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의 배신
라파엘 M. 보넬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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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조카와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직장에서 막 돌아온 조카는 아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는 하는데 아이를 안아주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물어보려고 하는데, 조카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엄마가 회사에서 이제 와서 옷이 더러워. 그래서 우리 사랑하는 ㅇㅇ 이를 못 안아주겠어. 이해하지? 집에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안아줄게, 사랑해.'
아이를 못 안아주는 이유는 회사에서 근무할 때 입은 옷이 더러워서였다. 먼지 나고 더러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급스러운 회사 사무실에서 의자에 내 앉아서 일을 했을 텐데.. 뭐가 더럽다고 그러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따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미세먼지 이야기가 나왔다. 조카는 열을 내면서 미세먼지가 얼마나 아이한테 위험한데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다니는 아이 돌보는 할머니나 엄마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다고 하는데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말문이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돌아서면서 내가 아이를 키울 때를 돌아보았다. 비슷했다. 나의 경우도. 학교 숙제를 다 하지 않으면 다 할 때까지 내가 안달해서 다그치기 일쑤였고, 공부에도 일일이 간섭하고 지도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적해댔다. 이유는 완벽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였을까? 아님 완벽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아마 두 가지 다였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무엇을 잘 해냈는가 하는 성과가 중요했다.

라파엘 보넬리의 <완벽의 배신>은 이러한 '완벽'이 결코 훌륭한 생각이 아님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요즘의 성과 지상주의가 완벽주의를 낳았으며, 이런 완벽주의는 자신을 계발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방어기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특히 번아웃 증후군, 식이장애, 우울증, 강박장애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정신질환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우선 이런 완벽주의의 가면을 벗기고 성과 지향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불완전한 인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완벽주의에 대한 사례는 육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와 성형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다이어트와 성형은 우리의 몸을 조작 가능한 물건으로 여기고 있다. 태어나면서 갖게 된 얼굴, 신체를 부정하고 사회가 주입한 이상적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잘 가꾸는 것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

"완벽주의자의 이기심은 진정한 내적 성장, 진정한 내면화, 진정한 금욕, 진정한 박애 정신을 방해한다. 완벽주의자는 부끄러움을 겸손으로 혼동하며, 불감증을 순결로, 감상주의를 경건한 마음으로, 두려움을 지혜로, 멍청함을 선행으로, 굴복을 이해심으로, 나태를 평화로, 빈둥거림을 부드러움으로, 평범함을 절제로, 과도한 권력욕을 열정으로, 미신을 종교로, 욕망을 죄업으로 착각한다. '- 토렐로

우리는 지금까지 완벽주의를 노력이라고 성실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열정이 가득 넘친다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평을 얹어 대단한 사람으로 치켜세웠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지금 조카의 양육방식은 그렇게 우리가 쌓아 온 결과물에 또 조금은 더 나아간 듯하다. 나의 잘못이다. 성과, 성장을 마구 쫓던. 더 이상 확대 재생산되지 않도록 깨닫고 바꿔 나가야 한다.

완벽의 배신

저자 라파엘 M. 보넬리

출판 와이즈베리

발매 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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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지성을 탐험하다 김민웅의 인문정신 1
김민웅 지음 / 한길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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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한다. 인문학은 판매되는 책의 제목에서만 보이지 않고 내가 자주 이용하는 백화점과 마트의 문화센터 강좌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문학의 기초를 쌓아줍네 하는 책들, 그 많은 주제들을(철학, 역사, 문학, 심리학 등등) 단 한 권에 잘(?) 정리해서 그 한 권만 잘 읽으면 어디서든지 말발이 설 정도의 언사는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겨주는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 그런 저자들이 여기저기 방송에 나와 강의를 하고 다닌다.
심지어는 그 어렵다는 인문학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법(?)을 가르쳐주는 책도 있으니, 인문학 열풍인지, 광풍인지 어지럽기만 하다. 이런 인문학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사랑(?)은 인문학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기업에까지 이른다.
기업의 입장에서 인문학은 실은 불편해야 할 학문이 아닐까?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근간이 '비판적 사고'일텐데,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이런 '비판'을 좋아할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인문학의 유행이 슬프기만 하다. 인문학을 토익같이 하나의 스펙처럼 여기는 학교와 기업, 혹은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며 이런저런 사상가와 역사적 사건을 입에 올리며 젠체하는 데 이용되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스럽다. 여기에는 물론 나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하나의 멋으로 유행하고 있는 곧 소비되어 소진되어버릴 그런 상품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김민웅 교수는 이런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유행을 우려한다. 자칫 지적 유희로 흐를 수 있는 인문학은 '우리의 삶, 우리 사회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시대가 근본적으로 봉착한 문제를 존재 전체의 위기감으로 성찰해나가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인류 문명사에 진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발견되는 '모험적 탐색자'들의 생각, 활동, 그리고 그들의 책에 대한 안내서로 <시대와 정신을 탐하다>를 썼다.
그가 우리에게 안내한 '모험적 탐색자'들은 한나 아렌트, 프리드리히 엥겔스, 슬라보예 지젝, 브루스 커밍스 같은 외국의 사상가들뿐만 아니라 도정일, 윤구병, 함석헌, 최인훈, 조봉암, 박재동 등 우리나라의 사상가와 작자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인물을 또 어떤 이들은 그의 저서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문화제국주의와 싸우는 철학자-슬라보예 지젝' 장에서 지젝의 책의 일부를 소개한 부분은 꼭 기억해두고 싶다

역사의 반복이라는 헤겔의 논리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반복을 통해 애초에는 우연이라고 보였던 일들이 마침내 진정한 실체를 갖는 현실이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있어서 미성숙한 시도의 실패는 종국적인 승리의 조건을 창출한다.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기 마련 아닌가? 실패하면서, 그 실패는 보다 깊은 의미를 총체적으로 획득하게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본질에서 후퇴하는 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혁명의 열정을 과거의 흘러간 감상으로 모독하는 시대를 먼저 깨뜨리지 않고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없다. 그런 위축된 감정과 사유의 공간에 권력과 자본은 보이지 않는 지배자가 된다. 지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말했듯이, "한낮에도 꿈을 꾸는 자들이다."

지금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내 문제로 느끼며 아파한 적이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문제, 세월호, 강정마을, 그리고 수요일의 집회 등등...
나는 그것들을 입에 올리기만 했지 나의 문제로 내 삶의 문제로 깊이 받아들이고 행동한 적이 없었다. 우리를 앞서간 '모험적 탐색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한낮에도 꿈꾸는 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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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 인문고전 깊이읽기 20
권오숙 지음 / 한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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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 대한 가장 유명한 말은 바로 토머스 칼라일의 이 말일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도제국과도 바꾸지 않겠다.'

물론 인도 사람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지만, 그만큼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오직 그들만의 자부심과 애정은 아닌 듯싶다. 수많은 문학가와 학자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수많은 명문장을 남기고 있으니.
아마 나의 경우는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이 경우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즐길 수 없는 사람은 불쌍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는 '알아야 할 것 같은 작가'지만 그의 문장이 낯설어 접근이 쉽지 않은 그런 작가였다. 소설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편이지만, 희곡은 낯설고 멀다. 더구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이상한 어투의 희곡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힘들다. 그러다 보니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들어만 본' 게 대부분이었다.

이런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는 한길사의 인문고전 깊이 읽기 시리즈의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가 되어 줄 듯하다. 셰익스피어와 나 사이에 흐르는 깊고 긴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도록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각 작품을 그 시대적 배경과 함께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엘리엇이 '문학계의 모나리자'라고 평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가 많고 해석이 애매한 <햄릿>의 신비로움을  햄릿의 문장과 함께 여러 해석들을 알려주어 우리가 모나리자에 감동하듯 햄릿에 감동받게 한다.
우리는 흔히 희곡을 비극과 희극으로 분명히 나누곤 하는데, 새뮤얼 존슨의 평가처럼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희극도 비극도 아닌 독특함이 있다. 새뮤얼 존슨은 이 세상이 그러하듯이 선도 악도 기쁨도 슬픔도 다 들어있어 세상의 이치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눈물이 줄줄 흐르게 만드는 상황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광대의 농담을 배치하는 '희극적 긴장완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종종 등장한다.

왜 지금도 여전히 셰익스피어는 읽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구했다. 셰익스피어의 생각처럼 이 세상은 모두가 연극 무대이며 절대 권력을 누리는 왕도 그 이면에는 인간적인 고뇌와 실수 운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면이 존재하며, 여성과 남성을 둘러싼 욕망과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성격적 결함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희극과 비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셰익스피어는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숱한 오해(베니스의 상인의 경우 반유대주의 신화를 강화한다거나, 절대왕정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거나)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신화가 된 데에는 이런 탐색이 있어서 일 것이다.

여성과 픽션에 대해 '자기만의 방'과 연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면서 셰익스피어의 누이를 상상하며 재능이 있는 여성이라도 그런 시대에 여성은 글을 쓰며 살 수 없었다고 강조하던 버지니아 울프도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렇게 감동한다.
'나는 글쓰기를 끝내자마자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실로 셰익스피어는 문학 전체를 뛰어넘었다.'

이제 나도 셰익스피어에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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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날개 - 뉴베리 아너 상 수상작
로렌스 옙 지음, 김연수 옮김 / 소년한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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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옙의 <용의 날개>는 쉽고 재미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대로 혹은 들은 대로, 아는 대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만약 어른의 눈과 입으로 전달했다면 상당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주인공 월영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양귀(바다를 건너온 귀신, 서양 사람)의 나라로 돈을 벌러 떠났다. 월영도 아버지를 만나러 양귀의 나라, 황금산의 나라 미국으로 떠난다. 무사히 만난 두 사람은 미국인들이 사는 곳과 떨어진 중국인 마을에서 살지만, 아버지가 일하는 세탁소 삼촌의 아들과 다툼으로 중국인 동료들의 배척을 받아 양귀들(미스 휘틀로와 조카 로빈)의 사회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연을 잘 만들었고, 바람을 타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풍기'로 불린다. 아버지 '풍기'는 자신이 전생에 '용'이었다고 생각하고 용처럼 나는 것을 꿈꾼다. 그러던 중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발생하고 이들의 터전은 사라진다. 하지만 아버지 풍기와 월영은 아버지의 꿈, 용이 되어 나는 것, 이 책에서는 라이트  형제의 도움을 살짝 받으며 비행기를 만들어 날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미국의 이민 배척 주의, 그 당시에는 '중국인 배척법'이 있다.  중국인들은 1840년대 캘리포니아 금 채굴과 1860년대 대륙 간 횡단철도 건설 때 미국으로 이민 왔다. 이 당시에는 중국인에 대해 우호적이던 미국은 금맥이 끊기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반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인들은 광산과 철도건설에서 쫓겨나 식당이나 세탁소에서 저임금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는 1882년 중국인 이민을 중단하고 중국인을 배척하는 중국인 배척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네이버 검색으로 )

이 책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배경으로 나온다. 게다가 중국인 내부의 문제도 심각하다. 아편과 도박, 그리고 자신들끼리 세력을 나눠 싸우는 일도 흔했다.

그 속에서 월영의 아버지 풍기는 독특한 인물이다. 적극적으로 양귀의 언어를 배우고 양귀의 사회로 뛰어들어가 동화된다. 하지만 또한 자신이 고향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연'에 대한 꿈은 더 커져서 '비행기'로 변한다.

황금산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 양귀의 나라로 온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들만의 '황금산'을 발견한다.

그제야 나는 나만의 황금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황금으로 만든 산. 그건 황금처럼 값비싼 물건으로 이뤄진 산이 아니라 사람들로 이뤄진 산이었다. 가게 사람들이나 미스 휘틀로 같은 사람들로 이뤄진
산.
그 산을 떠나오고 나서야 나는 내가 머물렀던 곳이 바로 황금으로 만든 산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산동네에 살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그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면서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순수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날 날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은 이제 하찮고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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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 좋은 삶을 향한 공공철학 논쟁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 옮김, 김선욱 해제 / 와이즈베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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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주제만 읽어도 좋다

국가의 복권사업
광고와 상업주의의 학교 점령
역사적 인물의 개인적인 물품이 매매되는 것에 대해
낙태와 동성애
롤스와 칸트의 철학

이번에 읽은 마이클 샌델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는 마이클 샌델의 기고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논란거리를 다루며 정치와 도덕의 관계, 그 속에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가?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길지 않은 글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어 좋다. 특히 한 주제를 읽고 바로 다음의 글을 읽지 않고 관심이 가는 주제만 읽어도 좋은 책이다. 물론 모든 주제가 흥미롭기는 하다.

이 책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미국의 대선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 신문과 방송에서도 많이 다루고 있는 샌더스와 트럼프의 선전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대한 대중적 저항" 이라고 진단한다. 다른 이들은 이 현상을 좌경화다 우경화다 우려를 하고 있다. 하지만 샌델은 양당이 기득권층이 수용하는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상류층만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의 삶은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이 책의 66페이지에서 다시 언급된다.

최근 몇 십 년 사이 개인의 권리와 자격이 확대되고 참정권이 증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자신의 이해와 통제를 넘어선 비인간적인 권력구조 속에 갇혀 있음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 10년간의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 하락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자신감을 무너뜨렸다.


이런 문제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이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샌델은 이 과정에서 정의가 정치에서 소멸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자 국가 공화국은 소멸했다. 전쟁처럼 지극히 예외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국가는 그 전반에 걸쳐 형성적 또는 구성적 공동체에 필수적인 공통적 자기이해를 배양하기에 너무 광대한 규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우리의 관행과 제도에서는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는 공공철학에서 공정한 절차를 지향하는 공공철학으로, 선의 정치에서 권리의 정치로, 국가 공화국에서 절차적 공화국으로 옮아가는 점진적 변이가 일어났다.  절차적 공화정 관행에서 그 철학이 예시한 광범위한 경향 두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밀어내는 경향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의존하는 특정 공동체 형태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경향이다. 공공생활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많이 연루되어 있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분리되어 있다. 자유롭기보다는 무력하고, 의지와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관계와 의무의 그물에 뒤얽혀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을 허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관대한 자기정의나 공통의 귀속 의식에 구애받지 않는 무연고적 자아 말이다.
무연고적 자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 연고가 없는 고립적이고 유리된 자아.

공적 문제와 관련된 도덕의 영역을 다루는 정치 의제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의 관심은 공무원의 개인적 악덕으로 옮겨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의 이면을 살펴보려 하지도 않고(아니 어쩌면 살펴보고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해서 못 보게 의도적으로 의제를 그렇게 설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문제를 '개인의 부도덕한 행위'로 몰아가 그 개인만을 처벌하고만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적 문제와 관련된 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답을 얻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많은 질문들이 이어진다. 과연 정치적인 의제로 '도덕'을 상기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여전히 개인의 '성공'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공'의 이익을 주장하는 것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처음에만 크고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사그라지는 목소리가 되지는 않을까? 그저 말하기만 좋은, 행동으로 연결되기 힘든 주제가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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