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것은 말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넘어서 연대를 모색하다!
사월의책 출판사의 편집장인 박동수는 인문잡지 《한편》을 통해 오늘의 2030세대를 ‘페미니즘 세대’라 명명한다. 이 말은 오늘날 청년세대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아니라, 청년세대가 페미니즘과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관계 설정 없이는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대중적 페미니즘’이라는 비가역적 사건을 경험하고 그 사건을 주체화한 세대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찬성하든 반대하든, 이견을 갖든 무관심하든, 청년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탈여성이라는 기표와 근대라는 단절적 시간성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대적 연결과 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박동수는 여기에서 ‘이 연결과 연합을 어떻게 추적하고 관찰하고 사유하며 또한 어떻게 거기에 참여할 것인가가 남겨진 과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이형의 『붕대 감기』는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편가르기식의 분열과 혼란 등의 각종 복잡한 문제와 박동수가 제기하고 있는 과제들로부터의 응답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좋은’, ‘완전한’으로 귀결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말하기’ 즉,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것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라는 것을.

낯설지만 익숙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지난 해, 한국대표 작가 29인이 모여 박완서 작가의 콩트를 오마주한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작가 윤이형은 「여성의 신비」라는 작품을 통해 쌍둥이를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된 지혜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경력을 되찾고 싶어 하는 지혜를 통해 한국 사회 내에서 여성이 겪어야만 하는 우울한 현실과 비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붕대 감기』는 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로서 지혜의 이야기를 더욱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로 확장하고 구체화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나이, 직업, 학력 등 제각기 다른 여성들의 독립적인 서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겹쳐지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취함으로써 워킹맘의 고충, 성폭력, 미러링, 탈코르셋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문제와 상처들을 정교하게 엮어나간다.
이야기는 미용실의 실장인 해미가 ‘언제나 온몸과 마음이 잔뜩 긴장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손님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한다. 그 손님이란 영화 홍보기획사에서 일하는 은정으로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서균을 갖고 배 속에서 태동이 커져가는 걸 느끼면서도 절대로 커리어를 놓지 않겠다고, 또한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는데, 서균이 눈썰매를 타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사고로 인해 휴직 신청을 해야 했다. 아이는 좀처럼 깨어날 줄을 모르고, 모두가 자신의 눈치만 보거나 말을 아끼기만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친구가, 마음을 터놓을 곳이 딱 한 군데만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엉망으로 길어져 흐트러진 머리,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절뚝이며 혼자만의 긴 싸움에 지쳐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마주한 그녀는 미용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누군가가 머리를 감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영양제 서비스로 넣어드릴게요, 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하지만 그 이름이 어느 순간부턴가 조금씩 자랑스럽지 않아졌다. 머리를 자르는 일, 단백질을 먹고 소화시켜 머리카락으로 바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 일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술들이 갑자기 낯설고 이상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지현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36p
범죄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해야 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어째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살기 위해 모여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결코 단일한 집단이 아닌 그들을 끝끝내 단일한 혐오 집단으로 몰려는 사람들만 이렇게 많은 것일까? 애써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의제를 만들어서는 안 됐다. 지현은 집회에 나갔지만 그 집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여자들끼리 하는 싸움에 끼지는 않았다. 그런 건 소모적으로 보였다. / 39p
‘……아이는 아직 모른다. 달착지근한 마카롱 몇 개나 갑작스럽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같은 것으로는 괜찮아지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미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 55p


미용실 실장인 해미와 워킹맘 은정의 사연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이제 미용실 직원인 지현을 거쳐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로 거쳐 간다. 진경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살가운 친구였고, 각각 다른 대학을 가면서 드문드문 만나게 되었을 때도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 그들이 3년 전쯤부터 멀어진 건 무엇 때문인지 경진은 생각한다. 무료해서, 무언가 칭찬이 필요해서, 인생이 칡 덩어리를 억지로 씹는 것처럼 쓰고 건조해서, 필터를 씌운 자시의 얼굴을 페이스북에나 찍어 올리는 아이 엄마와 잘 나가는 프리랜서 출판 기획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세연의 간극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상상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발산해내는 과도한 에너지에, 휴식 없는 생활에 지쳐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말을 길게 나누고 싶지도 않은 남자 페친들과 영혼 없는 웃음으로 범벅이 된 댓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남편 자랑을 하는 걸 비웃지 않고 맞장구를 쳐주고 있을 때, 새로 산 립스틱의 발색 샷을 여러 장 올리고 있을 때, 가장 한가운데에서 혼자일 시간도 없이 외롭다고 끄적이고 있을 때, 그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세연의 시선을 떠올린다. 하지만 자궁근종을 얻어 자신을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 하나 없는 상태에서 친구인 진경에게조차 연락을 하지 못하는 세연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혼자 사는 여자의 삶 그리고 진경에게는 당연히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는 없는 데에서 비롯된 구차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이해할 수 없을 걸, 그렇게 세연은 친구를 상상 속에서 속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68p
저기,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저는 아이를 가질 생각도 전혀 없고요. 제 삶에는 남자가 오래전부터 아예 없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건데요. 사실은 한달에 한 번 배란이 되고 생리를 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거든요. 저는, 적출한대도 아무 상관 없는데, 회복이 빠르다기에 빨리 일로 돌아가야 해서 하이푸 쪽을 선택한 건데요. 여자로서 삶이 망가진다는 무슨 말씀이세요. 세연은 정색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저곳 비교해본 결과 그 병원의 시술 비용이 제일 합리적이서 그냥 참고 넘겼다. / 75p


이 외에도 소설 속에는 불법영상촬영 피해자인 바람을 도와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껴 집회에 나간 지현, 일을 따내려고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들이댄다는 말이 돌자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간 윤슬, A교수의 추행 사실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쓴 뒤 보복을 당할까 두려움에 떠는 채이, 제자인 채이를 위해 A교수에게 보내는 격문을 써서 학생회관 벽에 붙였다가 ‘페미니스트 투사’가 된 대학 교수 경혜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러는 동안에 행동하고 분노하는 젊은 여성과 그런 젊은 여성을 철없다고 단정 짓는 늙은 여성의 대립이, 전업주부와 워킹맘이 서로를 견제하고 기혼녀와 비혼녀가 적대시하며 가치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상황이 흔하게 발생한다. 마치 여성들에게 꾸밈노동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미용업에 종사하는 자신의 직업정신에 자부심을 느끼는 지현의 그것처럼 여성들간의 연대는 불완전해 보인다.
아무튼 세상은 무서운 곳이니까 여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연은 어째선지 조금 마음이 편했는데, 그건 ‘여자’라는 말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블라우스 밑 가슴께에도 족쇄처럼 채워져 있어서, 숨이 막히는 게 자신뿐은 아니라는 생각, 간신히 다른 아이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126p
진경은 거울일 뿐이었다. 진경을 보며 진경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27년 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붕대를 들고 서 있던, 단지 완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엉거주춤 서 있던 어린 자신을, 세연은 한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도,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 142p
하지만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이잖아, 채이는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말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걸까? 의제 하나에 쌍둥이처럼 집회가 두 개씩, 그것도 동시에 열리는 게 너는 바람직해 보여? 나는 부조리해 보이는데. 언제까지나 저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을 하지? 우리는 서로의 대립항이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왜 중요하지 않아? / 146p


『붕대 감기』가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바 페미니즘으로 제기되는 여성들의 문제점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갈등을 유발하는 것인지 또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직시하고, 질문하고, 자책하며 자조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진짜’, ‘좋은’, ‘완전한’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저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고 ‘말하기’ 함으로써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둬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한다던 세연의 말처럼 말이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하다못해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친구들에게조차도 나는 꾸미고, 감추고, 덜 내어놓는다. 딱히 보여줄 것이 있다기보다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 더 두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붕대 감기』를 읽고 나서 그들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나의 상처를, 불안을, 모순을 더 감싸 안든 덜 감싸 안든 그래도 이야기 해보자고, 들어봐 주겠다고 “뭐해? 만나자” 말해주는 이들이 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