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시하게만 느껴졌던 내 일상을 글로 쓰는 순간, 쓸 만한 삶이 되었다!
글로 쓰일 인생은 따로 있다고, 글 쓰는 재주는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권하고픈 ‘쓰는’ 삶의 즐거움!
“이런 것도 소설이라 할 수 있나?”
문예창작학과 선배들이 주도하는 글쓰기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나의 소설은 난사 수준의 총질을 당하고 말았다. 충격적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야금야금 팬픽을 쓰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나는 남들 공부하는 고3 때도 몰래 소설을 써 연재를 하고 마침내 연애소설이라는 장르의 책 두 권을 출간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와서 그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문예창작학과에 지원하기 위해 입학한 대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전공 수업이 시작도 되기 전에 학과 선배들을 알게 되었고, 글을 써봤다는 자부심에 덜컥 동아리 입회 첫 날에 소설을 써 발표했다가 소설 같지도 않은 걸 써왔다고 대차게 까인 것이다. 여긴, 그러니까 정통 문학을 하는 곳이지 장르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니었던 거다. 이때의 충격으로 나는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가 당신들 보다 더 잘 쓴다는 걸 증명해보이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독설로 수업 시간을 겨울왕국 급으로 만들어버리는 소설가이자 소설 창작 전공 교수님에게서 “너 글 좀 써 봤지?”와 같은 칭찬을 들으며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면 참 통쾌하고 지금쯤 번듯한 소설가라도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사실 나는 그 이후로 문학이라는 것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글을 쓰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쓸 수 있는 글이란 게 드라마 형식의 장르소설인데, 학교에서는 최대한 정통 문학에 가까운 소설을 써야한다고 배우고 있었으니, 이내 글은 정체성과 함께 힘을 잃어갔다. 그때부터 급격히 글을 쓰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 나는 졸업을 한 이후로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책이 좋아서 출판사를 다니고, 서점에서 근무하며 파는 일도 해보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마치 봉인이라도 한 것처럼 글쓰기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다 다시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보기 시작한 건, 첫째 아이를 낳고 3년이 지난 뒤였다. 육아 외에는 이렇다 할 취미도, 적당한 스트레스 해소법도 찾지 못하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우연히 한 출판사의 블로그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읽고 지원했다가 첫 시도 만에 덜컥 선정이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서평단은 소설책만 읽던 지독한 책편식가인 나를 다양한 장르의 책으로 인도해주었고, 특정 날짜까지 서평을 써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오히려 어떻게든 글을 쓰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작품을 쓰듯 잘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책을 읽고 난 뒤의 진솔한 감상과 견해를 쓰면 되었기에 부담을 덜고 나니 뜻밖에도 글을 쓰는 게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요즘 나의 남편은 언젠가 내가 다시 자신의 글을 쓸 수 있기를, 또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겠노라는 말을 곧잘 한다. 과연 내가 예전처럼 나의 글을 쓸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상상’하고 ‘창작’하는 즐거움으로 글을 쓰던 사람이라서, 지난 시절만큼 예민한 감수성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나이도 지났고 이렇다 할 글감이나 영감도 떠오르지 않다보니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쉬이 들지 않는 까닭이다. 이렇다 할 일이라곤 없이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고, 집안일만 하는 반복된 이 삶에 무슨 ‘쓸 만한 일’이 있을까 해서 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를 읽으면서 나와 같은 84년생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쭉 쓰는 일을 해왔지만 정작 자신의 글은 써본 적이 없던 저자 역시 이런 질문과 마주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운을 뗀다. “‘쓸 만한 삶’이 어떤 삶이 궁금해졌다. 어른이 된 지 1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답을 찾았다. 쓸 만한 삶이란 쓰는 삶이다”라고. 세상 어디에도 그냥 시시한 삶은 없다고, 그저 아직 쓰지 못한 삶이 있을 뿐이라고.


쓰는 순간, 나의 하루는 쓸 만한 삶이 된다
지난 해,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둘러보면 그 어느 해보다 에세이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나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에세이를 많이 읽은 해로 기억될 정도다. 그만큼 개인의 일상과 소소한 이야기로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뭐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하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들도 많지만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의 저자 역시 자신의 책을 통해 ‘시시한 일상도 써보면 새롭다’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른이 된 후로 꾸준히 자신에게 실망해온 사람, 세상에서 내 삶이 제일 시시해 보이는 사람, 글로 쓰일 삶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하루도 에세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상처를 이겨낼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내는 일이다. / 114p
그녀는 이제 ‘고민’과 ‘글쓰기’는 한 몸이라고 말한다. 요즘 많은 글쓰기 강좌에서도 ‘잘 쓰는 것’이 아닌 ‘잘 살기 위해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과제 역시 대부분 나의 고민과 상처를 드러내게 만드는 주제를 준다고 한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패했던 분야가 있지 마련이고, 또 그런 경험을 하고도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가치 있는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가감 없이 글로 옮겨보자고 제안한다. 누가 내 글을 읽겠어, 하고 단언하지 말기를.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될 테니 말이다.
책은 가족, 직장, 관계 속에서 경험했던 소소한 일상들을 다룬 23편의 에세이와 그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글쓰기 팁 23편이 번갈아 구성되어 있다. ‘힘 빼고 편안하게 쓰는 법’, ‘첫 문장에 쫄지 말 것’, ‘요약하는 글쓰기’, ‘초고는 밤에, 퇴고는 낮에’ 등 글쓰기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주려는 게 목적이 아닌, 처음으로 에세이를 써보고자 하는 이들을 독려하는 의미로 자신의 경험담에서 비롯된 팁을 알려준다. 덕분에 ‘이 정도라도 괜찮다면, 나도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한 번쯤 내 기록을 남겨보고 싶은 사람, 글재주를 타고나진 않았지만 어쨌든 쓰고 싶은 사람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작정 많이 읽고 쓰는 노력이 아니다. ‘내게 잘 맞는 글쓰기 방법’을 찾는 것이다.
- 나만 갖고 있는 글감
- 지치지 않고 꾸준히 쓰는 방법
- 내가 잘 쓸 수 있는 장르
내가 편안하게 쓸 수 있는 환경과 방식이 분명히 있다. / 26p
나는 글쓰기 초보자에게 ‘첫 문장’을 쓰느라 힘 빼지 말라고 권한다.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으면 첫 문장이 아무리 좋아도 잘 읽히지 않는다. 때문에 첫 문장을 고민할 에너지로 ‘이야기를 끝내는 경험’을 늘리라고 하고 싶다. 글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퇴고를 반복할수록 글은 반듯해지고, 문장은 쓰고 지우기를 반복할수록 빛난다. / 46p


도무지 특별한 일이 일어날 리 없는 이 평범한 일상에도 글감이랄 게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문득 그녀가 쓴 ‘친해지고 싶었어, 이 동네랑’ 편이 떠올랐다. “한겨울에 수영? 너 분명 하루 이틀 나가고 안 나간다!” 고 장담하던 남편의 말을 뒤로 하고, 그녀는 집과 5분 거리에 있는 수영장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평소 동네에 정을 붙이고 사는 일에 인색했던 그녀는 두 번째 전셋집으로 이사할 때는 꼭 먹고 자는 일 외에 다른 것을 해보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게 수영장 등록이 될 줄은 몰랐지만. 수영 첫날, 쭈뼛쭈뼛 등록한 반에서는 또래 여자의 오지랖 섞인 뜨거운 입김에 놀라고, 늘어난 수강생으로 인해 대기 시간도 길어져서 혼잡하기도 했지만, 샤워장에서 손녀뻘 되는 젊은 아가씨와 할머님이 나누는 대화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바로 그때, 그녀는 동네가 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신혼 생활을 했던 집을 떠나 맞은편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참 정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워낙 상가가 많은 골목이라 뜨내기 손님들도 많고, 집 주차장에 상가 손님들이 주차를 해서 실랑이를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라, 괜히 여기로 이사를 했나 이내 후회가 들 지경이었다. 아마도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끝내 이곳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네 산책을 좋아하는 첫째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 어느 새부턴가 인근 상가를 비롯해 노점상 할머니들까지 죄다 알아보고 꼭 한 마디씩을 건네주셨다. 요구르트 판매원인 이모님은 저 멀리서도 아이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과일 가게 할아버지는 꼭 귤 하나씩 쥐어주셨으며, 손에 우유를 쥐고 걸어가기만 해도 노점상 할머니들은 부러 아까운 비닐 봉투를 꺼내 넣어가라고 챙겨주시기도 하셨다. 덕분에 나는 동네를 나가기만 해도 인사를 나눌 사람이 생겼고, 안부를 건넬 어르신들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주말, 둘째 아이가 잠든 사이에 첫째 아이가 사달라던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부랴부랴 편의점에 나섰다가 일요일인데도 나와 장사를 하고 계시던 할머니와 마주치고 새해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어쩐지 아쉬워서 아이의 아이스크림을 계산하면서 따뜻하게 데워진 두유 한 병도 함께 사서 할머니께 건네 드렸다. 그때 민망해하면서도 연신 고마워하는 어르신의 얼굴을 보며 아, 이런 게 동네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정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간 우리 아이에게 건네주셨던 다정한 눈길과 한 마디에 대한 감사한 마음에 비하면 참 약소한 것이지만 말이다.
머지않아 ‘정착’이란 명사는 한 곳에 견고하게 머문 시간이 아닌 내 삶이 오간 모든 장소를 떠올릴 때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 55p
단점을 찾아내려는 시선을 유지하면 자칫 부정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될 만한 요소를 예민하게 느낀다는 점에서, 변화를 만드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그럴듯한 문장을 나열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가치를 깨닫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완벽한 문장이 아닌데도 사랑받는 글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가 깃든 경우가 많다. / 57p
에세이는 작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르다. 화려한 문장으로 자신을 감추는 것보다 깨닫고 변화되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편이 더 매력적이다. 일기가 아닌 ‘읽히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드러내야 한다. 진짜 나를.
글을 쓸 때는 내가 갇혀 있는 <트루먼 쇼> 속 세상에서 벗어나 하루 동안 진실만 떠들게 되는 <라이어 라이어>의 짐 캐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나’에 대해 진솔하게 써보자. 별 볼 일 없게 느껴지는 시시한 일상도 일단 그대로 옮겨보자. / 69p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내가 읽은 책을 소개하고 서평을 공유하다보면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쓴 글은 얄팍하고 초라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늘 내가 쓴 글이 초라해 보인다고 내일부턴 쓰지 않겠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완벽한 글이 아니어도, 하필 천재가 쓴 글이 내 글 옆에 있어도, 씩씩하게 쓰고 공유하자고 독려한다. 재능을 예단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모른다고, 꾸준히 쓰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이다. 그래, 뭐든 꾸준히 하는 사람에게는 이길 수 없다지 않는가. 글도 마찬가지다. 일기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에세이가 되었든 짤막한 한 줄의 글이 되었든 꾸준히 쓰는 게 중요한 거다. 나도 이렇게 뭐라도 쓰다보면 언젠가 진짜 내 글을 쓰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그날을 위해 많이 연습해두자고, 그렇게 나를 응원하며 오늘도 열심히 읽고 써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