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 - 고전이론에서 포스트 아인슈타인 이론까지 비주얼 사이언스 북 1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김재호.이문숙 옮김 / 전나무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선입견일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볼 때, 일본에서 출간된 책들 중 가장 뛰어난 분야는 추리 미스테리 소설과 과학 교양서 분야가 아닌가 한다. 과학 교양서의 경우, 특수하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내용의 책들보다 특히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다이제스트적인 책들이 많이 보이고 그만큼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축소와 개량에 뛰어나다는 일본인의 기질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은 그런 개인적인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비주얼 사이언스 북 시리즈의 제1권이다. 책을 시리즈로 발간할 때 아무래도 가장 신경쓰게 되는 것이 1권일 터인데, 이 책은 그만한 값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우선 저자 다케우치 가오루는 고에너지 물리학을 전공한 학자이자 가명으로 추리소설을 쓰기도 하는 작가라고 한다. 현대의 우주론이 결국 물리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볼 때 저자가 물리학 박사라는 점은 내용의 충실성을 신뢰할 수 있게 해주며, 거기에 추리작가로써의 필력과 유연한 사고가 더해져 다이제스트 북에 없어서는 안될 재미를 보장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개방식은 기초적인 우주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아인슈타인 이후의 초끈이론으로 끝맺는 무난하지만 적절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호흡을 짧게 하여 하나의 소주제당 2~3쪽 정도의 분량을 할당하고, 분량의 상당부분은 시리즈 이름에 걸맞게 표나 그림, 사진 등에 할당하고 있다. 쉽게 서술한다고 해도 부분부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다양한 비주얼적 요소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용이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꼭지가 있어도 분량이 적기 때문에 적당히 읽어두고 다음 꼭지로 넘어가는데 부담이 없다는 점도 훌륭하다. 물론 요약이 불가능한 부분을 요약한다던가, 도저히 쉽게 납득시킬 수 없는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어 우주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의 대상 독자를 감안해본다면 거부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배경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전문가가 아니면 이 모든 내용을 알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풍부한 영역을 망라하고 있어, 우주론 전반에 대한 정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시리즈로 이 책에 이어 지구사, 양자론, 시간론 편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몇권의 책을 보았지만 아직도 과학이라기보다 철학처럼 느껴지는 양자론이 어떻게 풀이되어 나올지, 양자론 편의 출간이 기대된다. 열심히 과학을 공부하고 있을 중고등학생 및 개인적으로 과학에 흥미가 많은 일반인들에게 추천할만한 책들이 계속 출간된다니 반가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양장)
레베카 크누스 지음, 강창래 옮김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책의 내용을 한줄로 요약하는 것이 제목이라고 한다면 이만큼 적절한 제목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원제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Libricde", 인종말살을 뜻하는 genocide나 문화말살을 뜻하는 ethnocide와 병렬시킬 수 있는 단어로써, 작가는 libricid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올라와있는 단어인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단어를 작가는 '특히 20세기에 대규모로 저질러진, 정부가 승인한 책과 도서관 파괴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책의 학살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전방위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논문을 연상시키는 문투와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전체를 구성하는 9개의 장 역시 논문의 구조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우선 1~3장은 libricide에 대한 개관 및 도서관의 발달사와 그 기능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 부분에서 이미 작가의 주제의식과 결론이 명백하게 제시된다.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재미있는 부분은 아니었고 따라서 수월히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4~8장은 이런 주제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예화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명사라 할 나치 독일와 발칸반도를 황폐화시킨 세르비아,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쿠웨이트를 침략했던 이라크, 문화혁명의 이름 하에 피의 숙청을 행한 중국,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강대한 간섭하에 소멸의 위기에 놓은 티베트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20세기의 libricide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정치, 사회, 문화 면에서 해부하다시피 파헤쳐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libricide를 막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강조하며 끝맺음을 짓는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풍부한 역자의 주석이었다. 이 책은 느티나무도서관 장서개발전문위원인 강창래라는 분께서 번역하셨는데, 용어의 설명이나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주석이 달려 있었다. 책이 역자의 서문으로 시작하여 역자의 후기로 끝나고 있는데, 찬찬히 읽어보면 역자가 얼마나 공을 들여 번역을 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외국서적, 특히 전문적인 내용의 책일 경우, 적절하지 못한 번역은 안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더욱 읽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공들인 번역과 풍부한 주석이 더해져 어려운 책을 보다 편안한 책으로 만들어낸 듯하다. 

문득 언령(言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이 말은 한번 뱉어진 말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람을 구속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말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사람을 해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대중의 현명함을 드러내고 있다. 한번 뱉어지면 휘발되어 버리는 말이 그럴진대 그 말을 기록한 글은 어떠할 것인가, 또 그 글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쌓아낸 책은 또 어떠할 것인가.. 권력자라면 누구든 지식이 권력임을 알고 있기에 지식의 근본인 책을 지배하고 때때로 파괴하려는 노력은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과 사람은 학살할 수 있을지언정 언령(言靈)보다 강력한 서령(書靈)은 죽지 않았다. 책을 학살하는 이들이 스러지고 난 후에도 결국 서령(書靈)만은 오롯이 남아있을 터..

이데올로기에 담아낸 어리석은 한줌 욕심을 버리고 책에 담겨진 인류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사 전쟁의 기술 - 한국사의 판도를 바꿔 놓은 36가지 책략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Art of Korean Wars입니다. 사실 한글 제목보다 이 제목이 오히려 책의 내용을 잘 드러내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흔히 손자병법을 The Art of Wars 라고 하잖아요?  이 책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36가지의 전략을 우리 역사 속의 두, 세 장면과 나란히 두고 하나씩 하나씩 곱씹어보는 책이거든요. 제목을 '한국사로 읽는 손자병법'이라고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지금의 제목이 좀 더 무게감 있게 다가오기는 하지만요.
 
이 책에서 언급되는 한국사의 장면장면들은 모두 고교단계의 국사를 배웠다면 왠만큼 알만할 친밀한 사건들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장면보다 어느 정도 알려진 장면들을 택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되요. 일단 꼭지의 제목만 봐도 약간이나마 전개가 예측 되면서 흥미가 생기게 되거든요. 특히 2개의 장면을 하나의 꼭지에 대해 병렬시켜둔 것도 좋고요. 좀 더 넓은 시야로 전략의 적용에 대해서 보게 되니까요. 동양고전이 대부분 그렇듯이 삶에 대한 현실적인 통찰력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또 국사에 대한 지식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중고교생에게 더욱 유익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손자병법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가진 고질적 논쟁은 이 책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삼국지를 10번 읽은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도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면 손자병법이나 군주론은 3번 읽은 사람의 곁에도 가지 말아야 될테니까요. 병법이라는 것이 결국 효과적으로 타인을 '짓밟는' 방법인 이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량할 수는 없고 가치관은 다양하며 역사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책의 가치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작가 역시 손자병법은 오히려 선량한 사람이 읽어두어야할 책이라고 굳이 덧붙였을 것입니다. 예로 든 사건들 역시 '역사적으로 정당하다'라고 판단되는 사건들보다 '승리했다'라고 판단되는 사건들 위주입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읽으면서 약간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게 정상일 듯 싶네요.
 
결국 현명한 사람은 세상과 사람을 넓게 보고 넓게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훈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분명 교훈일테고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곱씹어보면서 눈을 씻어내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특히 청소년들에게라면 분명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석유 종말시계 - '포브스' 수석기자가 전격 공개하는 21세기 충격 리포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석 연료 고갈의 문제가 논의된 지 적어도 수십년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 내에서 화석 자원이 유한하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예측 가능하니까.. 더하여 20년전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현대 사회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현실적인 고통'으로 말이다.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써는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은 이 문제를 이 책은 직시하고자 한다.
 

이 책은 유가가 갤런당 4달러인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6달러, 8달러, 10달러... 20달러에까지 이르는 동안 변화하는 우리의 생활상을 예측해보고 있다. 그렇다고 시대마다의 변화상을 모두 제시하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는다.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가격경쟁력에서 한계에 부딪혀 붕괴해버리는 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산업을 예지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예컨대 유가가 갤런당 10달러를 넘어가면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채산상 운용이 불가능해지므로, 대신 가격경쟁력이 있는 전기자동차나 기차가 대체운송수단이 될 것이라는 식이다. 무작정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예측가능한 부분만을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이런 유의 책은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써 독자를 유혹하기 마련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이런 점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선동적인 내용은 흥미는 유발할 수 있어도 현실적으로는 해악을 끼치기 십상이니 말이다. 기자로써의 균형감각이 돋보인 부분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저자는 석유기반산업이 붕괴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크게 바뀔 것임은 인정하지만, 삶의 양상이 비참해질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분명 물질적 풍요로움은 감소할 것이지만 대신 물질에 밀려 사라져갔던 전통적인 삶의 가치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으니 당연히 환경은 회복되어 가고, 원거리 이동이 불편해지므로 다시한번 집단적 가치들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모해간다. 세계분업화로 죽어가던 국내산업들이 회복됨으로써 비록 양적으로는 적지만 질적으로는 뛰어난 제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할 것이다.' 석유기반산업의 붕괴가 파산을 가져오는 대신 대체산업이 발달하여 인구부양력을 유지할 정도로 연착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작가는 애매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작가의 이런 시각은 다른 의미에서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시각은 풍요를 행복과 등치시키는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말그대로 현재 '운명'이 되어버린 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에 목숨걸던 사회는 석유종말시계가 똑딱거리며 흘러감에 따라 점차 더 큰 고통을 겪어야 된다는 아이러니.. 유쾌하다고 얘기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이 책이 얼마나 정확히 시대의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지 나의 지식으로는 말하기 어렵다. 이런 내 눈에도 이곳저곳에 생략과 축소가 엿보인 점을 감안할 때 의심해볼 구석은 많을 것이다. 차라리 현대문명에 대해 비판하는, 혹은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곳곳에 특유의 입담과 유머가 읽는 맛을 더해주어 수월히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나, 철저히 미국 사회에 기반하여 분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피부에 닿는 느낌이 떨어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교외생활과 자동차를 이용한 생활에 익숙한 미국인에게 석유인상이 가져올 생활상의 변화는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의미에서 주석이 많이 붙어야되는 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다못해 단위라도 마일/파운드 대신 킬로미터/그램으로 변환시켜주었더라면 읽기도 편하고 현실감이 더해졌을 것이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두려움 때문에 애써 외면하던 대상에 예측하지 못했던 면이 있었음을 보게 해주고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이로움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장은 역사다 - 전선기자 정문태가 기록한 아시아 현대사
정문태 지음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문태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책장을 덮고 그의 이력을 찾아보고서야 '아, 우리나라에도 전선기자가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무지함을 탓해야 할까, 사회의 무심함을 탓해야 할까.. 최전선을 뛰어다니는 기자답게 글 전체를 팽팽하게 당겨놓았다. 가끔씩 사전을 찾아보게 하는 독특한 어휘도 글 읽는 재미를 더해줄 뿐이다. 글 전체에 기자의 감정이 끓어넘쳐 '이 기자, 지금까지 고생 좀 했겠구나. 앞으로도 고생문이 훤할테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정문태 기자의 3번째 책이다. 표지에는 아시아 현대사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동남아시아 현대사 1990년대부터 2010년대를 다루고 있다. 다루고 있는 나라는 인도네시아, 아쩨, 동티모르, 버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타이의 8개국. 현장의 그날, 그곳에서 쓰여진 기사들을 모아서 다듬은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그날의 신문을 하나 하나 찾아 읽어 내려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겅중겅중 시간을 뛰어넘는데도 어색함은 없고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중간중간 배겨진 사진들도 신문에서 오려 붙힌 듯 생생함을 더한다. 중간중간 현장 한가운데 서있는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가 더해진다. 한장 내지 두장의 이 인터뷰가 이 책의 백미다! 앞서 깔아둔 사실들이 배경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쉼쉬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이 현실의 인물상과 얼마나 일치할지는 작가를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의 중간중간 비져나오는 욕망과 거짓, 그리고 진심을 잡아채는 손맛이 짜릿하다. 

글맛을 이야기했지만 그것만으로 달아내기에는 이 책에 담긴 역사의 핏값이 너무 값싸게 느껴진다. 아시아의 구식민국가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나 비슷한 형세의 가시밭길을 헤쳐와야 했는지... 피가 흐르지 않는 역사가 어디 있느냐 한다. 하지만 소위 근대화 이전의 무력했던 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그 무력함을 이용해 배를 채운 제국주의 국가들이 얽혀진 역사의 그림자가 이 책이 그려내는 현대사 속에 너무나도 진하게 드리워지고 있다. 그런 그림자 밑에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를 외치는 것은 비겁함에 다름 아니다. 눈이 있는 자라면 이렇게나 닮은 꼴의 역사를 밟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찾아감이 당연할 터.. 제발로 걷을 수 있게 되고서도 야심과 이권 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으니...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자들은 그 비판에 터잡아 제 배를 불리고, 그리 배불리는 이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야욕의 덫에 빠져 서로의 다리를 잡고 늘어질 뿐이다. 다만 누구를 탓할 것인가.. 책을 읽는 중간중간 '기자답지 못하게' 뿜어져나오는 파토스를 지적하려다가도, 무지함 뒤에서 변명했던 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할 뿐이니.. 차라리 이러한 흐름 끝에 진정한 '역사의 완성'이 당위로 다가온다면 위안이라도 되련만.. 작가가 언뜻 내비치는 희망의 끈들이 반가워 기대해볼 따름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역사는 그대로 우리의 거울이다. 아직도 과거의 얼룩을 지워내지 못한 우리의 얼굴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 얼룩이 보이면 얼른 닦아내야할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거울이 되어주고 그들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준다면 말끔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날도 빨리 다가오지나 않을까... 물건너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이들도 이 거울을 보면서 덕지덕지 붙은 욕심을 덜어낸다면 더 좋겠고..  

이처럼 뒷맛이 쓴 책을 펴낼 수 있었던 작가의 20년 기자 뚝심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