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존의 질서를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택한 무민네!
낯섦과 고독, 그리움 속에서 변화와 꿈을 쫓아가기로
한 아름다운 성장 이야기!
몇 해 전, 하마를 닮은 듯 순둥순둥한 얼굴에 통통한 몸매를 지닌 무민을 소품숍에서 마주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저 귀여운 캐릭터
하나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과 연작소설 시리즈 중에 하나인 <무민의 겨울>을 읽고서 이
캐릭터가 지닌 선한 영향력 같은 것에 오롯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더욱이 동화를 넘어서 은유적인 문학적 상상력과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 철학적 통찰까지 아우르는 작품이라는 점은 의외로 놀랍기까지 했다. 특히 캐릭터 하나하나에 반영된 인간의 다양한
속성은 때로는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섬뜩하리만치 낯익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 허투루 읽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50여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우리가 여전히 반응할 수 있는 이유이리라.
변화와 이해 그리고
성장
혹독한 첫 겨울나기를 담은 <무민의 겨울> 이후에 또 하나의 무민 연작소설이 찾아왔다. 바로 <무민파파와
바다>다. <무민의 겨울>이 가족 모두 겨울잠을 잔 사이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버린 무민이 홀로 겨울을 보내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무민파파와 바다>는 어느 외딴 등대섬으로 이주한 이들 가족이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각자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8월의 끝자락, 무민 가족은 묵묵히, 쉬지도 지루해하지도 않고 세상을 이루는 작디작은 일을 끊임없이 해 나가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는, 늘 정해진 대로 반복된 생활을 하던 나날이 계속되자 무민파파는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결국 무민파파는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등대가 있는 어느 먼 바다 외딴섬으로 향한다. 무민파파는 실로 오랜만에 가족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과 모험에 대한 설렘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긴 항해 끝에 도착한 등대섬은 그들 가족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어쩐지 척박하고 낯설기만 하다. 등대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어야 할 등대지기는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웃이라고는 말을 잘 섞지 않는 무뚝뚝한 어부 하나뿐이다. 무민파파는 일단 낡고
허름한 등대에 살림을 푼다. 하지만 등댓불을 켜는 일도 실패하고, 바다에 그물을 던져도 바닷말만 잔뜩 올라올 뿐 아무리 일을 하고 또 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무민마마가 더 이상 물고기를 필요치 않아하자 상심에 잠긴 그는 급기야 바다를 연구하고 글로 옮기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왜 땅거미가 질 때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무민파파 혼자 해 볼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까? 무민파파는 가족들과 함께 살기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가족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도무지 이해하질 못했다. 그런데도 이제껏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다. / 104p

무민마마는 무민 골짜기의 여름 섬으로 소풍 가는 꿈을 꾸고는 우울해진다. 향수병이 든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녀는 등대 안쪽 벽에
그리운 무민 골짜기를 그려 넣기 시작한다.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더 커져만 가던 무민마마는 급기야 그림 속으로 들어가 남몰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편, 무민은 덤불숲에서 빈터를 발견해 은신처로 삼고, 한밤중에 알 수 없는 소리에 이끌려 바닷가로 나갔다가 해마들을
만나 마음을 빼앗긴다. 그렇게 밤마다 바닷가로 몰래 내려가 언제 올지 모르는 해마들을 기다리거나 무민 가족의 빛을 따라온 그로크에게 등불을 보여
주러 나가는 등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자신 만의 비밀을 만들어 간다. 이렇듯 등대섬이라는 이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동상이몽처럼 저마다
다른 생각, 다른 꿈을 꾸며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한다.
무민은 무민마마가 젖은 이부자리 위에서 몇 번이나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마침내 적당한 자리를 잡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게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낯선 일은 엄마가 새로운 장소에서 짐을 풀지도 않고,
잠자리도 정리해 주지 않고, 캐러멜을 나눠 주지도 않고 잠들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무민마마의 손가방은 바깥 모래밭 저 멀리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무민은 겁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흥미로웠는데, 이 모든 일이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라는 뜻이었다. / 48p
작고 복수심이 넘치는 두배자루마디개미아과 녀석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이제 다른 녀석이 무민의 발을
물었다. 천천히 뒤로 물러선 무민은 실망스럽고 타는 듯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고 너무 속상했다. 물론 무민보다 먼저 개미들이 이곳에 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땅속에 살고 있으면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가 없으니 불개미는 새나 구름이나 그 밖에 무민 같은 이들이 중요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뭔가를 알 리가 없었다. / 91p

여느 시리즈와는 달리 <무민파파와 바다>에서는 미이, 어부, 그로크 이 세 캐릭터가 매우 의미 있게 읽힌다. 어딘가에서 혼자
지내며 식사 때에만 나타나고 때로는 냉정하게 말을 하기도 하지만 무민이 그로크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이,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지만 무민 가족의 따뜻함에 마음을 여는 어부, 한 시간 넘도록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땅도 두려움에 떨며 시들어 버려서 그곳에는
두 번 다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하던 그로크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오는 무민 덕분에 더 이상 그 차가움을 드러내지 않게 되는 모습
등은 토베 얀손만의 놀라운 은유적 상상력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등대지기가 두고 간 듯한 퍼즐을 무민 가족이 맞추는 장면은 퍼즐을 다
맞추기 전에는 그 조각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서는 늘 예측불가한 일이 펼쳐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하나
맞춰가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내 삶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멋진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어쨌거나 어부는 우리 이웃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누구에게든 이웃은 늘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요.”
/ 121p
“너도 알겠지만, 아빠는 이 바다의 비밀스러운 법칙을 모두 밝혀내고 싶단다. 바다를 좋아하려면 먼저
이해해야 하는 법이거든. 바다가 좋아지지 않으면 이 섬에서 행복할 수가 없을 듯싶구나.” / 232p
“다들 알겠지만, 바다는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거대한 녀석이에요. 바다가 왜 그러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바다를 좋아하면 아무 문제 될 게 없죠……. 뭔가 얻으려면 단점도 받아들여야 하니까.” / 246p


이렇듯 <무민파파와 바다>는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느끼게 되는 심리적인 변화를 캐릭터 하나하나에 투영시켜
그것에 적응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나간다. 그 중에서도 무민파파가 아들 무민에게 “무민, 같이 가자꾸나. 너도 소중한 뭔가를 지키기
위해 싸울 줄 알 때가 됐지.” 하고 독려하는 모습은 깊은 여운을 준다. 이번 작품 <무민파파와 바다>가 무민 가족이 작품에
표면적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연작소설이라 하니 더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가치란 구름 위를 떠다니고, 빨간 장화를 신고, 언제나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는 이 천진난만한 믿음을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고 있을 것만
같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도 무민이라는 캐릭터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