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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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어.

이 이야기는 어느 날 갑자기 66세의 한 여성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정말 한 점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데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자살은 아니다. 그 여인의 아들은 나(엘레나 그레코-레누차라고 불림)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린다. 그녀는 안다. 그녀가 소원대로 완전히 사라졌음을. 그녀는 30년 전부터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전화는 그녀를 사라진 릴라와의 추억으로 데려간다. 이렇게 레누차와 릴라의 이야기는 이 이쁜 표지의 책 속에 펼쳐진다. 이 책은 독자를 이들의 과거뿐만 아니라 독자의 과거로 데리고 간다.

레누차가 만난 '릴라'라는 아이. 그녀는 폭력으로 가득한 이들의 어린 시절에 레누차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친구다.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없던 드러나지 않던 레누차에게 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아이였다. 릴라는 레누차의 기준이 된다. 엄마처럼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가진 레누차에게 늘씬한 다리의 릴라는 영웅이다. 그녀는 스스로 글자를 깨친 아이일 뿐 아니라 놀라운 능력을 가진 친구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한계를 넘을 줄 아는 아이, 그녀는 레누차의 '눈부신 친구'였다.

어렵고 힘든 시절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다들 일을 하던 그 시절, 공부를 잘 하던 두 친구는 중학교 입학을 하기로 하지만, 이쯤에서 그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그리고 뒤바뀐 길을 걷게 된다. 타고난 영리함으로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던 릴라는 아버지와 함께 구둣방으로 릴라와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하던 레누차는 진학을 하게 된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뒤바뀌는 한 시점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바다로 가야 했는데 가지 못 했다. 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얻어맞았다. 그 과정에서 릴라와 나의 사고방식이 뒤바뀌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비가 와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나는 익숙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느껴본 그 거리감은 모든 걱정과 인간관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반면 릴라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후회했으며 바다를 포기하고 우리 동네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1950년대 후반 이탈리아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흔히 보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싸움과 폭력으로 시끄럽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서로에게 퍼부어대던. 그 속에서 릴라와 레누차는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난다. 그들 둘만의 우정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숨 쉬던 이들의 이야기도 즐겁다. 문득문득 나의 어린 시절과 엮여 더 다채롭게 펼쳐지기도 한다.

지금은 너무도 많이 멀어져 있는(공간으로도 그리고 시간으로도) 그때가 많이 생각났다. 갑자기 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던 친구와 연락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먼저 다가와 말벗이 되어 주던 착하디착한 한 친구의 목소리는 그렇게 또 멀리 나를 데려다 놓았다. 이 책처럼.

이 둘의 우정은 릴라의 결혼과 함께 또 어떻게 달라질까? 그리고 66세의 릴라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얼른 다음 권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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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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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들이 다녀왔던 파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하겠다고. 갑자기 파리를 다녀올 수 있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러나 현실은 마치 땅에 뿌리를 박고 떠나지 못하는 나무 같은 신세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잊고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는 '독서'라는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800페이지가 넘는 거의 무기와 같은 책,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다.
독서모임에서 서양사를 한 번 훑어보았다. 전체를 보다 보니 각 나라의 역사도 또한 궁금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스페인과 터키가. 아마 이번에 읽은 <프랑스사>는 그렇게 유럽의 각 나라로 떠나는 작은 독서여행의 시작이 될 듯싶다.
역사 책은 소설책보다도 작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작가의 눈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역사는 역사가의 눈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가 쓴 책이냐에 따라 역사의 서술은 그 방향이 다르다.
우선 앙드레 모루아는 들어는 봤는데, 잘 알지는 못하는 그런 작가였다. 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의 조각을 훔치다 딱 걸린 문화부 장관의 이름과 헷갈렸다. 앙드레 말로. 앙드레 모루아를 검색해보니 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이름마저 비슷한 그리고 둘 다 작가로서 유명했던 분들이다.
작가 앙드레 모루아(1885~1967)는 철학박사와 전기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전기작가로 <셸리의 일생>, <바이런>, <마르셀 프루스트를 찾아서>, <발자크> 등을 썼다. 그리고 1937년 <영국사> 1943년 <미국사>를 썼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서 객관적 서술에 부담을 느낀 그는 <프랑스사>를 쓰기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1947년 <프랑스사>를 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연합국 사령부의 연락장교를 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으로 망명을 한 적이 있다.
왜 미국으로 망명을 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서 가장 궁금한 점은 해결을 하지 못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이 책은 우리가 많이 알던 역사 책과는 다르다. 딱딱하게 서술된 책이 아니라 상당히 말랑말랑하다. 수많은 경구 메이커인 작가답게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말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마치 소설 같은 느낌의 역사 서술이라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사>는 프랑스 국민의 역사라고 말한다. 물론 프랑스 인종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지금 프랑스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리구리아인, 이베리아인, 켈트인, 로마인 등 수많은 인종의 혈액이 혼합되어 흐르고 있다.
그가 주로 프랑스사로 쓰고 있는 부분은 중세부터이다. 프랑크 제국을 프랑스라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한 시작으로 보는 듯하다.
그가 프랑스사를 쓰면서 우려한 대로 '객관적 서술'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들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십자군 전쟁에 대한 해석과 아비뇽유수가 그랬다. 또한 재미있었던 부분은 문예부흥에 대한 그의 시각이다. 그는 이탈리아 문예부흥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악행에 주목하단. 그들의 몰염치와 허무주의가 유럽 악덕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프랑스혁명을 쓰면서 곳곳에서 프랑스 정신의 위대함을 예찬한다.

이 부분은 십자군 전쟁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앙드레 모루아는 십자군 전쟁의 이점을 서술한다.

두 문명의 접촉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는데, 특히 새삼스레 독창성을 인식한 서유럽 정신은 새로운 활력을 흡수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그리스 사상의 황금시대와 부합한 것처럼 십자군도 유럽의 부흥과 때를 같이 했다. 3세기 동안 십자군은 뜻하지 않게 상업과 해운의 세계적 중심지를 결정했다. 십자군의 출발 장소가 된 마르세유, 제노바, 베네치아는 대도시로 발전했고 순례자를 위한 여관이 수없이 들어섰다.
십자군이 프랑스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봉건 제후와 영주들의 희생으로 왕정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영주들은 성지 출정으로 거의 파산했고 또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이렇듯 기사 계급이 몰락하며서 국왕뿐 아니라 도시의 주민도 여러 혜택을 받았다.

십자군 전쟁을 밖에서 보면 전혀 다른 점이 보인다.

우르비누스의 연설과 달리 성지를 '능욕'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5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에 들어간 그들은 성지 정화라는 명목으로 현지 주민들을 대량 살육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은 문명사적으로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 적어도 서남아시아 문명을 앞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동부 지중해가 서유럽 세계의 손안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아비뇽 유수에 대한 남경태의 <종횡무진 서양사>의 서술이다. 아비뇽유수는 교황의 납치로 보았는데, 앙드레 모루아의 책에서는 '납치'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고, 스스로 아비뇽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게 서술되어있다.

그 서술의 마지막에 가서야 '바빌론의 포로 생활'이란 말을 썼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쓸 때에도 우리에게 불리해 보이는 부분은 약하게, 부드럽게 우리에게 강해 보이는 부분은 특히 강조해서 쓰게 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역사가라면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러면서도 역사가 이전에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인이었던 작가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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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완전개정판 다빈치 art 3
J.M.G. 르 클레지오 지음, 백선희 옮김 / 다빈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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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번 독서모임에서 르 클레지오의 <조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전히 어려운 '르 클레지오'에 다시 한 번 도전(?) 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책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를 선택했다. 책을 읽는 중에 서로 카톡으로 나눈 말은 '도대체 르 클레지오는 어디에 있는 거야? 프리다 밖에 안 보여.'였다.

어제, 논현동에 있는 북티크에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왜 르 클레지오가 이 책을 썼을까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모임을 마치고 마침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전>을 보았다. 그림을 보면서, 프리다의 일기를 보면서 나의 의문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다시 작가로 돌아가 본다.

"새로운 출발과 시적 모험, 관능적 환희의 작가이자, 지배적인 문명 너머와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의 탐구자" - 2008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에서


르 클레지오는 1950~60년대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 중이던 베트남과 알제에서 물러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알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의견을 좇아 징집을 거부하고 영국과 네덜란드를 돌며 방황한다. 이 시기에 그의 첫 소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조서>를 쓴다. 그러다가 대체 복무로 방콕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또 다른 제국주의를 목격한다. 그는 미성년 매춘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그의 군 복무를 마치기 위해 멕시코로 보내졌다. 그는 거기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평생을 프랑스를 떠나 세계 여러 곳을 떠돌며 생활한다. 위의 노벨 문학상 수여의 이유는 이렇게 얻게 된 듯하다.

그에게 멕시코, 아메리카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며, 파리는 시끄러워 '글을 쓸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느낀 파리에서의 소외와 고립감을 프리다 칼로도 똑같이 느낀다. 그래서 그는 프리다 칼로의 전기를 쓰려고 한 듯하다. 거기에 곁다리로 디에고 리베라까지. (책을 읽는 내내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분량이 상당함에도 디에고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를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디에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조리 썩어빠진 지식인들이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나한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파리의 '예술가연하는' 저 멍청이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톨루카 시장에 퍼질러 앉아서 토르티야를 파는 게 낫겠어요.'


르 클레지오의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이야기하며 서로 함께 한 부분,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나이는 21살, 몸무게는 3배의 차이가 나던 디에고는 카리스마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천재다. 그의 그런 자신감은 그의 사진과 그가 그린 자화상을 보는 순간 '아'하고 느낄 수 있다. 사진에서의 두꺼비같이 생긴 거대한 몸집과 생김새는 그의 자화상에서는 상당히 핸섬한 감각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는 자신을 너무 사랑했던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인물이지 않았을까?

반면, 프리다는 그녀의 사진(우리는 이것이야말로 프리다의 '인생샷'으로 규정했다)보다 훨씬 못나게 나쁜 쪽으로 과장되게 자화상을 그렸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서로 닮은 점도 있겠지만, 태양과 달처럼, 삶과 죽음처럼, 빛과 어둠처럼 달랐다.
작가는 프리다를 '도발적인 꼿꼿함, 양보라곤 모르는 태도,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집착'을 가진 인물로, 디에고는 모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었으며, 성적 쾌락에 가까운 관능적 완벽성을 보인 인물로 묘사한다.
르 클레지오가 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프리다의 말을 빌려 그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이 거대한 축제라고 나는 상상한다.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사람부터 돌멩이까지, 태양까지, 그리고 그림자까지 참여하는 축제. 모두가 그와 더불어, 미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의 창조적 재능과 더불어 작업하는 축제. 형태와 색채와 움직임과 소리와 지능과 지식과 감동의 축제. 온 지구를 뒤덮을 지성과 사랑의 축제. 이 축제를 벌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다.'

프리다의 그림은 불편하다. 보는 내내 섬뜩함을 느낀다. 그녀의 그림에 대해 초현실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바로 '현실'을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초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나의 현실을 그렸다.

거기에는 프리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어렸을 적 앓았던 소아마비로 얇고 짧아진 오른쪽 다리,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하려는 시기에 겪였던 사고, 디에고의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열망했지만 계속되는 유산으로 인한 고통, 디에고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살지만 계속 한 눈 팔기를 멈추지 않는 디에고. 그녀의 그런 그림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유산을 겪은 후 그린 그림이다.

유산 후 그린 그림
병원을 나와서 프리다는 참으로 개성 있는 그림의 시작을 알리는 두 점의 그림을 그린다. 일상의 사건들, 그녀의 욕망, 두려움, 가장 내밀한 감정들이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인 형태로 표현된 그림이다. 그중 한 그림에서 그녀는 제왕절개 수술 후 병원 침대에 누워있고, 그녀 곁에 아기가 있다. 다른 그림에는 피 웅덩이 속에 벌거벗은 채 누운 그녀가 있고, 침대 위로 악몽의 상징들처럼 강박적인 이미지들이 떠 있다. 부서진 골반뼈, 외과 기구들과 비데, 난초 꽃 한 송이, 괴기스런 달팽이 한 마리, 기묘한 깃발, 세 달 된 태아.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도판이 실린 의학사전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병원 침대에는 숙명적인 날짜가 새겨져 있다. 1932년 7월.

그녀가 의학사전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바로 알기, 그리고 세상 알기. 그런 면에서 프리다의 그림은 바로 '현실'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34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으로 알게 된 디에고의 배신으로 프리다는 모든 걸 잃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건으로 둘은 이혼을 하게 된다.  이 결별은 가면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녀가 가면을 깨뜨리고 돌아가고자 한 곳을 르 클레지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현실은 기억을 태우는 온갖 고통들, 현실의 상처들, 걸인들과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길, 마치 성전에 둘러싸인 듯 부유한 집들 한가운데서 번쩍이는 황금,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조롱당한 혁명에 참여했던 떠돌이 군인들, 일상의 느린 잔혹함, 무거운 짐 아래 허리가 굽은 여인들, 여인들의 억센 손, 아득한 시간에 닳아버린 보석 같은, 희망 없고 기약 없는 삶에 씻겨버린 여인들의 눈길.

그렇지만 디에고에게 다시 돌아온 프리다, 그녀에게 과연 디에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전히 사랑이었을까?
그러나 '벌어진 상처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끔찍한 흉터들과 같다.

그녀의 그림 "몇개의 작은 상처" 혹은 "단지 몇 번 찔렸을 뿐"이다. 이 그림처럼 디에고가 남긴 상처를 그녀는 평생 안고 산다. 책에서 볼 때는 많은 그림 중에 하나였는데, 미술관에서 직접 보니 가장 아픈 그림이다. 디에고의 칼에 찔려 흘린 피는 그녀의 몸에 침대의 흰 시트에 그리고 바닥에만 있지 않다. 그림의 프레임에까지 붉게 묻어 있다. 그녀의 아픔은 그렇게 그림을 뚫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그림과 삶에서 멕시코 인디오의 정신과 세계관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여 다음 기회로 미룬다. 나중에 알아볼 것들은 테우아칸 여자, 아즈텍의 음양사상, 이원론적 세계관이 될 것이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 썩어가는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다. 그때 그녀가 남긴 말은 그녀의 고통을 넘는 놀라운 힘을 느끼게 한다.

발 무엇을 위해 그것을 원하지?
나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그리고 죽기 전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말.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침묵하기를 요구하는 말이다.

행복한 외출이 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리다 칼로를 이렇게 말한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리본 두른 폭탄이다.

프리다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소통수단도 아니고 상징체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녀 자신이 되고, 존재하고, 감정과 육신의 파멸을 딛고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사실, 예술이 그녀의 전부였고, 바로 그래서 그녀는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미를 변질시키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타협도 말이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후견을 거부했고, 마찬가지로 끝까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정치적 해석과 손쉬운 목적을 거부한다.

르 클레지오는 디에고와 프리다의 삶을 그려내면서 그가 찾던 지배되지 않는 인간, 혁명의 환희를 아는 인간, 그리고 무수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사랑의 관계는 멕시코 자체와 닮았다. 땅과 계절의 흐름과, 대비되는 기후와 문화를 닮았다. 그것은 고통과 잔인함으로 이루어진 관계이지만 절대적 필연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프리다는 고대 멕시코였다. 조상의 가면을 쓰고서 느린 종교적 춤을 추며 인간들 사이에 내려온 대지의 여신이고, 산맥처럼 강인한 품에 아이를 안고서 천상의 수액인 젖을 먹이는 거대한 인디오 여인이었다. 그녀는 시장에서 돌절구 위로 몸을 숙인 여인들, 부유한 동네를 떠돌며 저택의 개들을 짖게 만드는 흙짐 진 여인들의 말 없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이들의 외롭고 겁에 질린 눈길이고, 산모의 피 묻은 몸이었으며, 비벤다스 뜰에 웅크린 채 영원한 고독에서 끌어내 저주의 주문을 읊조리는 백발 마녀의 형체였다. 그녀는 인디오의 창조적 정신이었다. 서양 세계에서 무엇도 빌려오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살점을 뜯어내듯, 신화를 피를 머금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실려 일렁이는, 매우 오래된 의식의 편린들을 길어내는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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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대한 반론 - 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 지음, 김선욱.이수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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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 이수경 옮김
와이즈베리 2016.06.27.
펑점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강화된 근육을 가진 '힘이 센 ' 쥐를 만들었다고 한다. 줄기세포 기술에 이용된 이 실험은 쥐의 근육을 향상시키고, 노화에 따른 근육 위축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원래 과학자들이 기대한 상처 치료를 넘어서 근육의 부피가 두 배로 증가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근육은 더 커지고 강력해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관심 가질 분야는 노인의학뿐 아닐 것이다. 우선 스포츠계에서 강한 관심을 보일 듯하다. 프로스포츠 세계에서는 알게 모르게 약물을 복용하여 경기력을 향상시키려 하고 있다. 이런 약물과 달리 변형된 유전자는 지금의 검사로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하고자 하는 선수들이 많을 것이다.

약물을 금하는 이유는 공정성과 안정성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러한 치료가 가능하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잣대로 이를 판단해야 할까?

얼마 전 <완벽의 배신>이란 책을 읽었다. 그 책은 '완벽'이 실은 정신적인 문제,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회병리적 현상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성과를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사회가 '완벽주의자'를 만든다고. 그 책에 많이 공감을 하면서, 그런데 왜 '완벽'이 나쁠까? 다시 묻게 된다.

우리나라에 '정의' 열풍을 몰고 온,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모은 <완벽에 대한 반론>은 '완벽'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찰이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 '그렇다고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니?'라고 되물어 볼 수 있다. 이 되묻는 질문에 샌델은 '누구도 완벽해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삶은 선물'이라는 오랜 교훈을 잊고 살고 있다. 인간은 완벽하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비록 완벽에 가까운 인물로 태어났다고 하지만(유전학적으로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부유하게) 그것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며, 그래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것을 감내하고, 불협화음을 수용하고, 통제하려는 충동을 자제하며 살아야 한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운명이 좌우하던 영역이 이제는 선택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바뀌고 있다. 이것은 마음의 습관, 존재방식과 결부되는 문제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세상에 맞추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힘과 자율권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인간성이라는 뒤틀린 목재'를 똑바로 펴려고 하기보다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지닌 재능과 한계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은 단지 생명공학 문제에 대한 응답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시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철학적, 윤리학적 고민과 행동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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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정치 김민웅의 인문정신 2
김민웅 지음 / 한길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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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호출하는 것은 현재를 바로 세우는 일이자,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는 기본 동력과 내용물 자체이다.

지난 일을 쉽게 망각하는
공동체는 현재에 대해서도,
앞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도 무지해진다.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은
정치의 격을 무너뜨리는
독선적인 권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김민웅 교수의 <인간을 위한 정치>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잊으라고 그만 잊으라고 하는 세월호 참사, 2012년 대선 때의 일들, 곽노현, 김대중, 노무현 등을 자꾸 호출한다. 그는 말한다. 망각과 싸워야 한다고. 진상을 은폐하고 진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우리는 그러한 '망각의 유포'에 저항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만 잊자고 하는 것은 범죄현장에서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나라의 정치권력에 의해 뇌 수술을 당할 지경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사회적 망각을 확대재생산하는 세력과 구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그는 강하게 여러 번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정치'는 무엇일까?
그는 정치의 근본은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서로를'? 정치를 공학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인간을 중심에 두고 하는 이야기는 낯설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정치공학적으로 어쩌고, 권력의지가 어쩌고 하면서 정치는 우리와는 무관한 그들만의 어떤 무기 인양 말했었다. 그런데 '인간'이 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이런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국민들이 동의하다시피 요즘의 정치는 혐오스럽다. 정치가 없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정치인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저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플라톤은 훈련된 걸출한 개인에게 정치의 자격을 부여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통의 시민들이 가진 정치의식과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는 인문 정치를 요구한다. 인문 정치란? 인간의 고통에 민감하고, 생명이 갈망하는 바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이는 정치다. 사람다운 삶을 함께 사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품격 있는 정치, 혹은 품격 있는 정치가는 어떤 것인가? 묻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랐다. 대통령이 격이 떨어지는 언사를 한다고 숱한 비난을 받았었다. 저자는 품격 있는 정치는 격조 있는 언어와 우아한 자세를 구사하는 정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격조 있는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이 가장 절실하다고 저자는 또 강조한다. 

파시즘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의식을 혼미하게 하고 의지를 차츰차츰 꺾어 놓으면서 영향력을 굳혀가고 정체를 드러낸다.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 악령과의 싸움이며 여기서 이기려면 이 악령의 정체를 끊임없이 폭로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어렵고 힘들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처럼, 눈에는 그 성과가 보이지 않는 그런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이기에 더욱 힘들다.

그가 인용한 체코의 대통령인 하벨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그리고 신랄했다.

체코의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은 1990년 신년사에서 "체코인들은 전체주의 독재의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유지해온 공범이기도 하다."는 신랄한 자기비판을 토해냈다.
"정치란 권력투쟁을 우한 게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자 바로 이 삶을 지켜내고 이에 기여하는 실천적 윤리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이웃의 인간을 인간적으로 돌보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진실에 복종하는 정치다."하고 갈파했다.

다시 한 번 세월호 참사를 떠올린다.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우리의 목숨은 남의 손에 달려 있다. 다른 이의 목숨도 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인간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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