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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평점 :

이왕 먹는 나이, 체하지 않고 건강하게 먹어봅시다!
인생의 반환점을 맞은 50대, 나이 먹는 일에 대한 유쾌 발랄한 공감 에세이!
“이제 너희 애들이나 봐주면서 살아야지 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깊은 상실감과 공허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든 노모에, 그것도 꽤 오랫동안 치매를 앓아왔던 만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법도 한데 그래도 엄마는 떠난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로해보기 위해 “이제 엄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편하게 살아” 하고 말했다. 엄마는 그래야지, 하면서도 당장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와서 뭘 새로운 걸 해보겠느냐고, 너희 아이들이나 봐줘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목이 탁, 막혔다. 아이를 낳아보고 나서야 알게 된 가장 큰 사실 하나는 우리가 엄마의 시간을 갉아먹고 이만큼 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남은 시간마저 나와 내 아이들을 위해 갉아 먹히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 이제 엄마 시간을 살아. 그간 충분히 애써왔으니까.”
나는 내 아이들이 섭섭해 하지 않게 일찌감치 두고두고 선언할 것이다. 너희들을 돌보고 키우고 먹여야 하는 시간동안에는 엄마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할 거라고, 하지만 엄마의 시간이 너희들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엄마도, 너희들의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늙어갈 순 있지만 젊어갈 순 없다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가장 열심히, 꾸준히 한 일이 바로 나이 먹는 일이었다.’
아, 뭐 이리 찰떡같은 문장이 다 있나. 게다가 자신은 지금 갱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고백하는 책의 저자는 이렇게 심경을 토로한다. 남편, 애들과 한 팀으로 묶여 내 정신이 아닌 채로 살아왔지만, 이제라도 정신 좀 차리고 잘 살아 볼까 하니 나이 오십이더라고.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아이들이 다리에 감기던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내 다리로 어디든 갈 수가 있긴 한데 대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왔노라고 말이다. 평소 나 역시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을 다 키워내고 마침내 뭔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정작 나이 때문에 발목 잡혀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없을 때가 분명 찾아오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이 먹는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저자는 어른이 되는 일, 사는 일에 허기가 져서 그간 맛도 모르고 허겁지겁 집어먹기 바빴으니 이제라도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대체 뭔지 요모조모 뜯어보고 어떻게 먹어야 체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는 인생의 반환점과 제2의 사춘기라 불리는 갱년기의 한복판에 서서 ‘요즘 어른’이 겪는 리얼한 일상과 고민들을 담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극본을 쓴 방송작가 겸 소설가답게 솔직담백하면서 유쾌한 그녀의 입담에는 웃다가도 울컥하게 만들고 이내 끄덕끄덕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실려 있다.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걸 아시는지? ‘늙다’는 움직임과 과정이지만 ‘젊다’는 어떤 상태나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늙어갈’ 수는 있지만 ‘젊어갈’ 수는 없다니… 참 섭섭하다. / 10p
실제로 나이 들수록 피부 감각도 늙는다고 한다. 피부의 촉각을 담당하는 수용체의 숫자가 감소하고 신경 전달 속도가 느려지면서 노화를 겪는 것이다. 감각이 늙으면 통증을 느끼는 정도도, 온도를 느끼는 정도도 둔해진다.
피부 감각이 둔해지고 유방과 자궁이 긴장을 잃으면서 얻은 것은 평화다. 더 견딜 만하고 더 순조롭다. 첫째 낳을 때보다 둘째 낳을 때 고통이 덜한 것도 심리적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 22p
문득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제 서른일곱인 내 나이, 오십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면 아줌마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까 하고 말이다. 아줌마. 아무래도 그건 평생 받아들여지지 않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이다. 그나마 ‘애기 엄마’ 하고 불러주는 지금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여전히 ‘어머님, 아주머니, 저기요’와 같은 애매한 호칭 앞에서 마음이 들쑥날쑥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이렇듯 책에는 중년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공감할 법한 상황들이 등장한다.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아줌마들의 대화에 얽힌 속성들, 스마트폰이나 자동화된 시스템에 바로바로 적응하지 못해 난감해지는 순간들, 살던 대로 살게 되는 삶의 관성들 그리고 빈약한 근거로 나이만 믿고 꼰대짓을 하는 세대로 자연스레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그렇게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할 테지. 솔직히 이건 뭐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그저 받아들일 것은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모르는 건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억지로 애쓰려고 하지 않고 사는 수밖에.
아줌마들의 대화는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조용히 듣는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모두가 그 대화에 한꺼번에 참여해야 한다. 말을 거들어주는 조력자가 없으면 이야기 자체를 할 수가 없다. 모두가 적극적으로 머릿속의 물방울을 떠올리고 물방울을 건네주고 받고 해야 한다. 그러니 대화에 독점이 있을 수 없고 동시에 소외도 없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민주화가 이뤄진다. 남들이 듣기에는 아줌마들은 왜 저렇게 동시에 다 떠들고 있냐고, 참 시끄럽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줌마들의 대화는 평등하고 기회가 있고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말 그대로 인터랙티브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아줌마의 수다는 그래서 즐겁다. / 32p
나이가 들면, 한 50년쯤 살다 보면 어디서 주워들은 것도 많아진다. 이런 일 저런 일 겪기도 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당연히 경험도 많다. 원래 의견과 주장은 지식과 경험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은 매 사안에 의견과 주장을 가지기 쉽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거 옛날에 나도 다 해본 건데’ 하며 확신하는 것이다. / 63p



‘껌딱지처럼 들러붙을 때는 언제고 이젠 나를 껌종이 취급하다니.’ 사내 아이 둘을 키워낸 엄마로서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다. 애정으로 충만한 사이.’라고 단언하는 그녀의 말투가 나의 뼈에까지 새겨지는 듯하다. 나 역시 사내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엄마로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게 있다. 이 두 녀석들에게 엄청난 존재였던 시절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고 말이다.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자랑하려 뛰어오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엄마를 찾으며 울고,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은 엄마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고,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제일 맛있고, 엄마가 있어야 안정이 되던 그런 아들은 길어야 중학생이 되기 이전까지일 거라고. 곰살맞은 우리 아들은 안 그럴 거라는 믿음은 애당초 가지지 않는 게 뒤늦게 찾아올 상처에 크게 데이지 않는 방법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미리 이렇게 마음의 준비라도 해놓아야지. 아이의 사춘기와 나의 갱년기 사이에서 서로 할퀴지 않고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고심해보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면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나는 말하고 싶다. “모모야 제제야, 내게 와서 울어라. 내게 와서 한탄해라. 내게 와서 밖의 사람들 누구를 욕하고 화내라. 좋은 일은 실컷 좋아하고 잘한 일은 지치도록 자랑하고 으쓱대라. 그러라고 내가 있는 거란다.” / 131p


어떻게 먹어야 체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까
갱년기는 쇠락과 상실의 시기일까? 각종 사회적 의무와 양육의 부담, 여성성의 멍에를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와 독립의 시기는 아닐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확실한 것은 갱년기는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신체가 격변을 겪는 때라고. 그러니 사춘기처럼 예민하게 느끼고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왕성하게 배우고 무한히 감동하고 그러면서 훌쩍 자를 수도 있는 시기라고 말이다. 비록 폐경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와 무뎌진 신체 기능, 혹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의 건망증이 멘탈을 흔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영을 배우고, 귀를 뚫고, 친구 혹은 나혼자 만의 여행에 눈을 뜨고, 노년에 그림책 그리는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며 그림을 배운다. 체하지 않고 나이를 먹기 위해, 건강하게 먹음으로써 다채롭게 채워질 나의 새로운 시간을 위해.
나이 든 것이 확실하니 이제는 정말 해야 할 일, 그건 바로 ‘미룬 일’이다. 해야 하지만, 하고 싶지만 이제껏 미루었던 일을 ‘드디어’ 해야 한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왜냐면 미룰 시간이 없으니까. 미루고 미루었는데 또 미루다 보면 이번 생에서는 영영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아주 옛날부터 그러니까 몇 십 년 전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하지 못한 일. / 43p
나는 ‘나이 먹은 나’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이 먹은 내가 쓰는 글’에 대한 기대다. 숙련은 없을지라도 정년도 없으니까. 늙어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계속 쉬지 않고 써야 한다고 자신을 독려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 229p


어릴 때의 나는 막연히 나이가 들면 ‘아줌마가 되면 남들 다하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는 하지 않을 거야’, ‘편하다고 몸빼 바지 입지 않고 집에서도 우아하게 꾸미고 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독려하고 지지해주면서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기꺼이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자세임을 이 책을 통해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나이 먹고 급체하지 않기 위해, 가뿐하고 유쾌하게 나로 살 수 있는 방법들이란 무엇인지 지금부터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