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역사다 - 전선기자 정문태가 기록한 아시아 현대사
정문태 지음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문태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책장을 덮고 그의 이력을 찾아보고서야 '아, 우리나라에도 전선기자가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무지함을 탓해야 할까, 사회의 무심함을 탓해야 할까.. 최전선을 뛰어다니는 기자답게 글 전체를 팽팽하게 당겨놓았다. 가끔씩 사전을 찾아보게 하는 독특한 어휘도 글 읽는 재미를 더해줄 뿐이다. 글 전체에 기자의 감정이 끓어넘쳐 '이 기자, 지금까지 고생 좀 했겠구나. 앞으로도 고생문이 훤할테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정문태 기자의 3번째 책이다. 표지에는 아시아 현대사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동남아시아 현대사 1990년대부터 2010년대를 다루고 있다. 다루고 있는 나라는 인도네시아, 아쩨, 동티모르, 버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타이의 8개국. 현장의 그날, 그곳에서 쓰여진 기사들을 모아서 다듬은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그날의 신문을 하나 하나 찾아 읽어 내려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겅중겅중 시간을 뛰어넘는데도 어색함은 없고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중간중간 배겨진 사진들도 신문에서 오려 붙힌 듯 생생함을 더한다. 중간중간 현장 한가운데 서있는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가 더해진다. 한장 내지 두장의 이 인터뷰가 이 책의 백미다! 앞서 깔아둔 사실들이 배경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쉼쉬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이 현실의 인물상과 얼마나 일치할지는 작가를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의 중간중간 비져나오는 욕망과 거짓, 그리고 진심을 잡아채는 손맛이 짜릿하다. 

글맛을 이야기했지만 그것만으로 달아내기에는 이 책에 담긴 역사의 핏값이 너무 값싸게 느껴진다. 아시아의 구식민국가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나 비슷한 형세의 가시밭길을 헤쳐와야 했는지... 피가 흐르지 않는 역사가 어디 있느냐 한다. 하지만 소위 근대화 이전의 무력했던 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그 무력함을 이용해 배를 채운 제국주의 국가들이 얽혀진 역사의 그림자가 이 책이 그려내는 현대사 속에 너무나도 진하게 드리워지고 있다. 그런 그림자 밑에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를 외치는 것은 비겁함에 다름 아니다. 눈이 있는 자라면 이렇게나 닮은 꼴의 역사를 밟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찾아감이 당연할 터.. 제발로 걷을 수 있게 되고서도 야심과 이권 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으니...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자들은 그 비판에 터잡아 제 배를 불리고, 그리 배불리는 이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야욕의 덫에 빠져 서로의 다리를 잡고 늘어질 뿐이다. 다만 누구를 탓할 것인가.. 책을 읽는 중간중간 '기자답지 못하게' 뿜어져나오는 파토스를 지적하려다가도, 무지함 뒤에서 변명했던 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할 뿐이니.. 차라리 이러한 흐름 끝에 진정한 '역사의 완성'이 당위로 다가온다면 위안이라도 되련만.. 작가가 언뜻 내비치는 희망의 끈들이 반가워 기대해볼 따름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역사는 그대로 우리의 거울이다. 아직도 과거의 얼룩을 지워내지 못한 우리의 얼굴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 얼룩이 보이면 얼른 닦아내야할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거울이 되어주고 그들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준다면 말끔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날도 빨리 다가오지나 않을까... 물건너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이들도 이 거울을 보면서 덕지덕지 붙은 욕심을 덜어낸다면 더 좋겠고..  

이처럼 뒷맛이 쓴 책을 펴낼 수 있었던 작가의 20년 기자 뚝심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