 수호해주었던 세일러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가장 여린 존재들을 지켜줄 안은영이 지금 이곳에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세랑은 그걸 믿게 해준다. “아뇨, 햇빛과 아이들은 우리 편이에요.”라고 말할 줄 아는 안은영이 있는 세계, 선한 사람이 지닌 힘을 믿는 세계. 우리는 이미, 그 세계를 살고 있다고.

 

 

 

은영은 핸드백 속의 비비탄 총과 깔때기 칼을 생각했다. 정현이 아파했더라면, 혹 정현이 한 사람에게라도 해를 끼쳤다면 예전에 정현을 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현은 너무나 무해했다. 격하게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죽음도 있는가 하면 정현처럼 비누장미같이 오래 거기 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 53p

 

 

은영은 문득 크레인 사고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되짚어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크고 무거운 기계가 중심을 잃고 부러지고 휘어지고 떨어뜨리고 덮치는 일이 흔하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 195p

 

 

- 칙칙해지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 198p

 

 

 

 

 

  끝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드라마는 소설과 분위기가 비슷한 듯 다른 결을 띄고 있어서 상당히 흥미롭다. 소설이 발랄하고 명랑한 느낌이라면 드라마는 좀 더 미스터리한 장르적 성격에 충실한 느낌이다. 고무적인 것은 소설에서 설명되지 않는 혹은 너무 가볍게 흘러간 듯한 요소들을 드라마에서는 좀 더 설득력 있는 형태로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안은영의 고뇌와 성장에 보다 집중한 부분이 그러하다. 인영과 인표와의 관계가 급하게 수습된 듯한 소설의 마무리 역시 드라마에서는 시간을 두고 풀어갈 듯하여 좀 더 탄탄한 그림을 기대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상 작품은 대체로 만족을 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번 작품의 경우는 어느 한쪽이 기운다기보다 각자의 언어를 활용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다만 영상을 보기 전에 소설을 꼭 먼저 읽어보시기를, 보다 안은영 다운 힘을 소설에서 먼저 느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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