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겨울잠을 잔 사이
깨어나 버린 무민의 혹독한 첫 겨울나기!
낯설고 두렵지만 경험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 모두는 한 뼘
더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민 이야기!
꽁꽁 언 골짜기 사이로 소스라치듯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이 눈 더미를 훑고 지나가는 겨울의 숲 속 풍경.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긴긴 겨울잠을 청하고 있는 동물들. 이따금씩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모두가 잠든 사이 불쑥 떠져버린 눈이 내내 감기지
않아 결국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던 작은 새끼 동물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따뜻한 가족의 품속에서 몸을 비집고 나와 차가운
눈밭에 문득 얼굴을 내밀었을 때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에 밀려오는 당혹감과 차츰 고개를 드는 외로움, 그런 와중에도 꿋꿋이 겨울을
나고 있는 여느 동물 친구들 하나쯤은 마주칠 수도 있을 테고 그들을 따라 겨울 세상을 경험해보기로 마음먹고 둥지 밖으로 뛰쳐나올 수도 있는
일이다.
가족 모두가 잠든 사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홀로
겨울나기를 시작한 무민
하마를 닮은 듯 순둥순둥한 얼굴에 통통한 몸매를 지닌 귀여운 캐릭터 무민에게도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한 겨울의 무민 골짜기, 가족 모두가 깊은 겨울잠에 빠져든 가운데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버린 우리의 무민. 집은 눈 더미에 파묻혀
창문도 열리지 않고 집 안은 온통 어둑어둑하고 시계마저 모조리 멈추어버렸다. 덜컥 겁이 난 무민은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혼자 내팽겨쳐진
듯한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엄마인 무민마마를 깨워보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친구인 스너프킨마저 10월에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 봄이
오는 첫 날에 돌아오기로 했다. 외로움에 사무친 무민은 남쪽으로 스너프킨을 마중 가봐야겠다며 바깥 세상으로 나갔다가 뜻밖의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잿빛 어둠이 뒤덮인 골짜기,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모두 사라진 듯한 적막감, 마치 온 세상이 죽어버린 듯한 겨울의 풍경은 무민에게
전에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자, 들어 봐. 어둠의 짐승들
태양을 가져가고 추위를 가져온 너희들
이제 나는 정말 혼자고, 내 다리는 지쳤고
골짜기 나무의 푸른빛이 부질없이 그립고
새파란 베란다와 바다의 파도가 떠오르고
끔찍한 눈 속에서 이제 더는 살기 싫어! / 47p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누군가는 꿈틀하고, 누군가는 그 겨울을 즐기며 살아간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롭고 막막했던 무민 역시 어딘가에서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싱크대 밑에서 살고 있는 눈썹이 덥수룩한 동물,
아빠의 탈의실에 머무는 투티키, 스키와 얼음썰매를 타는 즐거움에 푹 빠진 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녀석들, 벽장 속에 숨어 있던 자신의
조상 트롤, 스키를 타고 나타난 헤물렌, 추위를 피해 들이닥친 손님들까지. 무민은 이제껏 자신이 몰랐던 겨울이라는 낯선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또 다른 낯선 이들을 만나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하게 된다.
무민이 말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녀석은 내가 뭔가 다정한 말을 건네려고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일 년 내내 싱크대 밑에 틀어박혀 있을 텐데!"
투티키가 말했다.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지." / 79p
이처럼 <무민의 겨울>은 무민이 처음 겨울이란 세계를 마주했을 때만 하더라도 유독 외롭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두렵게 느껴졌던 것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법과 다가올 태양과 봄의 기운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점차 마음이 열리는 과정을 담은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다. 특히 난생처음 눈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이 이렇게 오는구나. 땅에서 자라는 줄 알았는데.' 하고 황홀한
기분에 빠져드는 무민의 모습은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새롭게 느껴보는 일이란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겨울! 이제 겨울도 좋아!',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하고 말하는 무민을 보며 이 시간이 그를 얼마나 성장하게 했을지 우리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겨울에는 왜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어? 그랬으면 위로가 되었을 텐데. 내가 여기에서
사과나무가 자란다고 말했었지. 그랬더니 네가 뭐랬어. 하지만 지금은 눈이 자라고 있다며. 그때 내가 우울해하는 줄 몰랐어?"
투티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 159p
스노크메이든이 말했다.
"유리 덮개를 덮어 주자. 추운 밤에도 끄덕없게."
무민이 말했다.
"덮지 않는 게 좋겠어. 알아서 헤쳐 나가도록 내버려 두자. 어려움을 조금 겪고 나면
훨씬 잘 자랄 테니까." / 182p
어쩌면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 내딛는 그 한 걸음 한 걸음 이 혹독한 겨울나기를 시작했던 무민처럼 두려운 일들의
연속일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거야'라고 곁에서 의지가 되어주고 등을 밀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경험이 이제껏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과 깨달음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면, 실수를 하여도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줄 가족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내가 한 모든 경험들이 꽤나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이전에 읽어본 무민의 만화 시리즈가 다채로운 상상력과 풍자에 가까운 유머가 돋보였다면, 소설로 나온 무민 시리즈는
성장 소설의 면모와 철학적인 요소가 보다 더 깊이 있게 느껴져 아이가 읽어도,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흑백 일러스트 덕분에
냉혹한 겨울을 배경으로 한 무민 골짜기의 스산함, 외로움이 더욱 두드러져 그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역시 읽는 재미를 더하니 무민 시리즈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