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독보적인 ‘악’의 캐릭터, 한니발 그가
돌아왔다!
양들의 침묵 그 이후의 이야기, 한니발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장르가 되었다!
스릴러 장르 사상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한니발 렉터. 안소니 홉킨스가 한니발 역으로 등장한 영화 <양들의
침묵>은 이제껏 본 스릴러 장르 사상 감히 최고의 영화라 손꼽는다. 이는 FBI 수습 요원인 클라리스 스탈링으로 주연한 조디 포스터가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기괴한 범죄 설정과 인육을 먹는 충격적인 소재를 떠나 이 영화가 단연 수작이라 할 만한
것은 치밀한 캐릭터 설정과 범죄와 수사로 점철된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 수사관으로서 고립된 상황과 불안한 현실을 공포라는 장르에 잘 녹아낸 점,
특히 관객의 심리를 자극할 줄 아는 영화의 미장센은 그 어떤 잔인한 장면이 없이도 내내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스탈링이 살인자의 심리를 알기 위해 수감 중인 괴인 한니발 렉터 박사를 찾아가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 연쇄 살인마의 심리에 대한 힌트를
얻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니발 렉터는 유능한 정신과 의사임과 동시에 식인종이었다. 사람들의 심리를 들여다볼 줄 아는
탁월한 감각 속에 날카로운 맹수의 본능을 숨기고 있는 인물로, 이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는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중에 단 16분만 출연하고도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이후 <한니발>, <레드 드래곤>, <한니발 라이징> 순으로 한니발 렉터를 주연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지만 <양들의 침묵>의 힘을 능가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최근, 이 작품의 원작자인 토머스 해리스의 《카리
모라》가 출간되면서 이 한니발 시리즈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한니발 라이징》 3부작으로, 한니발 시리즈의
원작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이 중 시간상 가장 뒷이야기라 할 수 있는 《양들의 침묵》 그 이후의 이야기,
《한니발》부터 시작해서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했다.
잔혹한 복수극과 추격 그 속에서 빛나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
잔혹한 연쇄살인마인 일명 버팔로 빌을 잡아 유명해진 클라리스 스탈링은 이제 베테랑 수사관이 되었고 수많은 사건 해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녀는 상관을 존경하고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준수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항상 남보다 앞섰고 장학금을 받았으며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의 세계였던 FBI 내에서 번번이 여성으로서 한계에 부딪치곤 했다. 거기다 일찌감치 거둔 성공이 도리어 그 속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처럼 눈부신 출발을 하고서도 FBI에서 진급에 실패한 것은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뼈아픈
경험이었다. 떠오르던 별이지만 뻗어나갈 길이 막혀버린 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약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아기를 안고 있던 이벨다 드럼고를
사살했다는 이유로 스탈링을 마녀 사냥 하는 기사와 항의가 연일 쏟아지는 일이 발생하면서 그녀는 파면될 위기에 처하고 만다.
그들 가운데는 그녀와 같은 직무에 종사했거나, 영장 발부를 함께했거나, 함께 총질을 당했거나, 유리
파편을 떼어내기 위해 서로의 머리카락을 빗어준, 이른바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스탈링을 향했다. /
65p


한편, 한니발 렉터 박사는 멤피스 감방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섯 명을 더 죽인 후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진 듯했다. 그런 그가 무려
7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친애하는 클라리스’로 시작하는 그의 편지가 스탈링 앞으로 도착한 것이다. 한니발 렉터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한때 한니발의 살해 시도로부터 겨우 살아남아 인공호흡기로 삶을 연명하고 있던 메이슨 버저는 흥분으로 들떴다. 그는 한니발 앞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FBI와 의원까지 매수해 복수할 날만을 꿈꾸며 한니발에게 가장 잔인한 고통을 맛보게 해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반면
한니발의 편지로 인해 파면될 위기에서 건져진 스탈링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메이슨 버저가 손씀으로써 FBI는 한니발을 잡는 데 스탈링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파면하기로 한 계획을 철수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최고의 구금시설이 갖춰진 정신병동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조종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파헤쳐 일깨워주던 그의 목소리를 잊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프레드가 사람들에게 자주 보여주던 심전도 테이프가 있었는데, 렉터 박사가 그 불쌍한 간호사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의 온몸은 전선에 감긴 채 심전계에 연결되어 있었죠. 그가 얼마나 괴물이냐 하면, 간호사를 물어뜯던 그 순간에도 맥박이 별로
상승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안전요원들이 달려와 그를 간호사에게서 떼어낼 때 그의 어깨뼈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그 부분에 엑스레이를 찍었죠. 내가
알기론 어깨뼈만 부러진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거예요. / 120p
실제로 정신의학계에서는 렉터 박사를 계속해서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이따금씩 발표하는 신랄한 논문에 두려움을 품은 정신의학계의 동료들마저도 그를 완전히 별종으로 취급한 지 오래이다. 그들은
편의상 그를 ‘괴물’이라 부르고 있다. / 218p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을 수사하던 리날도 파치 수사반장은 우연히 한니발 렉터를 포착해냈다. 한니발 렉터는 실제 펠
박사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피렌체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가 카포니 궁 관장의 자리에 오를 유력한 인물로 꼽히는 바람에 파치 반장의 눈에 띄고
말았다. 파치는 한니발을 잡기만 하면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성을 떨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펠 박사가 한니발
렉터가 분명하다면 엄청난 돈을 받고 메이슨 버저에게 팔아넘기는 게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이로써 메이슨 버저의 부하와
파치 반장, 스탈링은 저마다 갖고 있는 정보력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은닉해있던 한니발의 정체에 점차 다가가기 시작하고, 한니발 역시
자신을 잡으려는 이들이 더욱 가까워져오고 있음을 눈치 채기 시작하는데…….
렉터 박사는 가끔 자신의 손과 팔, 뺨으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얼굴과
마음으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부학적 이유에서도 다행인 것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냄새가 그의 기억을 더 촉진시킨다는
사실이었다. / 291p
미각. 포도주와 송로버섯. 모든 것에서 맛을 따지는 렉터 박사의 습관은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성공한 의사로서 살 때나 엽기적 살인 행각을 저지른 도망자로 살 때나 그는 여전했다. 얼굴은 변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입맛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그는 자신을 푸대접하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다. / 344p


소설은 내면에 치명적인 광기를 품고 있는 이 한니발 렉터의 그로테스크한 면모에 탐미적이면서 지능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켜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완성해냈다. 한니발의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취미와 지능적인 플레이에서 기인한 섬뜩한 공포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장면에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은 그냥 그 자체로 압도적이었다. 여기에 야간순찰을 나갔다가 살해당한 아버지와 도축장이 있는 친척
집에 머무르면서 얻은 스탈링의 트라우마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하나 뿐인 동생 미샤에게까지 벌어진 한니발의 끔찍한 과거와 오버랩되면서 그들의
기묘한 관계를 심리적으로 풀어낸 구성까지 흥미로웠다.
미샤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어느 정도만 이루어졌다. 미샤의 젖니 몇 개를 탈영병들이
변소로 사용하던 똥구덩이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곳은 탈영병들이 잠을 자는 막사와 1944년 동부전선이 무너질 때까지 그들의 생계수단으로
감금했던 아이들이 있던 헛간 사이에 있었다. 기도에 대해 그렇게 일부만 응답을 받은 뒤로 그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드는 능력과
엄청난 악의 외에는 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391p
“우리는 한니발 렉터가 리투아니아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백작이었는데,
그것은 10세기에 얻은 작위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의 비스콘티가(밀라노를 지배한 명문가) 출신입니다. 독일이 러시아에서 퇴각하던 때
그곳을 지나가던 나치 기갑 사단은 빌뉴스(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수도) 근처에 위치한 한니발 렉터가의 사유지에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한니발 렉터의 부모님과 대부분의 하인들이 죽었죠. 그리고 아이들은 사라졌습니다. 한니발과 그의 여동생이었죠. 우리는 그 여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렉터가 클라리스 스탈링처럼 고아였다는 사실입니다. / 409p
뜻밖의 결말로 인해 얼떨떨하긴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의 전개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한니발 시리즈는 아직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것이 비록 나만의 상상에 그친다 할지라도 한니발이라는 괴인과 스탈링이라는 매력적인 여수사관의
캐릭터가 남긴 이 긴 여운을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팬이라면, 여름의 끝자락에서 진한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한니발 시리즈를 꼭 읽어보시라 추천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