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작가 리모의 손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북유럽의 풍경과 정취들!
북유럽과 드로잉 여행이 만나 더욱 특별해진 마법 같은 여행에세이!
신랑이 울상인 얼굴을 하고서 한숨을 토해낸다. 어찌된 영문인지 지난달에 다녀온 강원도 여행의 동영상이 죄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 거기에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순간과 새해 설산의 풍경이 담겨 있었는데. 마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두 사람은 허무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여행은 찰나와도 같아서 무엇으로든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무심코 흘러가버린다. 너무나 기억해야 할 것도, 기억하고 싶은 것도 많은 우리는 그래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
여행 드로잉 작가 리모의 책 『혼자, 천천히, 북유럽』에는 북유럽의 풍경이, 정취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페이지 곳곳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국의 거리 위에서, 대자연의 거대한 시간 앞에서, 낯선 이의 작은 미소와 사소한 눈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손끝으로 기록해둔 그의 여행은 유난히 더 특별해 보인다. 그의 펜 끝에서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의 이 새로운 순간과 마주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그래서 그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인 듯하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사진이었다면 무심코 흘려버렸을지도 모를 장면들까지도 그 생생함에, 섬세함에 집중하게 된다. 아주 특별한 여행을 그와 함께 한 것처럼.


부지런히 기록한 그해 여름은
그저 그런 일상에 큰 위로가 되었다.
『혼자, 천천히, 북유럽』의 리모 김현길 작가는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그리는 즐거움’을 알리기 위해 여행 드로잉을 강의하며 베테랑 여행 작가로 거듭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책은 그가 한 달 동안 북유럽의 대표 도시인 핀란드와 스웨덴, 노르웨이와 덴마크 등지를 돌아다니며 손끝으로 남긴 섬세한 기록들을 차분하게 쓰인 글과 함께 엮은 결과물이다. 여행을 하며 직접 보고 겪은 소소한 일상 같은 이야기에서부터 각 나라의 역사 혹은 문화에 얽힌 이야기까지.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했던 그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들은 아득하기만 했던 북유럽의 이미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여행 전과 여행 후에 인상이 달라지는 도시가 있다.” / 25p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으로 가득한 나라,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강력한 복지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며 국가청렴지수 또한 세계 Top3를 놓치지 않는 선진국,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운 점이 많은 나라 핀란드. 그 중에서도 수도 헬싱키 하면 세련되면서도 어쩐지 조금은 깐깐하고 새침할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헬싱키를 둘러보면서 상상한 것보다 훨씬 소박하고 따뜻한 곳이었다고 말한다. 어디든 깨끗한 거리와 주요 관광지인 데도 불구하고 각자의 일상을 찾아 저녁 6시에 문을 닫는 노점, 소박하지만 친근한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들. ‘런던이나 파리 같은 도시가 한껏 멋을 부린 귀부인이라면, 헬싱키는 꽃다발을 든 소녀의 순박한 웃음과 같았다’는 그의 표현이 참 어울리는 곳인 듯하다.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본 이들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헬싱키에는 영화의 실제 배경이 된 식당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은 촬영 이후에 핀란드인에게 인수되었고, 그 후 ‘카빌라 수오미’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한동안 운영되었다가 현재는 일본인이 인수하여 다시 ‘카모메 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영업 중이라고 한다. 작가는 영화 속 등장인물인 사치에의 흔적을 좇아 식당을 찾아간다. 빗속을 걸어 마침내 갈매기 한 마리가 그려진 파란 간판을 발견했지만 내부는 리모델링 되어 있어 영화 속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게다가 메뉴판에는 영화 속에 등장했던 오니기리도 보이지 않았고 현실의 카모메 식당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웠다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영화 속의 카모메 식당을 찾으러왔다가 적지 않게 실망을 안고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묘미이리라. 상상했던 것과는 다를 때 혹은 달라졌을 때 다가오는 실망감을 받아들이고 현실의 이미지를 다시 나에게 덧입히는 것, 그 또한 경험을 해봤을 때만 가능한 것일 테니까.
저 멀리 처음에 떠나왔던 헬싱키의 구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구름이 사라진 청명한 사늘 아래로 핑크빛 석양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몹시 차가웠지만, 갑판 위에서 헬싱키 도심의 뽀얀 풍경이 석양에 물드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황홀한 그 풍경은 마치 어린 소녀의 두 뺨에 발그레 피어난 홍조 같았다.
핀란드 사람들이 이해가 됐다. 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핀란드, 수오멘린나에서의 하루 편 중에서 48p
여행을 하면 하루의 목표는 단순해진다. 현지인에게 말 한마디를 거는 사고한 일에도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아닌 이곳의 낯선 음식을 먹는 것 그 자체가 하루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숨 가쁘게 다가오는 순간들에 집중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대한 염려는 잠시 설득력을 잃는다.
지금의 여정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너무 멀리 있는 시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실체가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여행은 어쩌면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 / 핀란드, 잘카사리의 백야 편 중에서 85p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유독 동상에 얽힌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까. 바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마주한 <아이언 보이>라는 미니 동상과 덴마크 코펜하겐 시청사 앞의 안데르센 동상, 게피온 분수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어공주 동상이다. 다소곳이 다리를 모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 높이가 14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몸집에서 어딘가 애잔함이 느껴지는 <아이언 보이>. 오래전 스톡홀름항 부둣가에는 선박의 짐을 나르며 연명하던 고아가 있었는데,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감라스탄의 차갑고 허름한 골목 어딘가에서 끝내 숨졌다고 한다. 이 청동상은 그처럼 안타깝게 스러져 간 부둣가의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 작가가 그린 그림의 필체 때문인지 자그마한 아이의 고단함과 쓸쓸함이 가슴에 더 크게 사무치는 듯하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의 생애치고는 너무나 외롭게 살아갔던 안데르센의 동상도, 가녀린 외모의 동상이 사회적 의견 표출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인어공주의 동상도 다르지 않다. 마치 우리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동상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검을 든 기사의 시선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용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 너머의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는 행위는 대상을 깊이 관찰하게 된다. 오랫동안 느슨히 바라보자 어느 순간 이해되는 것이 있었다. 성 조지의 어색한 시선은 눈 앞의 작은 승리에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의 시선은 어쩌면 더욱 멀리 뻗어 나갈 스웨덴의 미래에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 스웨덴, 성 조지와 용 편 중에서 137p
좀 더 멀리 시선을 옮기자 올레순을 둘러싼 산맥과 바다가 보였다. 서쪽으로부터 힘차게 뻗어 오던 산맥은 바다를 만나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고, 그 뒤에 아득하게 놓인 수평선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 서정적인 도시가 대화재로 인한 폐허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잿더미 위에 다시 피어난 아름다운 꽃. 떠나는 아쉬운 발걸음에서 올레순의 이미지는 그렇게 각인되었다. / 노르웨이, 아르누보의 도시 편 중에서 242p
이 동상은 잔인하게도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몸체에 비키니가 그려지거나 때로는 페인트 세례를 맞기도 했고, 팔이 절단되거나 머리가 잘린 채 도난당한 적도 수차례였다. 심지어 2003년에는 폭파 당해 동상이 바다로 추락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덴마크 정부는 굴하지 않고 인어공주를 매번 부활시켰다.
가녀린 외모의 동상이 사회적 의견 표출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수난의 역사를 알게 되자 동상의 움츠린 어깨와 아래로 떨어뜨린 시선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어쩌면 수년 후 코펜하겐을 다시 방문했을 때, 지금의 것이 아닌 새로운 동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동상이 다치질 않길 바라며, 지금의 인어공주를 잊지 않기 위해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 들었다. / 덴마크, 풍요의 여신과 비운의 공주 편 중에서 306p



수백 미터의 아찔한 절벽 위로 아슬하게 튀어나온 암반에서 홀로 서 있는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책을 펼치다가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켠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노르웨이 트레킹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트롤퉁가다. 북유럽여행의 원탑이라고 불린다던 바로 그곳이다. 빙하가 만든 짙고 푸른 호수와 장엄한 절벽 그리고 고원지대의 만년설이 함께 펼쳐져 있는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작가의 가슴은 얼마나 크게 방망이질 쳤을까. 트롤의 혓바닥이라는 이름답게 깎아지른 듯한 좁디좁은 암반 위에 단독자로 서본 사람이라면, 서기 전과 선 후의 나는 어쩐지 많이 달라져있을 것 같다. 아니, 잘 익은 소면처럼 다리가 흐늘거렸다던 그의 표현이야말로 웃음이 나지만 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암반 끝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포는 더욱 강렬해졌다. 평소에 고소공포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극한의 상황에 처해 보지 못해서였다. 좁디좁은 암반 위에서 잘익은 소면처럼 다리가 흐늘거렸다.
인생의 고비를 넘긴 후 트롤퉁가가 잘 보이는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가방에 넣어 두었던 점심을 꺼내 먹었다. 오랜 산행으로 다리는 무거웠지만, 기분 좋게 번져 오는 성취감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가방 속에서 펜과 물감을 꺼냈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이날의 기억은 그렇게 소중한 한 장의 기록이 되었다. / 노르웨이, 트롤의 혓바닥 편 중에서 269p

선 하나하나에 담긴 감각을 따라 그의 여행을 함께 쫓아가는 독서 여정은 사진보다 오히려 몰입도가 높아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굳이 다시 사진으로 찾아보는 수고로움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의 드로잉 자체를 즐기고 그 풍경을 마음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도 기꺼이 당신의 책을 찾아보겠노라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