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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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소설과 문학적 성취까지 함께 이룬 스파이 소설의 고전!

한 스파이의 과거를 쫓아가는 여정 속에서 들여다보게 되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중성! 

 

사람의 외모, 골격, 그리고 골격을 덮고 있는 피부는 생물학적 작용의 산물이다. 하지만 얼굴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얼굴은 개인의 습관적인 감정 태도,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필요한 태도, 자신을 탐색하는 눈에 들키지 않으려는 공포심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는 데 필요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 준다.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자신이 공포를 느끼면 타인도 자신에게서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한다. 자신이 욕망을 가지면 타인도 자신에게 욕망을 갖게 해야 한다. 얼굴은 마음의 적나라한 모습을 감추는 가림막이다. / 343p 

 

 

 

   어쩌면 얼굴이 없는 표지의 그림 속 주인공이 반드시 디미트리오스여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마루카키스의 편지 속의 저 글귀처럼 ‘힘이 바로 정의인 한, 혼돈과 혼란이 질서와 문명으로 가장하는 한’ 디미트리오스와 같은 악한은 또 다른 디미트리오스로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란 사실’의 은유이며 또한 탐욕과 이중성이란 보이지 않는 가면을 둘러쓴 우리들의 얼굴이기도 한 까닭이다. 때문에 독자는 디미트리오스의 실체를 쫓아가면서도 중요한 것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디미트리오스에게 가담했던 사람들 혹은 디미트리오스와 같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이 소설이 왜 장르와 문학적 성취까지 함께 이룬 ‘스파이 소설의 최고 걸작’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끝없는 탐욕의 세계로 몰아가는가

 

 

 

   영국의 작은 대학 정치경제학과 조교수에서 본격적인 추리 소설 작가로 전향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찰스 래티머는 그리스인 친구의 권유로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차베스 부인으로부터 파티 초대장을 받은 래티머는 평소 그가 쓴 추리 소설을 좋아해서 꼭 만나보고 싶어 했다던 하키 대령과 마주하게 된다. 하키 대령은 들뜬 마음으로 평소 자신이 생각해왔던 추리 소설의 아이디어를 래티머에게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서 진짜 살인 사건의 소식을 함께 접한다. 하키 대령의 표현에 따르면 ‘전형적인 악당, 교활하고 속되고 비겁한 인간쓰레기, 살인, 스파이질, 마약 밀매 전력, 암살까지 서슴지 않는 프로 청부업자’였던 디미트리오스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에 칼을 맞고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래티머는 금세 디미트리오스라는 인물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호기심은 하키 대령에게 부탁해 시체 보관소에서 디미트리오스의 시신을 보며 더욱 뚜렷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디미트리오스는 비양심적이고, 잔인하고, 배반을 일삼는 인물이자 평생 범죄를 저질러 온 악당임이 분명하지만, 한때 마약 밀매로 많은 돈을 벌었다던 그의 말로가 이토록 누추한 것은 왜이고, 기록에 담긴 범죄들 말고 다른 범죄는 더 없었는지, 기록에서 아주 간단하게 처리된 공백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행적이 궁금해진 것이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의 뒤틀린 심리 한 조각을 막 발굴해 냈고, 이제 그 전체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 조각은 아주 작았지만 중요한 부분이었다. 가엾은 드리스에게는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디미트리오스는 그 흑인의 우둔함, 광신적인 신앙심, 단순함, 탐욕을 무서우리만큼 교묘하게 이용했다. / 64p 

 

 

 

 

 

 

   결국 래티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디미트리오스의 과거를 추적하기에 이른다. 몇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프랑스, 그리스, 터키 등 유럽 곳곳을 넘나들었던 드미트리오스. 래티머는 온갖 범죄에 가담한 이 의문의 남자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기록의 그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추악한 한 인간의 악마 같은 진실을 마주한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 전역에 넓게 퍼진 암운의 그림자에 숨어 기생하거나 내동댕이쳐지지 않기 위해 드미트리오스와 함께 범행에 가담했던 이들을 하나둘씩 만남으로써 래티머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잔혹한 이중성을 들여다본다. 그러는 동안에 이야기는 죽어 마땅한 디미트리오스가, 숄렘과 피서르의 살인범, 마약 밀수업자이자 포주이자 도둑이자 스파이, 백인 노예 매매꾼, 깡패, 금융업자인 디미트리오스가, 살해당한 줄로만 알았던 디미트리오스가 실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이르면서 뜻밖의 반전을 맞이한다. 이제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의 정체를 쫓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협박해 각자 50만 프랑의 이득을 챙기자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인해 자신의 도덕성마저 시험받기에 이른다.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 아닙니까? 영웅도 주인공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악당과 어리석은 자들뿐입니다. 아니면 어리석은 자만 있다고 해야 할까요? / 229p

 

피터스 씨가 이토록 역겨운 것도 바로 그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만약 피터스 씨가 지금 조롱조로 말했다면, 멋진 농담으로 들렸을 것이다. 지금 하는 말이 너무나 농담 같았기 때문이다. 피터스 씨의 정신은 두 개로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마약을 팔고, 채권을 사고, 『풍속 시선집』을 읽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의 외설적인 영혼을 감추기 위해 따뜻하고 역겨운 액체를 배설했다. 이런 인물은 싫어하지 않기가 불가능했다. / 253p

 

 

저는 그자가 그자의 생활 방식과 마찬가지로 끔찍하고 야비한 죽음을 맞이한 건, 사실 세상에 상식과 정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교활한 도피 방법이지요. 그렇게 되면 디미트리오스는 설명되지 못하며, 그자를 변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자가 대표하는 특수한 범죄자들이 생겨나는 데는 뭔가 특별한 조건이 있을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런 조건들이 무엇일지 정의해 보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힘이 바로 정의인 한, 혼돈과 혼란이 질서와 문명으로 가장하는 한, 그런 조건들은 계속 존재할 거란 사실뿐입니다. / 386p

 

 

 

 

  이렇듯 『드미트리오스의 가면』은 한 범죄자의 행적을 추적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스파이 소설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날카로운 추리와 강렬한 서스펜스보다 악의 정체성과 인간이 쓰고 있는 여러 겹의 가면,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이다. “저는 살인자보다 roman policier(추리 소설)의 살인자에게 훨씬 더 공감이 갑니다. Roman policier(추리 소설) 속에는 시체 한 구, 용의자 몇 명, 탐정 한 명, 교수대 하나가 있지요. 예술적입니다. 하지만 진짜 살인범은 전혀 예술적이지 않습니다”던 하키 대령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예술적인 전위에 가까운 추리 소설과 달리 실제의 죽음과 살인, 범죄와 같은 것들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을 리얼리티하게 보여준다. 때문에 영화 <미션임파서블>의 톰 크루즈 같은 스파이가 등장하길 기대하는 독자에게라면 약간의 실망감을 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에릭 앰블러를 두고 왜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 수식하는지 이 작품으로 하여금 그 이유를 꼭 확인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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