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양장)
레베카 크누스 지음, 강창래 옮김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책의 내용을 한줄로 요약하는 것이 제목이라고 한다면 이만큼 적절한 제목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원제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Libricde", 인종말살을 뜻하는 genocide나 문화말살을 뜻하는 ethnocide와 병렬시킬 수 있는 단어로써, 작가는 libricid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올라와있는 단어인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단어를 작가는 '특히 20세기에 대규모로 저질러진, 정부가 승인한 책과 도서관 파괴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책의 학살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전방위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논문을 연상시키는 문투와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전체를 구성하는 9개의 장 역시 논문의 구조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우선 1~3장은 libricide에 대한 개관 및 도서관의 발달사와 그 기능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 부분에서 이미 작가의 주제의식과 결론이 명백하게 제시된다.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재미있는 부분은 아니었고 따라서 수월히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4~8장은 이런 주제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예화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명사라 할 나치 독일와 발칸반도를 황폐화시킨 세르비아,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쿠웨이트를 침략했던 이라크, 문화혁명의 이름 하에 피의 숙청을 행한 중국,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강대한 간섭하에 소멸의 위기에 놓은 티베트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20세기의 libricide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정치, 사회, 문화 면에서 해부하다시피 파헤쳐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libricide를 막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강조하며 끝맺음을 짓는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풍부한 역자의 주석이었다. 이 책은 느티나무도서관 장서개발전문위원인 강창래라는 분께서 번역하셨는데, 용어의 설명이나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주석이 달려 있었다. 책이 역자의 서문으로 시작하여 역자의 후기로 끝나고 있는데, 찬찬히 읽어보면 역자가 얼마나 공을 들여 번역을 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외국서적, 특히 전문적인 내용의 책일 경우, 적절하지 못한 번역은 안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더욱 읽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공들인 번역과 풍부한 주석이 더해져 어려운 책을 보다 편안한 책으로 만들어낸 듯하다.
문득 언령(言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이 말은 한번 뱉어진 말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람을 구속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말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사람을 해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대중의 현명함을 드러내고 있다. 한번 뱉어지면 휘발되어 버리는 말이 그럴진대 그 말을 기록한 글은 어떠할 것인가, 또 그 글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쌓아낸 책은 또 어떠할 것인가.. 권력자라면 누구든 지식이 권력임을 알고 있기에 지식의 근본인 책을 지배하고 때때로 파괴하려는 노력은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과 사람은 학살할 수 있을지언정 언령(言靈)보다 강력한 서령(書靈)은 죽지 않았다. 책을 학살하는 이들이 스러지고 난 후에도 결국 서령(書靈)만은 오롯이 남아있을 터..
이데올로기에 담아낸 어리석은 한줌 욕심을 버리고 책에 담겨진 인류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