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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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간을 공유했으나 너무나 달랐던 서로의 기억들!

1970년대의 문화와 풍속들 사이에서 어제의 기억과 오늘을 넘나든 청춘들의 이야기!

 

 

 

   이따금 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서 “그때의 너는 참 미웠다”는 말을 듣곤 한다. 네가 결코 나쁜 행동을 한 게 아닌데 이상하게 네가 너무도 미웠다는 이 묘한 말은 ‘흔한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는 것으로 갈무리 되었고, 이는 여러 번의 만남에서 몇 번이나 수다 거리로 되씹혔다.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해에 나는 “착한 척 하지 마라”는 말을 주변의 여자 친구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야 했는데, 그게 다 그녀의 선동질에 의한 것이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우리들은 종종 너무나 다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때가 많다. 언젠가 이 날의 기억을 복기하며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면 간혹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처 보지 못했거나 서로가 왜곡했던 사실들이 존재했음을 느끼곤 한다. 스스로가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인생이라는 작품 안에서,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조연이었던 순간이 있지는 않았을까. 『빛의 과거』를 읽으며 나는 나를 할퀴고 간 상처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흔적들을 내내 생각했다.

 

 

 

 

 

 

불완전한 우리가 마주친 ‘다름’과 ‘섞임’의 세계

 

 

   『빛의 과거』는 1977년에서 2017년에 이르기까지 한 여대 기숙사에서 만난 여성들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불완전한 청춘의 민낯을 드러내며, 한 개인의 성격 혹은 당대의 풍속과 문화적 격차를 통해 ‘다름’과 ‘섞임’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다룬 소설이다. 2017년의 김유경이 여대 재학 시절, 기숙사에서 만나 지금껏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 온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으며, 소설 속 배경이자 기숙사 생활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데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1977년은 독재 정권이 대한민국을 장악한 시대로, 이제 막 성인이 된 유경은 그간 주어진 대로 수긍해야 하는 미성년으로서 ‘다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운영되는 기숙사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섞인다는 것의 비극 또한 당연히 알지 못했다. 국문과 1학년으로 막 입학한 그녀는 322호로 배정받아 그곳에서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와 룸메이트가 된다. 최성옥과 친한 417호의 송선미 덕분에 그곳 룸메이트인 곽주아, 김희진, 이재숙과도 자연스레 교류하기에 이른다.

 

 

 

   그녀들은 각기 다른 지점으로부터 다른 조건을 지니고 떠나왔다. 저마다 다른 지역 출신과 계층적 배경 속에서 자란 만큼 의식하든 안 하든 자기라는 존재가 다름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이를 테면 무리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조용히 발전시키는 오현수, 매사에 즉흥적이고 변덕이 심하며 자신의 욕구 충족에 충실한 양애란,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김희진, 다른 사람의 청순과 정숙까지 관리하려 드는 곽주아 등이 그렇다. 한편, 유경은 평소 말을 더듬는 게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숨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친밀한 만남에서는 과장된 사교력을 연기하며 입담과 재치를 발휘하는 데 적극적일 데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회피’에 가까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같은 생활공간에서의 다름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개별적인 ‘다름’은 앞으로 이어질 기숙사 생활에서의 여러 에피소드 등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는 거대한 깔때기처럼 이야기가 모이고 섞인 뒤 흐름을 만드는 곳이었다. 모두가 공동 관심사를 가진 청춘의 밀집 지역인 데다 저녁 9시 이후에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 공간에 있으며 언제든지 서로 찾아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출신지와 같은 과와 같은 고교 출신과 같은 방끼리 말이 넘나들다 보면 수많은 교집합이 생긴다. 이야기는 서로 뒤섞이고 보완되면서 빠르게 공유의 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 217p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 112p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 245p

 

 

 

 

 

 

   유경의 기억에 머물러 있던 1977년의 그녀들은 훗날 희진이 쓴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통해 익명을 가장하여 등장하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공주’로 지칭된다. 희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그 시절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욕망과 차별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공주들의 성이었고 나는 탑의 맨 꼭대기 방에 재봉틀과 함께 내던져진 처지였다. 공주들은 내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긴 경주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을 이미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 전반에 드리워질 박탈의 전조’ 였다고. 심지어 유경을 ‘그녀가 얼마나 자기도취적이며 위선에 익숙한지 알 수 있다.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친다. 게다가 그녀는 적에게조차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한다. 모두에게 맞춰주면서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공주 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세 번째 공주 타입’이라고 진단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경은 희진에게 소설가 중심의 시선에서 편집된 과거의 기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한때 희진이 좋아했던 남자와 유경이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한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도, 같은 시간을 공유했으나 누군가는 보았고 누군가는 보지 못했던 어떤 사소하지만 거대한 기억들의 간극 사이에서 각자의 삶이 존재하는 거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를 싫어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전도되고 돌발된 상황은 마치 단조로운 여정에 가로놓인 과속방지턱처럼 내 인생에 작은 잡음을 만들며 짧게나마 그것을 변속했다. 그러나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속도를 떨어뜨릴 때의 반동으로 나는 흔들렸으며 그때마다 내가 회피해왔던 것들이 그녀에게로 가서 어떤 파국을 맞이하는지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 / 12p

 

 

그것은 내가 동창회 같은 데에 나가지 않는 이유와 비슷했다. 남들에 의해 소환되는 그 시절의 나도 싫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시절의 나인 척하고 있을 게 분명한 현재의 나도 싫었다. / 18p

 

 

시간이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곁을 스쳐 가며 갖가지 슬픔과 기쁨의 무늬를 새기지만 결국은 모두를 소멸로 이끄니까. / 199p

 

 

 

 

 

 

 

   작가 은희경이 무려 7년 만에 쓴 작품 속에서 1970년대의 정경을 소환해냈을 때에는 당연히 기대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언급했듯이 당대의 정치적 공기와 문화적 풍속도를 생생하게 복원해낸 점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훈육과 세뇌, 복종과 강제력이 동원된 사회 속에서 자라난 미성년이 사감과 부사감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제한된 청춘의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한국 근대 여성의 정체성으로 연결되어 ‘기숙사가 미팅을 위한 일종의 물류 창고인 셈이었고 일단 필요한 물량은 채울 수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여자들 점수 매기기가 주된 화제이며 누구는 못생겨서 얼굴에 보자기 띄우고 해야 한다는 둥 우연히 지켜진 처녀성은 가치가 없다는 둥 키득거리는 가운데 동료애가 싹트는 남자’들로 인해 여성은 여전히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한편으로는 유경이 이왕 대학 학보사 기자가 된 만큼 좀 더 밀도 있는 정치적, 사회적인 목소리가 드러났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여성이 중심이 될 수 없었던 현실, 즉 주변부에 머무르게 했던 현실을 반영한 작가의 정교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내 납득하게 된다.

 

 

 

며칠 사이 깨친 사실이지만 공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이었다. 정보를 얻지 못하면 뒤처지고 다수에 끼지 못하면 손해를 봤다. 이곳은 숨을 곳이 없는 공동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립은 차별보다 더 눈에 띄었다. / 47p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 278p

 

 

그런 식으로 자신의 사는 모습을 드러내 모이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안 보이는 대다수는 어딘가에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 국사 강사의 말을 조금 바꿔보자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불만스러운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331p

 

 

 

 

 

 

   나에게 있어 은희경이라는 이름은 이미 그 자체로 잘 완성된 책 한 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고 선언했던 소녀에게서 삶의 진득한 내음을 맡았던 『새의 선물』은 아직도 내 책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꽂혀있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 ‘여러 이유를 떠나 책의 저자가 되는 일에 의욕을 잃은 것이 큰 실패’였다고 자조하는 작가의 말이 무색할 만큼, 이번 작품 역시 수많은 타자와 나의 삶을 입체적으로 투사하여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은 인생의 더께를 실감케 한다는 점에서 깊은 여운을 준다. 무엇보다 1970년대 말 서울 어느 여자대학교 기숙사 이야기이지만, 나의 시간 속에서도 분명 존재했던 과거의 어느 시점과 또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기시감으로 인해 나를 더욱 소설로 끌어들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역시, 은희경이라는 감탄을 또 한번 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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