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노래처럼, 곱게
갈린 커피의 은은한 향기처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느라 수고한 당신을 위한
스탠딩에그의 따뜻한 커피에세이!
사각사각(엄밀히 생각하면 서걱서걱, 혹은 드르륵드르륵에 가깝다).
칼리타 핸드밀에 원두를 넣고 곱게 갈릴 때 나는 소리가 참 좋다. 아니, 밀봉이 되어 있던 갓 볶은 원두를 꺼낼 때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고소한 원두향을 맡은 순간부터 이미 나는 매료된 상태다. 드리퍼에 알맞게 간 원두를 넣고 이제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정성을 들여 물을
내릴 때, 나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어가며 경건해지는 그 마음까지도. 한때는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왕창 부어 꿀물처럼 마신다고 놀림을 받던
흑역사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섬세하고도 정교한 커피 맛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마도 카페에서 커피 만드는 법을 배우고부터였을 것이다.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인테리어를 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카페를 찾아다닌 것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에 커피로 인해 기억되는
추억도 생기고, 커피를 마셨던 공간으로 인해 기억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고작 한 잔의 마실 것에 불과한데, 커피는 내게 가장 달콤한 여유와
안정을 주었다. 한 뼘 크기의 믹스 커피에서부터 풍성한 우유 거품으로 만든 라테에 이르기까지,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에 따라 다른 커피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 하루도 매일 특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에 나는 커피가, 아직도 마시고 싶은 커피가 많아서 더 좋다.



The Best
Coffee is The Coffee You Like.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가 최고의
커피입니다.
왠지 책을 펼치면 아몬드 계열의 원두향이 맡아질 것만 같은 아담한 책 한 권을 만났다. 평소 「오래된 노래」와 「여름밤에 우린」란
노래를 좋아해서 내 플레이리스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뮤지션, 스탠딩에그의 에세이다. 게다가 커피에세이라니.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스탠딩에그의
멤버 에그2호님이 망원동에서 ‘모티프 커피바’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의 음악적 색채만큼이나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커피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도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적어도 매일 수십 잔의 커피를 만들어보고, 맛과 향의 미묘한 차이를 혀끝의 감각과 코끝의 감각으로
느끼며, 그 한 잔을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들의 얼굴을 수도 없이 마주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서, 우연히 뛰어
들어간 카페에서, 뒷골목의 카페에서 만난 바리스타와 나눈 “I like it"이라는 한마디에서 일상의 바이브를 느끼고 그만의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쓴 여러 에피소드들이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커피가 우리의 무미건조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내일을 다시 기대하도록 만들게
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것을, 물과 에스프레소가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라는 그 깨달음에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엔 여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오랜 시간 여전할 때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어느 날 우리로부터 그 여전한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버리곤
한다...(중략)...이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삶이 우리에게 야박한 탓이다. 그래서 이 삶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나는 오늘
연희동 길을 걷고, 매뉴팩트 커피로 가기 위해 16개의 작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오늘도 이 안에 가득한
‘여전함’들에 한 번 더 안도한다. / 28p
실제로 매일 수십 잔의 커피를 만들다 보면 똑같은 원두, 똑같은 방식이라 하더라도 매번 그 맛이
미묘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그렇다. 만약 당신이 어느 날 평생 잊지 못할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
또한 그날의 커피와 똑같은 커피를 다시는 마실 수 없단 이야기다. 그러니 맛있는 커피를 대할 때면 천천히 한 모금씩 입에 머금을 때마다 그
순간에 흐르는 음악과 주변의 공기, 빛과 온도, 앞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기억하기 위해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근사한 순간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 60p


나를 비롯한 우리 대부분은 언젠가부터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은밀히 동경하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누군가가 올린
근사한 커피 한 잔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인생 커피라고 추켜세우는 해시태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거기다 시선을 압도하는 멋진
인테리어까지 겸비한 카페라면 당장 우리의 주말을 그곳에서 채워갈 생각으로 마음이 앞서가기도 한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커피를 마시러 가는 건지,
SNS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에그2호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몇 년 전 라이프스타일이 근사해 보여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하던 A씨가 올린
한 장의 사진-그의 손에 들린 투명한 플라스틱 컵, 그 컵에 인쇄된 하늘색 병 모양의 로고와 블루보틀이라는 감각적인 네이밍, 자신의 ‘인생
커피’라는 A의 코멘트, 그리고 수천 개의 ‘좋아요’-에 압도되어 그 순간 이미 뉴올리언즈를 내 인생 커피로 삼아버렸다고 고백한다(이 말에 아직
블루보틀을 접해보지 않은 나는 뉴올리언즈를 검색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뒷골목에 자리한 작은 카페의 창문 앞에 멈춰 서서
‘인생 커피’라는 단어의 무분별함에서 오는 피로감과 그 말미에 밀려오는 ‘인생이란 단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간 유명 카페에서 인증 샷에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의 안식처처럼 찾곤 했던
작은 뒷골목의 어느 카페가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참 오랜만에 그곳을 떠올렸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조만간 그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모금 입안에 넣자 몽글몽글한 느낌이 적절한 온도로 퍼지고, 혀 깊은 곳부터 잘 익은 포도의 달콤함이
진하게 와닿더니 이어서 화사한 ‘보라색’이 한가득 확 퍼졌다. (그래, 라벤더의 향이다.) 따뜻한 커피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면 마지막엔
지나간 달콤함과 함께 삽싸름하고도 화한 허브의 느낌이 입안에 남는다. 깔끔한 피니시였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넣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게이샤를 느끼기 위해 모든 신경을 내 입안에 집중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가는 라벤더 향을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
53p
나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근사한 노래 제목을 적은 메모지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오, 그런데 그 미지근한 커피 맛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카페 내부에 흐르는 음악들-캐러멜 시럽보다
달곰쌈쌀하면서 우유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악,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풍미를 지닌 솔 뮤직-에 진즉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커피 맛을 이런
식으로 평가해도 되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저는 커피 맛을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요.” / 80p
책을 읽다보면 그가 런던에서 마신 플랫화이트를, 도쿄에서 마신 게이샤를 한 모금 마셔보고 싶어진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LP의
아날로그 사운드가 평범한 아메리카노마저 특별하게 만드는 베드포드 애비뉴의 “파이브 리브스”도 가보고 싶어진다. 언제든 스스로 커피를 만들어 마실
수 있는 바리스타들이 일부러 ‘돈을 내서 마시고 싶다던’ 아이스 큐브 라테 맛집 연남동의 “도깨비 커피집”에도. 카페를 연 지 2년 만에 찾아온
커피의 권태감을 잊게 해줬다던 롯폰기의 블랙 커피마저도. 블랙 커피는 분명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그가 보았던 오래된 두 친구의 연주를
나도 볼 수만 있다면 쓴 커피도 어쩐지 달게만 느껴질 것 같다.
“1분만 더 있다가 드세요.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에 섞는 거잖아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물과 에스프레소는 서로 다른 성분이라서, 서로에게 완벽히 섞이고 녹아들 시간이 필요해요. 그제야 진짜 아메리카노가 되죠.” / 138p
나는 오랜만에 가정용 커피 메이커로 내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모금의 커피가 가슴을 타고 내려가 몸 안에 온기가 퍼질 즈음, 커피에 대한 애정이 다시 서서히 살아나 있음을 느꼈다.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말이다.
‘그래, 좀 더 편안하게 대해야겠다. 오래된 친구를 곁에 두듯이.’
커피를 나의 10년 지기 친구라고 한다면, 내가 그에게 처음 같은 열정을 지니는 것도, 그에게 여전히
새롭고 특별한 매력을 기대하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일 테니 말이다. / 187p
‘만약 정말로 사랑이 그저 뇌에 전달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나의 진심이라 믿고 사랑하고 싶다.’
커피에 대한 내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커피 맛이 단지 어떤 성분과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실험실에 갇혀서 눈을 가린 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디선가 좋은
음악이 흐를 때, 올해 첫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때…….
똑같은 커피도 분명 훨씬 맛있게 느껴지니까. / 206p



두 해 전 여름, 카페에서 직접 핸드 드립으로 내려 마셨던 코스타리카 한 잔이 무척이나 좋아서 아직까지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문득 책을 읽는 내내 그 커피가 다시 생각나서 오랜만에 핸드드립 도구들을 꺼내보았다. 아,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원두가 신선하지 않아 단번에
인상이 윽, 하고 찌푸려졌다. 두 아이를 키우며 핸드드립은 어쩐지 사치 같아서, 원두를 일일이 가는 것이 번거로워서 믹스 커피나 편의점 커피만
마시느라 사놓았던 원두를 죄다 방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이면 원두를 사러 가야할 것 같다. 커피 한 잔으로 기억될 나의 멋진
하루를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