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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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미술을 어려워했던 감상자를 위한 가장 쉽고, 즐거운 감상 방법!

다른 사람의 감상평과 편견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감각으로 명화를 마주하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명화 감상 교구가 있어 최근에 아이와 함께 매일 한 장씩 감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등의 작품을 보며 그저 이 그림이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지 등에 관해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선입견을 가지고 그림을 바라보기 쉬운 어른들과 달리, 아이의 눈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미지들이 포착되어 그림에서 말하지 않는 상상의 이야기까지 곁들어져 나오곤 하는데, 그것이 나로서는 무척 신기한 일이다. 아이가 말하는 것이 실제 그림에서 의도한 바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감상법을 오롯이 이야기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감상하는 좋은 접근법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는 반면, 나는 일단 작가의 의도와 생각을 꿰뚫어보는 데만 몰두하느라 그림이 어떤 분위기를 띄고, 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림 자체를 즐기기 보다는 경직된 상태로 명화를 대할 때가 많다. 혹은 해설사의 설명이나 다른 감상자의 감상평에 의지해 내 생각이 아닌 타인의 생각에서 작품을 들여다보기 일쑤다. 왠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알아야 할 것 같고,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작품을 보면 제대로 된 관람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미리 보고 익힌 탓에 정작 ‘진짜’ 관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얻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이를 경계하듯 『혼자 보는 미술관』은 누군가의 지식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명화를 감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독려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으로 고전 미술을 대하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상태’를 의미하는 ‘TABULA RASA(타불라 라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풍성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미술 작품을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시선으로 작품 바라보기

 

  이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언어로 무슨 말을 하는가? 먼 옛날에 그려진 그 작품이 어떻게 우리 삶과 관련이 있을까? 이 그림이 21세기에 사는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혼자 보는 미술관』의 저자는 고전 작품을 보며 이러한 질문들을 걸어봄으로써 현재의 시점에서 고전을 해석해보고, 의문을 던지고 평가하고 캐물으면서 논쟁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작품이라도 비평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작품이든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나만의 감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때, 명작은 탁월하게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앞서 언급했듯 ‘TABULA RASA’를 통해 아무 선입견 없이 이리저리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하려 한다.

 

 

 

   T. A. B. U. L. A. R. A. S. A. 는 작품 감상 방법의 각 단계를 나타내는 약자다. 앞의 여섯 단계는 이미지를 읽는 데서 시작해 이해하고 평가하기까지 우리의 무의식 과정과 비슷하다. 시간(Time), 관계(Association), 배경(Background), 이해하기(Understand), 다시 보기(Look Again), 평가하기(Assess)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다음 단계인 리듬(Rhythm), 비유(Allegory), 구도(Structure)와 분위기(Atomsphere)를 적용하는 방법이다. 책에서는 단계마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작품을 사례로 들어 이 방법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데, 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하나의 작품으로 다양하게 들여다보고 느낄 수 있는 방법들을 체득하게 된다.

 

 

 

그 그림의 배경을 전혀 모르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몇 분 동안 그 작품을 다시 보면서 질문을 반복하지만 계속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때는 작품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단계는 여러 단계 중 하나일 뿐이고, 미술 감상은 어떤 명확한 결론을 내리자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숙해 보이는 작품도 결코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평가하기 어렵다면 좀 더 알아볼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만 결정하자. 이게 마지막 기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운 고전 미술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콕 집어 알려주는 조언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고전 미술 작품은 지금과는 너무 다른 관습, 취향, 규범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눈에 정말 낯설 수밖에 없다. / 40p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 않고 감각과 감정을 담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따뜻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불어 예술은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느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터너는 시각을 바꾸어서 세상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반응, 측정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반응을 제시하는 게 화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J. M. W. 터너, <노엄 성, 해돋이> 중에서 60p

 

 

 

 

 

 

   이렇게 ‘타불라 라사’를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고전 미술을 감상하는 법을 익혔다면, 본문에서는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이를 감상하고, 그 속의 숨은 이야기 혹은 현재의 시선에서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1장 ‘사유는 붓을 타고’에서는 내밀한 욕망, 공포, 형이상학적인 마음의 작용을 그림 속의 인물, 장소, 상황으로 바꾸어 표현했던 철학자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본다. 우리는 성 요한이 폐허의 풍경 속에서 생애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담긴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과 풍경>,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뒤러의 자화상이자 역설적으로 고된 일상을 버텨내는 예술의 힘을 엿볼 수 있는 <멜랑콜리아 Ⅰ> 등의 작품과 아울러 수르바란의 그림을 통해 철학적인 그림은 한 가지 학설이나 한 가지 주장만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과 모호함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장에서는 지나간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이 어떻게 수백 년 후까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살펴본다. 개인적으로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파리 거리; 비오는 날>이 특히 인상적인데, 평범한 거리를 반사하는 빛과 마술적 리얼리즘이 만나는 구도가 시선을 끈다. 또 피터르 드 호흐의 <아이 머리에서 이를 잡는 어머니>는 매우 일상적인 그림이지만 방이라는 공간 속 특유의 고요함 속에서 정물처럼 표현한 인물을 통해 다정다감하면서 경건한 여성성을 표현해낸 점도 기억에 남는다.

 

 

 

서론에 나오는 또 다른 A(Allegory)를 활용하면 상징적인 의미와 어려운 은유가 가득할 때 그림 속의 가장 사소한 물건들까지 이해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번 의미를 찾아내고 나면 별것 아닌 단서들로 작품 속에 숨겨진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하는 바니타스에서 이름을 따와 ‘바니타스 정물화’로 알려진 회화의 경우 특히 그렇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허무함, 재물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클라스의 <해골과 깃펜이 있는 정물>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니타스 정물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속이 빈 해골부터 뒤집힌 유리잔, 말라가는 잉크, 방금 꺼진 양초까지 모든 사물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피터르 클라스 <해골과 깃펜이 있는 정물> 중에서 80p

 

 

이런 상징들은 그림에 깊고 복잡한 생각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수르바란은 죽음을 당하는 양을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예수라고 해석하거나 우리 존재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정물화로만 그린 게 아니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유대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상징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정말 철학적인 그림은 한 가지 학설이나 한 가지 주장만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해설할 수 있는 가능성과 모호함을 품고 있다. 어두운 배경은 죽음, 하얀 양털은 삶을 암시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감상할 때의 성향과 기분에 따라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가 바뀔 수 있다.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하나님의 어린 양> 중에서 85p

 

 

그저 과거의 삶을 경직된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다기보다 2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의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안긴다. 이런 식으로 보는 이의 공감을 얻는 게 아마 화가로서 최고의 목표일 것이다. 꼼꼼하게 관찰해서 똑같이 그리는 솜씨보다 보편적으로 공감이 가능하거나 개별적으로 가질 수 있는 공감을 만들어내는 표현 능력이 더 중요하다. 위대한 작가가 그 시대의 지혜에서 정수를 뽑아내듯 위대한 화가는 단순한 모방을 뛰어넘어 대상으로부터 진실을 끄집어낸다. / 이시도라 매스터 작품으로 추정, <여성의 미라 초상화> 중에서 116p

 

 

 

   3장과 4장에서는 캔버스가 화가들이 상상한 연극, 개인의 심리나 비극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 무대가 된 작품들과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의 위대한 원칙 안에서 균형감, 우아함, 순수함과 정교함을 갖추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여기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이나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와 같이 바로 드러나는 아름다움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미묘한, 더 수준 높은 형태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둔 작품들이 유독 인상적이다. 반면, 5장에서는 놀랍고 충격적인 장면을 그려내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잔인하고 자극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소개된다. 이 장에서 우리는 홀바인과 만테냐의 섬뜩하리만치 섬세하고 실감 나는 죽은 예수의 모습을 목도하고, 악마와 마주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또 다른 의미에서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역설을 마주하기도 한다.

 

 

 

젠틸레스키는 침착하고 단호하면서도 무자비하게 남성을 죽이는 여성들로 화면을 채우고,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 역할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남자의 몸, 말하자면 남성 위주의 미술사에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하고 있다. /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중에서 125p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이 서사시 같은 그림은 끊임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현재에 관한 경고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이 그림은 지질학적으로 충적세인 지금 세상에서 인류세라는 잠정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인류세는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기후가 생태계가 급격하게 바뀌면서 시작되는 새로운 지질시대로, 우리 모두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콜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보복을 당한 다음에 올 시대를 경계하라고, 그 거대한 흐름에서 인간은 제대로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 토머스 콜 <제국의 과정: 파괴> 중에서 140p

 

 

이 그림에는 한눈에 보이는 장면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 자리에 올랐던 해에 그로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 달리 보인다. 나폴레옹에 관한 흉흉한 소문을 부인하면서 그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이 부대를 버리거나 프랑스에 데리고 오지 않는 대신 치사량의 아편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단 사실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공포가 공포를 불러들이는 것 같다. / 앙투안 장 그로, <자파의 흑사병 환자를 찾아간 나폴레옹> 중에서 181p

 

 

 

 

 

 

   다음으로 역설과 모순을 통해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하모니를 엮어낸 화가들의 작품을 담은 6장과 진지하게 건네는 농담과 풍자를 통해 그림은 왜 재미있거나 우스꽝스러우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되는 7장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드디어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장 앙투안 바토 <피에로>라는 작품이다. 사실 인물 주변의 배경을 보지 않았다면 광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유령처럼 하얀 의상을 입고 똑바로 서 있는 어릿광대는 어쩐지 외롭고 불안해 보인다. 자신의 역할을 해내기가 버거워 보이기도 하고, 우리 앞에 서 있으려니 창피한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바토가 짧은 생애를 비극적으로 끝내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이 작품을 은유적인 의미가 담긴 자신의 자화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힘없고 불편해 보이는 이 피에로는 가장 쾌활해 보이는 광대라도 웃음 뒤엔 슬픔과 몸부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끝으로 8장에서는 당시의 기준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들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많은 화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그렸다면, 세상을 독특하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묘사하면서 현대 미술로 나가는 길을 연 화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전 미술의 선배 작가들이 1800년대 이전까지 개척하고 가르쳐온 모든 관습을 거부하면서 해체하고 단순화하거나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대부분이 일생을 조롱당하고 비판받으며 궁핍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들로 인해 무엇을 예술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영역이 점점 더 넓어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혼자 보는 미술관』은 고전 미술의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자 쓰인 예술서로, 풍부한 작품 수록과 그리 어렵지 않은 설명으로 고전 미술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흔적이 엿보이는 책이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이론이나 지금은 알 수 없는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개인의 사고방식과 같은 복잡한 정보로 작품에 거리감을 느끼고, 현 시대와 동떨어진 존재로 느끼거나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탁월한 천재가 창조’했다는 이유로 고전 작품을 어려워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느긋이 작품을 느끼고 그 안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익혀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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