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죽음의 경계에
머물렀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사이에서 삶의 원형을
들여다보는 마법 같은 소설!
“물 좀 주세요.”
살포시 열려 있는 방문 틈새 사이로 사그라져 가는 듯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나는 엄마의 부탁에 따라 빨대가 꽂혀 있는 컵에
미지근한 물을 담고 방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간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병원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던 게 석 달 전인데, 나의 외할머니는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하고선 빨대를 힘껏 빨아들인다. 당신에게 물을 건네는 이가 외손녀라는 것도 알지 못할 만큼 불투명한 눈빛이지만 삶을 향한
갈망만큼은 꿀꺽꿀꺽 들이켜는 소리만큼이나 강렬하다. 외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삶에 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일까. 허공에 부유하는 시선으로 그녀는 어디를 더듬어보고 있는 것일까. 생애 가장 찬란했던 어떤 순간일까, 미련과 후회로 점철된
과오의 순간일까. 혹은 미처 가 닿지 못했던 어떤 꿈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을까. 그건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꿀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꿈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기고 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늘 더 열렬히
사랑할 것
코마(COMA). 일반적으로 의식 수준이 정상이 아닌, 즉 각성이 아닌 상태로 흔히 ‘혼수상태’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다. 혼수상태란
자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주 심하게 자극을 주어도 환자를 깨울 수 없는 상태이다. 『꿈의 책』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바로 이 코마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꿈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한 남자와 그의 곁에 남겨진 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용서와 화해, 사랑과 치유의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다.
이야기는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아들 샘을 만나러 가는 길에 템스강에 빠진 소녀를 구한 주인공 헨리가 공교롭게도 현장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데서 시작된다.
엄마 몰래 아빠에게 자신을 만나러 와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가 이 같은 사고를 겪은 데에 대한 미안함과 혈육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본능과도 같은 끈끈한 감정은 샘을 매일 같이 병원으로 이끈다. 특히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타인의 영혼을 들여다볼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샘은 비록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영혼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반면, 헨리가 응급 시 사전 의료 지시서에
결정권자로 기입한 옛 연인 에디는 이미 오래 전에 헨리와 이별을 한 데다 그로부터 사랑을 거부당했다고 믿었기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나는 응급 상황을 위한 여자다. 삶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여자.’ 라는 그녀의 고백처럼 여전히 그로부터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수치심에 몸을 떨
정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면에서 헨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진실의 목소리를 차마 외면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에디는 혹시나
헨리가 깨어나 그녀를 다시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영영 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엄마와 학교를 속여 가며 매일 아빠를
찾아오는 무모하지만 지혜로운 샘과 함께 헨리의 곁을 지키기로 한다. 그러는 동안에 샘은 에디를 통해 자신이 미처 몰랐던 아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고, 에디는 헨리와의 소중한 추억을 돌이켜보면서 사랑과 상처를 함께 어루만진다.
닥터 사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샘. 하지만 네 아빠는 살아 있어. 다만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을 뿐이란다. 알아듣겠니? 코마도 삶이야. 다만 독특한 방식의 삶일 뿐이지. 경계 상황이란다. 위기, 그래, 그렇다고 너나 나나 탐린 부인이
살고 있는 삶보다 덜 중요한 삶은 아니야.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코마로 살고 있다고 말한단다. 코마로 누워 있다고 말하지 않아.” / 98p
“코마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부인을 사랑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닥터 사울이 좀 더 조용히 말한다. “그런데도 부인은 부인의 모든 애정과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 부어야 합니다. 부인의 모든 사랑을.
부인이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말이죠. 행복한 결말 없이. 현재하지 않는 사람과 부인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게 될 겁니다.” / 106p


코마 상태에 빠진 헨리는 모든 것 사이에 있으면서 그 어디에도 없는, 바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그 어느 ‘중간 세계’에서 꿈을 꾸듯
유영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가 혼자 돌아오게 되었던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종군 기자로서의 규칙을 어기고 탈레반으로부터
이브라힘을 구해내려던 순간에 머무르기도 하고, 종군 사진 기자였던 마리프랑스와의 보낸 하룻밤 등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그러면서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내 삶을 수많은 부정(否定)과 두려움으로 그렇듯 마구 낭비할 수
있었을까? 그릇된 갈림길들에서 부정하고, 올바른 갈림길들에서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중요한 고비들을 인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상실과 미련으로 점철된 순간들을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된 깨달음을 통해 동시에
구원받기도 한다.
사람이 죽어서 아무것도, 그야말로 순전히 아무것도 만회할 수 없는 최후의 시간이 시작되면 무엇을 가장
깊이 애석해하는지 보인다. / 88p
이것이 삶의 의미이다.
나는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가족을 떠나지 않는 남자들을 처음으로 이해한다. 이 작은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꾸밈없고 거짓되지 않은 이 작은 인간들. 이들을 사랑하는 일은 매우 단순하며, 그렇기에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 173p
“때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기도 해.” 헨리는 덧붙인다. 그의 손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들을 한다.
나한테 좋은, 너무 좋은 일들을.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분명 삶의 일부이고 또 그게 삶의 현실이야.” /
461p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바로 ‘아버지’다. 헨리와 에디는 일찍이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데, 특히
헨리는 파도가 아버지와 자신을 덮치던 순간을 자주 꿈꾸곤 했다. 아버지가 배의 바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반 실신한 채로 파도에 실려
흔들거리는 사이, 헨리는 아버지의 손을 몇 시간이나 꼭 붙들고 있었지만 고작 열세 살에 불과했던 그에게 그 이상의 힘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친밀하고 강인한 손가락이 자신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느낌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속절없이 자신의 무능함을 탓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
있는 내내 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던 헨리는 역설적이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가 네 손을 놓았을 수도 있어. 네가 아버지 손을 놓은 게 아니라.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이따금 손을 놓을 수밖에 없어.”
등대에 올라가기 전에 층계를 위까지 올려다보지 말고 첫 번째 계단만 보라고 아버지는 충고했다. 한 계단
한 계단씩만 보라고.
“너보다 훨씬 더 막강해 보이는 도전에는 이런 식으로 응하는 거란다. 그러면 도전을 이겨낼 수
있어.”
세상을 작게 만들어라. 정확히 보아라. 네 앞에 놓인 기나긴 밤이 아니라 바로 앞의 순간만 생각해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길을 완전히 가늠하기 위해서는 끝가지 가봐야 한단다, 에드위나.” / 145p
나는 아버지를 보면,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금세 안다. 우리에게 온 세상을 뜻했던 사람을
잃어버리면 그렇다. 우리의 삶에 균열이 생기고 웃음과 홀가분함이 그 균열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의 부재는 우리를 파괴한다. 별안간 우리는 깨어
있는지 꿈을 꾸는지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 마치 죽음이 세계들 사이의 세계에 들어서는 걸 가능하게 하는 듯 보인다. /
436p


헨리는 자신의 삶에 가해졌던 균열의 시간들과 화해하고 용서하게 되면서 이제야 자신의 불완전한 인생이 갑자기 의미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샘과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에디로 인해. 이렇듯 46일의 시간 동안 코마 상태에 빠진 헨리와 그를
지키는 샘과 에디의 이 꿈결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에의 의미와 곁에 있는 내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다. 죽음이라는
모호하고 초월된 감각을 언어를 빌려 생생하게 구현하고, 코마에 대한 병리학적인 정보와 코마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겪고 있을 제도적이고 정서적인
문제까지 사실감 있게 그려낸 점 역시 남다른 울림을 전한다.
“매디에게 필요한 건 기쁨을 주는 것들이야. 코마에 빠진 사람들을 ‘각성 상태’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들은 늘 작은 일들, 작고 소중한 일들이란다.” / 202p
나는 헨리의 이름을 부르는 걸 배운다. 메리언은 어떤 깊은 곳에서 떠돌고 있는 헨리를 도로 데려올 수
있는 가장 긴 줄이 바로 이름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나는 다섯 개의 알파벳으로 된 줄사다리를 헨리를 향해
던지는 상상을 한다. 나는 예배당을 향해 속삭인다. “헨리.” / 229p

책을 덮으며 ‘아마 그것은 바로 내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 우리 모두는 지금 읽히는 이야기들일지 모른다. 이야기들은 우리를 구해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소멸되지 않도록.’이라는 문장이 마음을 내내 두드린다. 우리는 모두 삶으로써 저마다 읽히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는
중이기에, 허망하거나 의미 없는 삶이란 없다는 그녀의 메시지가 연약한 우리 삶에 견고한 메아리가 되어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