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흡인력 있는 전개, 가독성 높은 문장, 추악한 권력의
민낯에 다가가다!
어느덧 제8회에 이르는 혼불문학상 수상작이 출간되었다. 한중일 각기 다른 세 나라의 민족관과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
제7회 수상작<칼과 혀>의 대담성에 놀라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새 또 한 해가 지났다. 이번 제8회 혼불문학상은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그간 1회 수상작 <난설헌> 때부터 쭉 혼불문학상
수상작을 읽어 온 독자로서 그 어느 작품보다 경쾌하고 한 편의 드라마처럼 유려하게 읽힌 작품이라 남다르게 느껴진다. 전 회 수상작인 <칼과
혀>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혼불문학상이 지닌 가치와 문학적 세계관을 넓혔다면, 이번 수상작인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정치적 욕망의 이중성에 근거한 인간 심리와 권력의 역학 관계에 집중하여 대비를 이루는 점 또한
흥미롭다.
파워 게임을 주도하려는 인간 군상의 추악한
진실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은 독재자 리아민과 그의 전기 작가 박상호가 전기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욕망의 대립과 추악한 권력의 진실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허약함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예순 다섯 살의 나이로 대통령직의 장기 집권을
꿈꾸는 리아민, 과거의 유명세를 붙들고 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통령의 전기를 발판으로 재기를 꿈꾸는 박상호, 여배우 출신으로 트러블
메이커이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영부인 최세희, 특종을 꿈꾸는 유명 정치부 기자 정율리, 리아민의 조력자인 수석비서관 김세원 등의 인물들이 등장해
그들의 날선 욕망을 시종일관 팽팽하게 그려낸다.
소설은 작가 박상호가 과거를 회상하며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행적을 풀어놓는 리아민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생모는 동네 남자들 사이에서 '오백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다. 아이를 지우자던 외할머니의 간곡한
부탁에도 기어코 아이를 낳더니, 이내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버렸고 결국 리아민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났다. 비록 친구로부터 '아비
없는 후레자식'으로 낙인찍혀 내내 놀림과 멸시의 대상이 될 뻔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는 어른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의연하게 사건을 해결해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는 소년으로 자라난다. 이렇듯 몇 번의 독대를 거듭하며 박상호는 리아민의 가슴 아픈 젊은
날의 사랑, 사단장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 이야기, 지금의 영부인인 최세희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어쩐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와는 어쩐지 다른, 혹은 만들어진 듯한 가공의 이야기 같은, 또는 다른 사람의 일화를 자신의
이야기로 덧입힌 듯한 리아민의 일화에 차츰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나 약간의 거짓말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도
서로에게 관해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는 거니까요. 때론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필요하죠. 마찬가집니다. 국민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 필요도
없을뿐더러, 설혹 진실을 각하께서 국민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그들이 진실을 모두 알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53p
"박 작가,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야. 대통령의 기억이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비슷하게 들린다면 당연히 그들의 기억을 삭제해야지, 대통령의 기억을 삭제할 순 없잖아. 안 그래?" / 65p
작가 박상호는 미화된 전기와 오로지 국민과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리아민과 그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려는 리리궁 관계자들의 태도에 넌더리를 느끼면서도, 대통령의 전기가 가져다줄 부와 명성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갈등을 느끼게 된다. 문인들로부터 돈만 쫓는 작가로 비쳐지고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된 글을 써야한다는 것은 작가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인지라,
때로 날선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집필하지 않은 전기가 버젓이 제 이름으로 출간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반발하지 못한다.
오히려 여기저기서 인터뷰가 쇄도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책이 상당한 판매부수를 올리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며 씁쓸하지만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언제나 리리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의 쇼예요. 그이를 중심으로 한 거대하고
화려한 볼거리죠. 그것만이 리리궁의 유일한 룰이에요. 박상호 씨가 앞으로 가져올 결과물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필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거예요." / 223p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양질의 전기를 쓰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바로 허구의
창작밖에 없을 터였다. 결국 나는 거짓말쟁이 작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라고 나 자신에게 씁쓸하게 자문했다. 어떻게 하다가 내가 이런 막다른
상황에까지 처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멍청한 헛똑똑이 작가 박상호가 이 작품으로 재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예전만큼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아주 많이 망할 작품을 그 반의 반만큼만 망하게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최선일 것이다. / 243p
소설은 '독재자'라는 프레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저마다 '욕망' 앞에서 파워 게임을 주도하려는 인간 군상의
추악한 진실을 폭로하듯 까발린다. 리아민은 리아민 대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석비서관은 제왕적 지도자만이 이 나라를 통치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박상호는 작가라는 명성과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정율리는 박상호를 이용해서라도 특종을 거머쥐기 위해,
최세희는 과거를 모두 삭제해서라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저마다 손에 쥐고 있는 주도권을 어떻게 해서든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이들은 적절한 타협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어떤 식으로든 유지하고 지켜내려는 허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나는 지금 시대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 나라를 효율적으로 잘 경영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가 유능한 인재들을 잘 기용하여
국가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 지나치게 감상적인 대통령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 135p
"과연 많은 사람이 원하고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의롭고 옳은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다수결이야말로 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합니다. 다년간의 국정 운영을 통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저희 리리궁의 입장은 한 방향으로 보다 확고해졌습니다. 바로 국가의 고비마다 강력하고 올바른 리더십을 갖춘 제왕적 지도자가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분열을 일삼는 국민들의 의견 따위는 이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 304p
이렇듯 <독재자 리아민의 삶>은 각자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왜곡된 욕망을 쫓는 인간들의 면모를 속도감
있고, 가독성 높은 문장으로 경쾌하게 밀고 간다. 그래서 일단 책을 손에 쥐고 나면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리리궁의 이단아 같은 존재인 영부인 최세희와 작가 박상호의 관계가 은근한 긴장감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흐지부지 되어버리고만 것,
자칫 통속적인 이미지가 더 가깝게 느껴질 법한 작법들이 소설의 밀도를 떨어뜨리는 까닭이다. 촘촘한 구성과 치밀한 심리 묘사, 캐릭터의 정체성이
보다 더 부각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한 해가 흘러갔음을 혼불문학상으로 새삼 느끼게 된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우리 문학이 이렇게
흘러왔구나 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수상작이 우리를 일깨우고 즐겁게 해줄 것인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