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벨레 문지 스펙트럼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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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제도 속 윤리적인 관계 규범과 에로스적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하여!

 

 

   유능하고 성실하며 전도유망한 의사 프리돌린은 가정적인 아내 알베르티네와 총명한 딸아이를 둔, 누가 봐도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졸린 눈을 부비는 귀여운 아이에게 미소를 건네며 인사를 건네는 그들의 모습은 여느 부부처럼 서로에게 다정다감한 모습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잠자리에 들어 식탁 위에 단둘이 남게 되어서야, 그들은 지난밤 가면무도회에서 겪은 기묘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접근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 프리돌린이 남자친구이기라도 한 것처럼 친근하게 굴었던 두 여성과 알베르티네에게 다가온 이름 모를 멜랑콜리한 남자의 이야기를 짐짓 과장하며 드러냈고, 서로에게 묘한 질투와 가벼운 복수심을 느끼며 어느 덧 서로에게 감추어진 욕망 같은 비밀스러운 영역에 가닿고야 만다. 프리돌린은 알베르티네가 지난해 여름, 덴마크 해변에서 반했던 장교가 전보를 받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를 뿌리칠 수 없었을 거라는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그 역시 그날 해변에서 열다섯 살쯤 된 소녀를 만나긴 했지만, 순진무구하리라 믿었던 아내가 결혼 전에도 호숫가에서 만난 젊은 남자가 원했더라면 그의 아내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던 솔직한 고백에 마음이 싸늘해진다.

 

 

 

감추어진 욕망, 거의 예상치 못했던 욕망, 가장 명징하고 가장 순수한 영혼의 한가운데 있어도 위험천만한 돌개바람에 휘말릴 수 있는 눈먼 욕망. 이런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비밀스러운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영역에 대해 그들은 평상시 아무런 동경을 느끼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면 비록 꿈속에서라도 두 사람이 한순간에 휘말려들 수 있는 그런 영역이었다. / 11p

 

 

 

   이렇듯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는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서 성적 욕망을 느꼈다는 사실에 충격과 분노를 느낀 프리돌린이 정처 없이 밤거리를 배회하는 데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로 그 밤, 그 거리 위에서 프리돌린은 결혼과 부부라는 제도가 부여하는 규범과 사회적 책임, 또 그 이면의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되곤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남자에게 은밀한 욕망을 품는 아내에게 증오를 느끼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마리안네와 몸을 파는 어린 소녀, 의상실의 주인 딸에게 애정을 느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카페하우스에서 한때는 함께 의학 공부를 했지만 지금은 피아노 연주를 하는 나흐티갈을 만나 한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에 이르는데, 가면을 쓴 나체의 여자들과 기사로 변장한 남자들의 춤사위를 보며 거역할 수 없는 에로스적 충동과 이성 사이에서 중심잡기 힘들어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광대 소녀의 젖가슴에서 피어올랐던 장미 향수와 분 냄새를 계속 느꼈다. 그 무슨 이상한 소설 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은 아닐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이 길을 가는 게 아니었어, 아니 감히 그렇게 하면 안 되었는데. 난 지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 69p

 

 

차라리 지금 당장 그냥 되돌아가버리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어디로 간담? 어린 광대 소녀에게? 아니면 부흐펠트 거리의 어린 창녀에게? 아니면 마리안네, 죽은 남자의 딸에게? 아니면 집으로? 프리돌린은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 70p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아무런 주의도 끌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이 구석 자리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를 붙잡아두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혹시 불명예스러운 그리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후퇴에 대한 수치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여자의 매혹적인 육체, 아직까지도 향기가 남아 있는 육체를 충족하지 못해 고통으로 변해버린 욕망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혹시 자신의 용기를 시험해보기 위한 것에 불과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조금 전의 멋진 여자를 상품으로 배당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 81p

 

 

 

 

 

 

 

   마침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비밀 암호를 대어야만 입장을 할 수 있는 이 미스터리한 무도회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프리돌린을 수상쩍게 본 기사들이 그를 위협하고, 한 여성이 대신 나서는 바람에 그는 신분이 드러날 뻔했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다음 날, 그는 친구인 나흐티갈이 갑자기 사라지고, 자신을 구해준 여성이 음독자살처리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꿈인 듯 현실인 듯한 이 위험천만한 모험과 눈먼 욕망으로부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알베르티네가 평화로운 결혼과 가정생활의 안정감 속에 푹 빠져서 스스로도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그녀 면전에 대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믿음직스럽고 앞날이 창창한 유능한 의사, 성실한 남편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난봉꾼으로, 호색한으로 그리고 인간 족속들과, 그래 그렇고 그런 년들과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놀아나는 냉소주의자’가 되어 그녀에게 복수라도 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쓴 가면을 그녀가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듯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진료를 마친 후 그는 평소 습관대로 아내와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보러 갔다. 알베르티네는 집에 방문한 친정어머니와 같이 있었고, 딸아이는 보모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는 중임을 확인하자 만족감이 전혀 없진 않았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위해 계단에 이르렀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이 모든 질서, 이 모든 균형, 자신의 삶에 관한 이 모든 안정감은 그저 허상과 위선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다시 들었다. / 126p

 

 

그것 아니겠어? 사람들은 얼마나 실체 없는 말에 끊임없이 유혹당하고 있는지, 길거리, 운명,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말을 덧씌워놓고, 실체 없는 그 말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버리는 거야. 그가 지난밤 이상한 우연으로 자리를 같이했던 모든 여자들을 그 근본에서 비교해본다면, 그중 바로 이 어린 창녀가 가장 우아한 여자, 정말로 가장 순수한 여자가 아니었을까, 정말 그렇지 않을까? 그녀를 마음속에 떠올리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 134p 

 

 

 

 

 

 

 

  알베르티네는 남편이 경험한 지난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며 그를 용서해주고자 한다. 그녀 역시 그녀가 지난밤에 꾼 꿈을 통해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에로스적 욕망들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따르면 꿈은 현실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단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억눌린 욕망은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경험한 것과 그녀가 꿈을 꾼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응, 확신해. 하룻밤 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 아니 한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실제로 있었던 모든 일조차도 그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 확신이 있어.” / 158p 

 

 

 

   그렇게 부부는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며 현실에서의 모험과 꿈속에서의 모험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에 감사해하지만 마지막에 알베르티네가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하고 속삭이는 대목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부부는 ‘한 자루의 칼’을 사이에 두고 살며 “죽이지는 않고 못 배길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 부부라는 윤리적인 관계 규범과 에로스적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란 사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연인들이여, 부부들이여, ‘영원히’라는 맹세에 속단하지 마시라.

 

 

 

   이렇듯 『꿈의 노벨레』는 겉으로는 단란하고 이상적인 부부일지라도 그 안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서로를 상대로 벌이게 되는 욕망의 줄다리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꿈과 가면’이라는 요소가 품고 있는 상징성과 주인공의 의식을 쫓아가는 형태의 서사 기법은 불안한 욕망의 그림자를 보다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이를 의식하며 읽어볼 필요가 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 소설이라고 하니,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상으로 만나보면서 소설 속 주인공과 리즈 시절의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에 이입해서 보는 것도 작품을 즐기는 좋은 방법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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