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당대 최고 화가의 삶과 작품을 만나는 지적 유희의 시간!

이 책을 읽고 나면 작품을 보는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작품을 읽는 눈은 없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은 좋아서 나는 미술관을 자주 찾는다. 특별한 기술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주로 작품에서 드러나는 정서적인 감각을 감상하는 것에 의지하는 편이다. 그러다 팸플릿이나 해설사를 통해 작가의 내력이나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읽거나, 그저 감상만 했을 때에는 알 수 없는 뒷이야기까지 듣게 되면 작품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종종 지역 작가 위주의 작품 전시라던지 다양한 전시를 다루지 못하는 지역적 한계가 아쉬울 때면 월간 잡지나 미술 에세이를 찾기도 한다. 특히 미술 에세이는 국내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유명 작품에, 방대한 미술사를 비롯하여 해당 작품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관점과 저자의 사적인 감상까지 읽을 수 있다는 좋은 장점이 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 줄리언 반스가 이번에는 미술 에세이로 돌아온 것이다. 이쯤 되면 앞서 발표한 뛰어난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 『시대의 소음』과 요리를 주제로 한 에세이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를 떠올려보았을 때, 대체 그가 다루지 못할 영역이란 무엇인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게다가 전작에서 시대를 통찰하고 예술가의 내적 내레이션을 자신만의 지적 감수성으로 치열하게 담아낸 그라면, 이 미술 에세이 역시 여타의 미술 에세이와는 다른 수준의 정교함을 선보일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과연,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색다른 주제와 기법을 차용하는 소설가답게 화가에 따라 다른 형식의 글과 독창적인 해석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제 우리는 그가 선보이는 17편의 큐레이션을 관람하며 그저 황홀해질 준비만 하면 된다.

 

 

 

 

 

 

미술은 새롭게 하고자 하는 욕구와 과거와의 부단한 대화다

 

 

   줄리언 반스는 제리코에서 하워드 호지킨에 이르기까지, 미술이 어떻게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렀는지를 17편의 이야기에 걸쳐 안내한다. 그는 미술사학자도 아니고, 미술 전공자도 아니지만 유년 시절부터 쌓아온 미술을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품 너머의 세계까지 치열하게 몰두한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림 한 점으로 이렇게까지 상세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없었으리라. 이를 테면 예술가의 사생활이란 다소 사소해보이지만 작품의 탄생 배경과 이해를 돕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가 되어줄 것이며, 미술에 관한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날카로운 비평은 끊임없이 독자의 지적 유희를 자극한다. 여기에 사실과 사실 사이에 비어진 공백을 유연하게 메우고, 사실감 넘치는 문장과 생생한 표현으로,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입체감 있게 이야기를 구현해낸 저자의 필력은 단연 돋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너무도 쉽게 들라크루아와 마네를 거쳐 세잔과 드가의 사적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된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사실성을 가지고 출발한다. 과거, 세네갈 탐험대에 오른 메두사호의 프리깃함 선원들은 배를 잃게 되자 뗏목을 만들었고 총 150명의 인원이 그곳에 옮겨 탔다. 하지만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력했고, 끔찍한 정신착란으로 인해 갈등이 빚어졌으며 서로를 죽고 죽이며 마침내 인육을 먹는 극한의 상황에 치닫게 되었을 땐 열다섯 명의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표류한 지 열셋째 날, 아르고스호를 만나 극적으로 구조되고 훗날 두 사람이 이 표류의 시련을 쓴 글을 읽고 제리코는 사건 기록을 수집한다. 메두사호의 재난에서 살아난 목수를 찾아내 뗏목의 축적 모형을 만들게 하고 그 위에 생존자들의 밀랍 모형을 만들어 얹는다. 주위의 공기에 죽음이 스며들도록 잘린 머리와 절개된 팔다리를 그려 화실 여기저기에 걸어두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재난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여기에서 줄리언 반스는 제리코가 그리지 않은 것(폐기된 발상)과 그린 것(목표에 가까운 성과)들을 통해 이 그림이 단 하나의 장면으로 탄생하게 된 과정을 소설처럼 재구성함으로써 ‘화가는 강 하류를 향해 술술 실려 내려가 햇빛 가득한 저수지라는 완성된 그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조류가 맞부딪치는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잡고 나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끔찍한 절망이 지배하는 논쟁 끝에, 아직 성한 열다섯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의 공익을 위하여 병든 동료들을 바다에 집어던지자는 의견에 합의했다. 계속되는 죽음을 보고 마음이 냉혹해진 선원 세 명과 군인 한 명이 그 결정의 집행을 담당했다. 죄 없는 자와 죄 있는 자가 분리되듯이 성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분리되었다. / 28p

 

 

노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든, 이 그림에서 그의 존재는 환호하는 인물의 존재만큼이나 강렬하다. 이 균형으로 미루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먼저 이 그림은 아르고스호를 처음 목격했을 때의 중간점을 나타내고 있다. 즉, 아르고스호는 15분 전에 눈에 띄었고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15분이 남았다. 배가 계속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확신하지 못한 채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다. 뗏목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포함한 몇몇은 배가 멀어져가고 있으며 자기들이 구조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이들 때문에 <난파 장면>은 조롱당하는 희망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 48p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그 관능적인 섬세함은 위협적이리만치 사실적이다. 이 도발적인 사실주의 화가이자 독단적인 미감의 소유자인 쿠르베는 미술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언제나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며 거창하게 꾸짖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프랑스에서 가장 자부심 강하고, 가장 오만한 사람”으로 일컬었고, 자기 홍보에도 능한 자였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절한 일화는 과연 허세의 극치답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프랑스 여자라도 아내로 맞을 수 있다며 거만하게 편지를 썼다가 여성으로부터 퇴짜를 맞고 악담을 해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치졸한가. 이렇듯 자만심 넘치는 그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고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나폴레옹 3세에게 “그는 내게 부당한 형벌”이라는 글까지 쓸 수 있었던 호기로 보아서, 예의 그 솔직함에는 성역을 두지 않는 일관된 사람이었나 보다. 덕분에 우리는 작가의 성격과 태도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화실>의 구성은 중세의 세 폭짜리 그림을 연상시킨다. 양옆에 천국과 지옥이 있고 위에는 신과 천사가 사는 아득히 넓은 하늘이 자리한 그런 그림 말이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마리아? 하느님과 이브? 글쎄, 여하튼 쿠르베의 그림에서는 쿠르베 자신과 모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거기에 앉아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어쩌면 쿠르베가 왜 바깥이 아니라 화실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화가라고. 이렇게 해석해보자, <화실>은 엄청난 신성보독이거나 예술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또는 둘 다라고. 각자의 관점에 달린 문제다. / 93p

 

 

그의 그림에는 ‘개성’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영혼은 그리는 게 아니야.” 세잔은 투덜거리곤 했다. “몸을 그려야지. 젠장, 몸을 잘 그리기만 하면, 영혼은-몸에 그런 게 깃들어 있다면-사방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 단체브가 현명하게 지적했듯이, 세잔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 실물과 닮았다는 점보다는 인물이 거기 실제로 있다는 기분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데이비드 실베스터는 세잔을 가리켜 “우리가 실제로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밀도의 재현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평했다. / 164p

 

 

 

 

 

 

   보나르는 야외 생활을 그릴 때조차 실내 생활의 화가다. 풍경화는 집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그리거나 높은 발코니에서 그린 것이 많다. 그런 그림을 직접 보면 실내 그림처럼 긴장감과 정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유지된다. 피카소는 보나르를 두고 이렇게 주장한다. “감수성이 넘쳐나서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좋아했다”고. 여기서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이란 바로 마르트를 가리킨다. 보나르는 무엇 때문인지 이 여자와 집에 틀어박혀 그녀가 들어가는 그림을 385점이나 그렸던 것이다. 욕실이든 침실이든, 마르트는 사방에 또 나타나고 나타난다. 그는 “인물은 배경의 일부여야 한다”고 믿었기에, 물병과 식탁보, 덧문과 라디에이터, 타일과 욕실 매트 같은 것들 사이에서 마르트는 가구의 일부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385점이라는 방대한 작품의 양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은 행복일까, 슬픔일까 의구심이 든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나르 말년의 마르트 누드화들은 에로틱해보이지도 않는다. 사실 모델이자 정부이자 아내로서 평생에 걸친 집착의 대상이었던 마르트와의 사이에 르네가 자리를 빼앗고 들어서려했던 일이 있었다. 보나르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화가 지망생이었던 르네에게 청혼했다가 마르트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 일은 르네가 파리의 한 호텔 방에서 자살하는 사건으로 끝을 맺었다. 이제 우리는 보나르의 자화상마저 왜 더욱더 비참하고 생기 없는 외판원처럼 변해버렸는지, 줄리언 반스가 들려준 이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결점을 깨닫게 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브라크는 이보다 더 급진적으로 접근해서, 결점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미술의 진보는 미술가가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더 잘 알게 되는 데 있다.” 간단히 풀자면 이런 말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이 점에서 브라크는 인체를 잘 그리지 못하는 자신의 결점을 일종의 장점으로 승화시키겠다고 결심한 르동과 비슷하다. / 294p

 

 

우리는 그(올든버그)의 오브제를 마주했을 때 가만히 있게 되지 않는다. 그 앞에서 재치 있는 명언을 요구하고, 소재와 변화를 확인하고, 그 매끄러운 마무리를 승인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야, 그 <치즈버거> 봤어? 그거 재미있지 않아? 야구 글러브는? 찌부러진 변기는? 그렇다,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우리는 전부 다 봤다. 그것들이 우리의 기억에 남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건 하나의 성취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심금을 울릴까? 어떤 방향으로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까? 어쨌든 적어도 우리의 얼굴은 움직인다. 우리는 미소 짓고 낄낄거리고 어리둥절해졌다가는 다시 미소 짓는다-그리고 이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 331p

 

 

 

 

 

 

   책의 구성 중에서 ‘이것이 예술인가?’를 주제로 한 내용이 특히 흥미롭다. 책에는 다소 놀라운 조형물 사진 두 점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하나는 뮤익의 <죽은 아빠>이고 또 하나는폴 리셰의 <운동 실조증에 걸린 비너스>다. 둘 다 알몸을 하고 있는데, <죽은 아빠>의 경우 미술관 바닥에 설치된 반들반들한 마감 칠과 하이퍼리얼리즘적 정밀성으로 인해 작가의 다정하면서도 냉혹한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소하고 저 침묵된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의 작용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와 유사한 느낌의 <운동 실조증에 걸린 비너스>는 마르고 나이에 비해 빨리 늙은 알몸의 여자로, 그녀가 운동 실조증 즉 척수매독으로 인해 극도의 고통을 겪은 몸임을 알 수 있다. 왼팔의 관절 안쪽은 바깥쪽으로 거의 완전히 돌아갔고, 오른발은 아예 90도로 꺾였으며, 왼쪽 무릎은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있다. 이 쇠약하고 고통 받은, 유방이 거의 없는 여자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면 고통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엄숙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죽은 아빠>는 미술품으로 전시하고 판매하기 위해 제작된 것인 반면, <운동 실조증에 걸린 비너스>는 신경계 질병을 연구하는 선생들과 학생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오르세 미술관의 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 예술의 범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할지 고민해보게 된다. 줄리언 반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피력한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고, 이에 대한 우리의 살아 있는 반응이다. 평가 기준은 간단하다. 그것이 우리 눈의 관심을 끄는가? 두뇌를 흥분시키는가? 정신을 자극하여 사색으로 이끄는가? 가슴에 감동을 주는가? 예술이 주는 지속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의외의 각도에서 접근하여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힘이다. <운동 실조증에 걸린 비너스> 때문에 론 뮤익의 <죽은 아빠>의 강렬함이나 그 감동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는 일이 없다. 비너스 여인은 <죽은 아빠>의 동료이자 선구자가, 그리고 물론 경쟁자가 되어준다”고 말이다.

 

 

 

자아를 논하는 철학의 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일화성과 서사성의 쌍둥이 같은 양극 사이 어느 한 지점에 자리한다. 그 둘의 차이는 존재론적인 것이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일화주의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상이하게 전개되는 부분 부분들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느끼고 그렇게 믿는다. 그러면서 더 파편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며, 자유의지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서사주의자는 일정한 연관성과 지속적인 자아를 느끼고 그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와 연관성을 구축하는 도구로서의 자유의지를 인정한다. 서사주의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과 실패에 죄책감을 느낀다. 일화주의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나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사생활보다 더 순수한 일화주의자의 예는 없을 것이다. / 355p

 

 

예술 작품은 언젠가는 작가의 전기를 벗어나 자유로이 떠돈다는 특징이 있으니까. 어느 한 세대에서는 거칠고 비열하고 비예술적이고 차가웠던 것이, 다음 세대에 가서는 진실된 것, 심지어 삶의 아름다운 화신이 되고 삶을 표현하는-또는 심화하는-모범이 되기도 한다. / 377p

 

 

 

 

 

 

   제목에서는 지극히 사적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미술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 앞에서 우리는 적극 공감하게 된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아무도 없는 미술관에 홀로 들어가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미술 입문자에게는 좋은 안내자가 되고, 미술 애호가에는 황홀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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