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정의의 사도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어느 게으름뱅이가 펼치는 한여름밤의 교토
판타지!
천진난만한 검은 머리 아가씨와 남몰래 그녀를 좋아하는 선배의 이야기를 그린 청춘로맨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다시 한 번 더 기묘한 밤의 도쿄 거리를 배경으로 다채로운 캐릭터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 이름도
흥미로운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이다. 너구리 가면에 검음 망토를 두른 기이한 사내, 어딘지 알파카를 닮은 듯한 외모의 남자,
달빛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까지. 모리미 도미히코가 또 어떤 기막힌 하룻밤을 독자에게 선물하려는 것인지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소한 모험을 비웃는 자는 소소한
모험에 운다는 말이 있다. / 42p
교토 교외에 있는 모 화학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청년 고와다는 평일에는 묵묵히 업무에 힘쓰고 주말에는 기숙사에서
이끼 낀 지장보살처럼 빈둥대고 싶어 하는 게으름뱅이다. 그야 말로 골수 게으름뱅이. 바로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주인공이다. 반면, 고와다의
상사인 고토 소장은 무시무시한 풍모에 민머리를 하여 겉으로 봤을 때는 대단한 악당처럼 보이지만 게으른 고와다에게 늘 충실한 주말을 보내라고
조언하는 의외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고와다의 선배인 온다와 그의 여자친구인 모모키 역시 휴일을 철저하게 활용하는 데 열을 올리고 사는 독특한
커플로, 고와다를 끌어내 함께 충실한 주말을 보내려 하지만 고와다는 항상 시큰둥할 뿐이다.
이런 고와다에게도 하나의 고민이 있었으니 폼포코 가면의 사나이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으라는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는
일이었다. 폼포코 가면의 사나이란 이른바 교토의 '정의의 사도'. 그는 하치베묘진의 사자를 자처하며 위기에 처한 교토 시민들을 구하는 데 앞장
서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폼포코 가면을 쓴 정의의 사도가 이 도시를 위해 한 일이란, 기모강을 표류하면서 왕왕 짖던 시바견을 구하고,
비와호도로 옆에서 안경을 떨어뜨려 우물쭈물하던 뚱뚱한 학생을 구하고, 음탕한 어른들이 공동주택에 모아 놓은 외설물이 불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에 틀어박혀 라면도를 연마하려다 신경쇠약에 걸린 가게 주인, 보도기사로 그릇된 원한을 사 송년회 때 습격당한
대학신문부, 매상 감소로 고민하는 상점가 사람들, 보물 지도를 손에 넣고 뇨이가타케 산봉우리에서 조난할 뻔한 소년탐정난 등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이들을 위한 선행으로 게으름을 피울 새가 없이 활약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필이면 골수 게으름뱅이인 고와다에게 그 임무를 맡기려 한다는 게 문제였다.
당신은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공부도 하고 있지요.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생활로 눈을 돌리면 어떠한가요. 충실함이라는 관점으로 인생을 다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소장님은 그런 어려운 소리를 해서 싫어요."
"소장의 의견과 가지 꽃은 천에 하나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젊을 때 놀아
두지 않은 인간이란 나이를 먹고서 이상한 즙이 나오는 법입니다. 남자의 농축액은 젊을 때 전부 배출해 두지 않으면 나처럼 멋진 아저씨가 될 수
없습니다." / 74p
"인간이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깨닫지 못하는 법이에요. 참된 당신은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으려고 바로 이 순간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 괴로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압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갈등을 극복했을 때, 당신은
한층 단련된 멋진 남자가 될 겁니다. 이봐요. 고와다 군. 제가 이토록 멋진 남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 177p
이 사실을 몰래 엿보게 된 우라모토 탐정과 그의 조수인 다마가와. 알파카를 닮은 남자로부터 폼포코 가면 사나이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의뢰를 받고 이를 위해 잠복을 하던 가운데 다마가와는 뜻밖에도 고와다가 폼포코 가면의 계승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고와다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기온 축제가 벌어지는 운명의 토요일 밤, 폼포코 가면은 자신의 도움을 받았던 쓰다로부터 국수 가게에 초대되어
갔다가 자신을 궁지에 몰기 위한 함정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뜻밖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부터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토록 호의로 가득했던 도시가
적의로 가득한 도시로 변모해간다. 폼포코 가면의 팬이라고 호소했던 이들이, 자신의 모둠을 받았던 이들이 하나같이 폼포코 가면을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쫓고 쫓기는 기묘한 난장파티가 시작된다.
그 사이 우리의 게으름뱅이 주인공 고와다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폼포코 가면 뒤에 숨겨진 괴인의 정체는 또
대체 누구일까? 더군다나 정의의 사도도 때로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니, 뭐 이런 친숙한 영웅이 다 있는지. 이처럼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하룻밤 동안 폼포코 가면을 쫓고, 또 도망치는 폼포코 가면을 도우며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한여름밤의 판타지처럼 유쾌하게 펼쳐진다.
거룩한 게으름뱅이란 평범한 사람이 보면 이상한 존재이지만 하늘의 질서와는 맞는
존재이며, 쓸모없어 보이는 가운데 쓸모 있는 사람이다. / 328p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만큼 이채롭고 다양한 캐릭터가 주는
조화를 기대하기엔 어쩐지 아쉬운 작품이지만 나름대로 이 작가만이 선보일 수 있는 소설의 세계관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 다음 작품에서는 또 도쿄의 어느 거리에서, 어떤 인물들이 그곳을 누비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