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어디에 존재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기억의 속성과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매우 특별한 실험들!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참혹하게 만든 적이 있다. 몇 해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던 외할머니의 병세가 최근 들어 꽤 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였다. 외할머니는 나와 나의 아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다. 당장 나가라는 외침에 나는 참담해진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고,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내내 울었다. “외할머니,
나 국화 화분 사야 해. 꼭. 응?” 유년 시절, 부모님을 대신해서 학교에서 열린 시화전에 참석해 내 시와 함께 놓여 있던 국화 화분을 사주셨던
분이었고 몰래 다른 손자손녀들보다 먹을 거 하나 용돈 하나 더 챙겨주시던 그 외할머니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것도 모자라 문전박대를 하였으니 마치
당신의 인생에서 내가 뚝 떨어져나간 것만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기억이 흐려진다는 것, 기억을 잃는다는 것, 기억이 또 다른 기억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과정을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서 한꺼번에 겪고 있는 외할머니를 보며 나는 비로소 기억이란 것이 참 얇디얇은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이고, 찢어지고, 불완전하게나마 다시 이어붙일 수 있는 그런 종이 한 장 말이다.
뇌의 수많은 신비를 푸는 열쇠,
해마
1564년, 이탈리아의 한 의사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란티우스는 인간의 뇌 속에서 소시지처럼 생긴 작은 물체를 잘라 내고 분리했다.
머리가 앞으로 굽어졌고, 꼬리는 꼬부라진 것 같은 것이 꼭 해마를 닮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부위가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450 여 년이 흐른 뒤, 외과 의사 윌리엄 비처 스코빌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헨리 몰레이슨을 치료하기 위해 뇌
양쪽에서 해마를 제거하는 잘못된 수술을 하게 되면서 헨리는 기억력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수술 후 헨리는 지난 2~3년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짧은 순간 바로 기억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면 그 무엇도 회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한 개인에게는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이때부터 해마의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 작은 해마 하나가 뇌의 수많은 신비를 풀기 위한 열쇠가 되었다.
바다에 사는 생물과 우리 뇌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바다의 해마와 뇌의 해마 사이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새끼들이 바다에서 헤엄치는 데 위험이 없고 그들이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배에 알을 품는 해마 수컷처럼, 뇌의 해마 역시
무언가를 품는다. 그건 바로 우리의 ‘기억’이다. 해마는 기억이 크고 강해져서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지키고 꼭 붙잡아 둔다. 해마는
말하자면 기억을 위한 인큐베이터이다. / 10p
해마는 일종의 ‘기억 저장소’의 역할을 한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저장소는 아니다. 인생의 모든 경험이 뇌 속 깊이 있는 그렇게 작고
이상한 조직 안에 다 저장된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뇌 깊은 곳으로 사라지고 피질로 분산된다. 하지만 해마의
도움으로 다시 꺼내 올 수 있다. 즉, 해마는 기억이 성숙해져서 뇌의 피질에 고착될 때까지 붙잡고 있거나, 내면의 눈이 생각 속에서 경험을 다시
체험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처럼 <해마를 찾아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생물 해마와 꼭 닮은 우리
뇌 속의 해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기억이란 무엇이며,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고 또 기억을 효과적으로
불러낼 수 있는지 기억의 작동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의 신경세포는 서로 다른 다수의 기억에 관여할 수 있다. 기억은 뇌 안의 뉴런들 사이의 회로이다.
무언가가 기억으로 저장된다는 것은 켜지거나 꺼지는, 뇌에서 신호를 점화하거나 안 하는 뉴런들의 새로운 연결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무늬가 생겨난다. / 46p
“기억이 아주 새로울 때에는 접근이 아주 쉽지요.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대로 눈앞에 보이고, 아직도
해마에 존재하지요. 기억이 점점 낡아 가면서, 즉 옛일이 되면서,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뇌의 다른 곳에 저장됩니다. 그것들을 다시 꺼내 오려면
재구성이 더 많이 필요해지지요. 그리고 개별 요소들을 제자리에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를 만들 때 해마가 큰 역할을 합니다.” / 54p
책은 여러 장에 걸쳐 인간의 기억에 대해 이해해볼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사례들을 소개한다. 2장, ‘해마를 찾아 2월에 잠수하기’
편에서는 잠수부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기억이 상황이나 장소, 그리고 그때그때의 정서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 실험에서
잠수부들은 물속에서 외운 단어는 물속에서 훨씬 더 잘 기억해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기억이 동일한 환경이나 상황에서 정보를 꺼내기가
수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마는 사건과 경험을 서로 다르고 구별되는 것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설정되어 있다. 거기에서야
진주목걸이의 반짝이는 진주가 생겨난다. 기억에 저장된 다른 모든 정보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사건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개인적인
경험을 안정적으로 저장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그래야 나중에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어떤 기억에 대해 생각하고 말했는지가 영향을 미친다. /
82p
“기억은 우선 아주 기본적인 생존 도구이지요.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들을 할 때 기억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들이며, 우리의 연애 이야기는 배우자 관계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온갖 집안일이나 행사에서는 우리가
누구였는지 이야기를 해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대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시적인 차원, 국가적인 차원, 세계적인 차원에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단편적이고 괴상하고 창조적이지요! 기억은 창조도 하고 보존도 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저장하는 동시에
우리 인생을 작은 타임캡슐에 보관하니까요. 작가에게는 흥미로우면서 신뢰할 수 없는 도구입니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요.” /
93p



개인적으로 허위 기억을 다룬 4장과 기억 훈련에 관한 주제를 다룬 5장의 내용이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는 경찰의 강압수사 혹은 한때
은밀하게 자행되기도 했던 고문들이 죄 없던 용의자에게 허위 기억을 덧씌워 거짓 자백을 이끌어냈던 사례들을 종종 듣곤 한다. 노르웨이 경찰
수사관이며 현재는 인권 연구가인 아스비외른 라클레프 역시 죄 없는 용의자로부터 거짓 살인을 자백 받은 사건을 통해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에
약하며 또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직시했다. 덕분에 현재 그는 새로운 형태의 심문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형성하는데 기여함으로써 죄 없는 사람들이
유죄 선고를 받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에서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억은 압력이 있으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과 우리가
경험했다고 믿는 게 언제나 사실인 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진짜 기억은 사실 상상의 한 형태, 상상한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다. 허위 기억은 그 법칙이 아무리
비이성적으로 보이더라도 기억의 자연법칙을 이용할 뿐이다. 허위 기억은 그러니까 환상에서 시작하여 기억을 거쳐 어느 순간 현실로 인식된다.
‘사실’이라고 쓰인 딱지를 자신에게 갖다 붙이고, 박새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내고는 크고 뚱뚱한 뻐꾸기로 자라난다. / 151p
마치 기억이 귀엣말을 전달하는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범인에 대한 기억은 점차로 혐의자에 대한 기억으로
대치되었다. 여자가 기억을 제대로 못 했거나 트라우마 경험이 어떻게든 판단력을 흐리게 했던 게 아니다. 그저 기억이 원래 그렇게 작동할 뿐이다.
기억은 생물이고 유기적이며, 이미지를 살아나게 한다. 새로운 요소들이 들어오면 원래의 기억과 하나로 엮여 들어가는데,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상상력뿐이리라. / 188p




5장에서는 대규모 택시 실험과 특별한 체스 게임을 통해 기억은 얼마나 좋아질 수 있는지 기억 훈련법에 관한 연구를 살펴본다. 무대는
런던의 도로 위. 거미줄처럼 얽힌 이 복잡한 도시에서는 머릿속으로 도시의 지형을 그리며 정확한 장소에 도착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훈련받은 런던의 택시 운전사들의 뇌를 검사해본 결과, 해마의 뒤쪽이 훨씬 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해마 뒤쪽에 뇌를 구성하는
물질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고, 훈련이 해마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훈련을 통해 기억력이 무한히 상승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기억에는 망각이 뒤따른다. 우리 뇌 속에서 기억 흔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는데, 이는 기억을 서로 간의 연결점들의 형태로 붙잡아 두는 뉴런들이 점차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완전히
못이 박힐 때까지 지식을 암기하고 유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사실 이것은 현명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뇌에는 공간이
생기고 중요한 걸 구분해냄으로써 새로운 기억들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6장에서는 기억의 본성 중 하나인 망각을 들여다보며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큰 과제인 알츠하이머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본다.
오늘날 장소법은 마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도 장소법은 아주 유용한 기억법이며,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이다. 하나는 원래 알고 있는 무엇, 즉 알려진 여행 경로를 사용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확 들어오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기억할 내용과 함께 연상되게 한다는 점이다. 원래 알고 있던 여행 경로를 사용하면 기억에서 공간을 절약할 수 있고, 기억할
것에 자연스러운 순서가 정해진다. / 231p
퍼트리샤 바워는 부모가 어린이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기억이 얼마나 잘 정착하는지 사이에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부모가 어린이들에게 경험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하면 어린이들이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에 흡수되며,
구성적인 기억의 도움으로 기억에는 생명이 생긴다.
“아이들이 기억을 했으면 싶은 일들에 대해서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해야 해요.” 뇌 연구자인 크리스티네
발호브드의 말이다.
“아이들의 긍정적인 경험을 부모들이 강조할 때가 많아요.”
그렇게 해서 부모는 아이들이 바람직한 인생사를 얻는 데 기여할 수 있다. /
268p
스발바르의 한 국제종자저장고에는 기후 변화와 핵전쟁, 한발과 전염병을 생각하여 지구의 미래를 대비하고자 전 세계의 씨앗들을 깊은 건물
속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씨앗 박스는 심판 날까지 아껴 두려고 만든 것은 아니고, 저축을 한 모든 나라가 지구 전체를 위해 계속해서 백업을
해 두려는 의도이다. 저자는 기억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기억은 사용되기 위한 것이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다. 토머스 서든도프 역시 기억
체계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바로 진화에 있다고 말한다. 생존에 관해서라면 과거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유용할
뿐이다. 오류투성이이고 유연하지만 살아 있는 우리의 기억은 살아 있고 유연한 미래의 비전을 만드는 기능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더라면 인간에게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기억을 미래의 비전과 계획, 꿈과 환상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기억을 어떻게 대하고 이용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해마를 찾아서>는 다양한 관점과 사례를 통해 기억이 우리 뇌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어떠한 속성을 지녔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특별한 과학교양서다. 과학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책이다. 덕분에 최근 치매가 깊어진 외할머니를 바라보며
기억의 허망함에 사로잡혔던 나에게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새삼 위로받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