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세를 받아야 하는
남자, 집을 구해야 하는 여자. 이 기묘한 동거, 괜찮은 걸까?
이 겨울, 단단했던 마음을 두드려줄 따뜻하고 유쾌한
로맨스 소설!
티피의 페이스북으로 충격적인 메시지가 한 통 날아든다.
‘나는 널 내 집에 살게 해주고 있잖아? 네가 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주면 좋겠어. 우리가 헤어진 게 너한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네가 아직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안다고. 하지만 네가 계속 이 집에 있을 생각이라면, 규칙을 좀 세워보자. 이제 지난 몇 달간의 집세를
내줘야겠어. 앞으로의 집세도 전액 지불해주기를 바라. 패트리샤가 그러는데, 네가 나를 이용해먹고 있대. 공짜나 다름없이 내 집에서 살고 있지
않느냐고.’
연인이었던 저스틴이 어느 날 갑자기 패트리샤라는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더니 지난 몇 달간의 집세와 함께 집을 나가던지, 계속 있을
생각이라면 앞으로는 집세를 전액 지불하라며 결정을 내리라고 한다. 그간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기는 했어도 저스틴의 아파트에 계속 있는 한,
관계가 끝나는 일은 없었기에 티피로서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결국 그녀는 친구인 거티와 모와 함께 부동산 중개업자가 소개해주는 집을
돌아다녀보지만, 런던에서 월 400파운드 이하의 조건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한 셰어하우스 광고가
그녀의 눈길을 끈다. 호스피스 병원 간호사라고 자신의 직업을 밝히며 야간과 주말에는 집에 없으니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조건의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 달에 350파운드라니! 친구들은 L. 투메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남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를 반대하지만 그녀는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이 근사한 조건에 이미 끌리고 만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리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리치를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자 여자 친구인
케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셰어하우스 광고를 낼 수밖에 없었다. 케이는 티피가 여자라는 사실에 결코 탐탁지 않았지만, 리언을 대신해 그녀를 만난
후 마지못해 남자 친구와 이 낯선 여자가 한 침대를 공유하는 것을 수락한다. 이때부터 서로 얼굴도 모르는 리언과 티피의 특별한 시간차 동거가
시작된다. 라바 램프에 총천연색의 담요며 무시무시한 잡동사니 더미로 가득한 티피의 물건들이 리언으로서는 영 못마땅하긴 하지만 항상 맛좋은 요리를
해놓고, 다소 수다스럽긴 해도 그녀가 곳곳에 남겨놓은 포스트 잇 메모지를 확인하고 답장하는 일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 비록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지만 그렇게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의 취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하나의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공유한다.
그가 계란을 어떤 식으로 부쳐 먹는 걸 좋아하는지 나는 정확히 안다. 비록 먹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노른자가 흥건히 남아 있는 접시를 늘 본다. 거실의 빨래 건조대에 걸린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옷 입는 취향을
퍽 정확하게 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점은 그의 냄새를 안다는 것이었다. / 109p



그러던 어느 날, 티피가 리언의 동생 리치로부터 걸려온 집 전화를 우연히 받으면서 그가 감옥에 가게 된 억울한 사연을 듣게 되고, 이를
친구이자 변호사인 거티에게 소개해줌으로써 티피와 리언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또 출판사의 책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는 티피가 출간
예정작인 캐서린의 코 바늘뜨기 행사를 리언의 병원에서 하게 되면서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리언을 만나 적극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티피와 달리, 리언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은 크지만 어쩐지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 숨어 다니기만 한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만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은 기분,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고 원래 우리가 살던 방식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기분이 든 것이다. 이렇듯 만날 듯 만나지지 않고 엇갈리기만 하는 두 사람,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이렇듯 베스 올리리의 『셰어하우스』는 월세를 받아야만 하는 남자와 당장 집을 구해야만 하는 여자가 한 침대를 셰어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다. 타인과의 관계 앞에서 늘 절제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보이지만 주말까지 반납할 정도로 죽어가고 있는 프라이어 씨의 옛 남자 친구를
찾아주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리언과 183센티미터라는 장신의 키가 콤플렉스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꾸밀 줄 알고,
적극적으로 타인을 돕고 배려할 줄 아는 티피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 소설이다. 비록 옛 연인인 저스틴이 이들 사이에서
훼방을 놓으면서 오해와 상처를 얻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보듬으면서 이를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극복해나가는 모습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인다.
“내 말 믿어요?”
“난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걸요. 내가 믿고 말고가 왜 중요해요?”
“모르겠어요. 그냥…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당신을 믿을 수 있으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도 모르고 믿는다고 말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114p
프라이어 씨_ 조언 하나 해도 될까, 리언?
고개를 끄덕인다.
프라이어 씨_ 타고난 자네의 성격… 그 절제하는 성격 때문에 망설여서는 안 돼. 그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확실히 해야 한다고. 어쨌거나 자네는 닫힌 책이잖나.
나_ 닫힌 책이요?
침대 시트를 매만지는 프라이어 씨의 손이 떨리고 있다. 차트에 적힌 예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프라이어 씨_ 조용하고, 침울하지. 그녀는 분명 자네의 그런 점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자네의 그런 점이 두 사람 사이의 벽이 되게 해서는 안 돼. 나는 말하는 걸 너무 오래 미뤄- 이런저런 걸 너무 늦게까지 방치했지.
이제는 할 수 있었을 때 내가 원하는 걸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내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젊을 때는 시간을 말도 안 되게 많이 낭비해버리곤 하니까. / 378p


여기까지 보면 자칫 가벼운 로맨스라 생각하기 쉽지만, 소설은 일상을 마음대로 침범하고 연인을 향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는 저스틴의
행동을 통해 ‘가스라이팅’ 즉 일종의 심리 조종자로서 정신적 학대의 그늘을 들여다본다. 가스라이팅이란, 가해자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무력화시킨 후, 지배력을 행사하고 피해자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 수법이다. 이는 티피가 새로운 남자와
친밀한 관계에 놓일 때마다 번번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로막히는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티피는 뒤늦게야 자신이 저스틴으로부터 데이트 폭력
즉, 각종 통제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소설은 이를 심리 상담과 주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독자로서 이 대목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잘못된 관계인데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 의심해보지 않음으로써 계속해서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는 점이었다. 항상 나쁜 남자에게 이끌려 구제불능의 상황에 놓였던 리언의 엄마처럼 말이다.
좋다. 흔치 않은 일이고, 좋은 일이다. 엄마에게는 늘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생기면 늘 같이
살았다. 누구를 만나든. 엄마는 꼭 리치가 경멸하고 나도 꼴 보기 싫어하는 부류하고만 엮였다. 엄마의 남자 취향은 구제불능이었다. 항상 나쁜
남자에게 이끌려 안 좋은 길로 샜다. 백 번도 넘게 한결같이. / 184p

이렇게 『셰어하우스』는 낯선 남자와 같은 침대를 공유해야 하는 독특한 설정을 비롯하여 잘못된 관계의 상처를 극복하고 마침내 두 남녀가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셰어하우스라는 소재와 간결하고도 통통 튀는 대사, 무엇보다 개성
넘치는 다양한 인물들은 지금 당장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을 마주 안아주고 싶게 만들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또 자칫 예민할 수 있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이슈를 적절하게 로맨스 속에 녹여냄으로써 읽는 재미와 생각할 거리까지 마련한 꽤 괜찮은 로맨스 소설인 듯하다. 다가올 겨울에
이불 속에 들어가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읽기에 더 없이 좋아 이 소설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