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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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거트의 <나라 없는 사람>을 시원한 도서관에서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도서관의 시원한 에어컨이 필요 없을 만큼 시원스러운 유머에 즐거웠다.
하지만, 결코 즐거울 수만은 없는 그 묵직하고 답답한 작가의 고민과 관심은 마지막에 웃음을 잃게 했다.
책에서 작가가 언급한 세상을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조금은 무겁고 힘든 마음을 가볍게 덜어낼 수 있는 유머가 지금은 아무 효험이 없다는 걸 요즘 느낀다.
세상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걸까? 내가 이상하게 변해가는 걸까?
큰 의문이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는 이 문장의 다음에 이런 말을 적어둔다.
'너무 많은 충격과 실망을 겪은 탓에 이제 나는 더 이상 유머로 방어할 수가 없다. '
지금 우리가 그렇다.
어마어마한 충격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실망을 여전히 몸에 안고 있는데도 조금의 변화도 없다. 우리는 웃음을 잃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했던(ㅎㅎ) 미국은 아직도 '공공도서관의 접수창구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커트 보네거트의 책이 작은 위로가 되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빌려보는 모든 이들에게서 위로와 희망을 읽을 수 있나 보다.
커트 보네거트의 촌철살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더운 여름 책을 읽는 이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바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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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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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로변에서 한 남자가 폭사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은 시작한다. 이 소설의 화자는 피터 아론이라는 이름의 작가다. (재미있게도 이 주인공의 이름은 폴 오스터의 첫 글자와 같다. P.A) 폭사한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기 전에 나는 이 글을 쓰려고 한다. 그가 누구인지 설명을 하고, 어떻게 해서 그 길에 있었는지를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나, 피터의 친구인 작가 벤저민 삭스다. 나는 삭스를 만나게 된 데서부터 삭스와 그의 부인과 나의 만남, 그리고 그와 관계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며 삭스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과 주변 인물의 증언 그리고 삭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반듯한 소설가가 우연히 살인자로 거기서 더 나아가 미국의 곳곳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로 변해야 했는지를 폴 오스터 특유의 문체로 담담하게 그리고 밀도 있게 서술해 나간다.
폴 오스터는 <뉴욕3부작>, <달의 궁전>, <빵 굽는 타자기> 등으로 알려진 작가다. 그의 작품은 꼭 다 읽겠다고 다짐한(?) 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가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어떤 것에 끌린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작가'인 경우가 많다. <뉴욕 3부작>,<환상의 책>,<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도. 그리고 꼭 어떤 인물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진 인물을 추적하는 인물이 또 있다. 배경은 뉴욕인 경우가 많고, 그의 작품에서 글쓰기는 매우 중요한 테마가 된다.

원제가 <리바이어던>인 <거대한 괴물>도 마찬가지로 비교적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잘 나가던 한 작가가 홀연히 사라진다. 물론 그가 사라지고 난 뒤, 그리고 그가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고 다니는 걸 알고 난 뒤 돌이켜 보면 그는 자유의 여신상과 계속되는 우연적인 연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잘 직조된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의 이 행동은 결정적인 어떤 이유에 의해 이루어지며 어떤 사건의 결정적인 원인은 우리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서 그렇지 꼭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안정감을 주기는 한다. 매일 혹은 매번 우연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의 연속에 우리가 던져졌다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게 필연적인 적이 사실 있는가? 폴 오스터는 우연한 일로 엮여진 관계와 사건들로 인간이 어떤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지 그려내고 있다. 특히 거짓을 꾸며내는 작가이면서도 현실이 더욱 허무맹랑하고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앞질러 간다. 우리가 허구로 꾸며내는 일들이 아무리 허무맹랑하더라도 현실세계가 끊임없이 토해내는 예측 불가능한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가 <거대한 괴물>을 통해서 그려내고자 한 우리의 현실은 무엇일까?
원제 <리바이어던>이 말하고 있듯이 국가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권력과 힘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 거대한 권력에 이 소설 속 인물인 삭스는 자신이 우연히 죽인 인물인 디마지오처럼 작은 균열을 내려고 한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며 '깨어나라, 아메리카여!'를 외치는 것. 거대한 괴물에 맞서 혼자 게릴라전을 벌이듯 상징물을 파괴해 나가는 것, 그리고 이렇게 글로 그것을 알리는 것.
그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또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그의 친구인 삭스가 쓰던 책의 제목이던 '거대한 괴물'이 삭스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이 책의 제목이 되어 폭사한 인물을 찾던 FBI의 손에 들어간다.

책이 어떻게 쓰이는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그 책을 쓰고 있는 사람도 모른다. 책은 무지에서 태어난다. 책이 쓰인 다음에도 계속 생명력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 책들이 이해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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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완전개정판 다빈치 art 3
J.M.G. 르 클레지오 지음, 백선희 옮김 / 다빈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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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독서모임에서 르 클레지오의 <조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전히 어려운 '르 클레지오'에 다시 한 번 도전(?) 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책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를 선택했다. 책을 읽는 중에 서로 카톡으로 나눈 말은 '도대체 르 클레지오는 어디에 있는 거야? 프리다 밖에 안 보여.'였다.

어제, 논현동에 있는 북티크에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왜 르 클레지오가 이 책을 썼을까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모임을 마치고 마침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전>을 보았다. 그림을 보면서, 프리다의 일기를 보면서 나의 의문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다시 작가로 돌아가 본다.

"새로운 출발과 시적 모험, 관능적 환희의 작가이자, 지배적인 문명 너머와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의 탐구자" - 2008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에서


르 클레지오는 1950~60년대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 중이던 베트남과 알제에서 물러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알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의견을 좇아 징집을 거부하고 영국과 네덜란드를 돌며 방황한다. 이 시기에 그의 첫 소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조서>를 쓴다. 그러다가 대체 복무로 방콕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또 다른 제국주의를 목격한다. 그는 미성년 매춘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그의 군 복무를 마치기 위해 멕시코로 보내졌다. 그는 거기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평생을 프랑스를 떠나 세계 여러 곳을 떠돌며 생활한다. 위의 노벨 문학상 수여의 이유는 이렇게 얻게 된 듯하다.

그에게 멕시코, 아메리카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며, 파리는 시끄러워 '글을 쓸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느낀 파리에서의 소외와 고립감을 프리다 칼로도 똑같이 느낀다. 그래서 그는 프리다 칼로의 전기를 쓰려고 한 듯하다. 거기에 곁다리로 디에고 리베라까지. (책을 읽는 내내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분량이 상당함에도 디에고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를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디에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조리 썩어빠진 지식인들이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나한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파리의 '예술가연하는' 저 멍청이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톨루카 시장에 퍼질러 앉아서 토르티야를 파는 게 낫겠어요.'


르 클레지오의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이야기하며 서로 함께 한 부분,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나이는 21살, 몸무게는 3배의 차이가 나던 디에고는 카리스마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천재다. 그의 그런 자신감은 그의 사진과 그가 그린 자화상을 보는 순간 '아'하고 느낄 수 있다. 사진에서의 두꺼비같이 생긴 거대한 몸집과 생김새는 그의 자화상에서는 상당히 핸섬한 감각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는 자신을 너무 사랑했던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인물이지 않았을까?

반면, 프리다는 그녀의 사진(우리는 이것이야말로 프리다의 '인생샷'으로 규정했다)보다 훨씬 못나게 나쁜 쪽으로 과장되게 자화상을 그렸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서로 닮은 점도 있겠지만, 태양과 달처럼, 삶과 죽음처럼, 빛과 어둠처럼 달랐다.
작가는 프리다를 '도발적인 꼿꼿함, 양보라곤 모르는 태도,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집착'을 가진 인물로, 디에고는 모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었으며, 성적 쾌락에 가까운 관능적 완벽성을 보인 인물로 묘사한다.
르 클레지오가 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프리다의 말을 빌려 그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이 거대한 축제라고 나는 상상한다.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사람부터 돌멩이까지, 태양까지, 그리고 그림자까지 참여하는 축제. 모두가 그와 더불어, 미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의 창조적 재능과 더불어 작업하는 축제. 형태와 색채와 움직임과 소리와 지능과 지식과 감동의 축제. 온 지구를 뒤덮을 지성과 사랑의 축제. 이 축제를 벌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다.'

프리다의 그림은 불편하다. 보는 내내 섬뜩함을 느낀다. 그녀의 그림에 대해 초현실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바로 '현실'을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초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나의 현실을 그렸다.

거기에는 프리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어렸을 적 앓았던 소아마비로 얇고 짧아진 오른쪽 다리,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하려는 시기에 겪였던 사고, 디에고의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열망했지만 계속되는 유산으로 인한 고통, 디에고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살지만 계속 한 눈 팔기를 멈추지 않는 디에고. 그녀의 그런 그림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유산을 겪은 후 그린 그림이다.

유산 후 그린 그림
병원을 나와서 프리다는 참으로 개성 있는 그림의 시작을 알리는 두 점의 그림을 그린다. 일상의 사건들, 그녀의 욕망, 두려움, 가장 내밀한 감정들이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인 형태로 표현된 그림이다. 그중 한 그림에서 그녀는 제왕절개 수술 후 병원 침대에 누워있고, 그녀 곁에 아기가 있다. 다른 그림에는 피 웅덩이 속에 벌거벗은 채 누운 그녀가 있고, 침대 위로 악몽의 상징들처럼 강박적인 이미지들이 떠 있다. 부서진 골반뼈, 외과 기구들과 비데, 난초 꽃 한 송이, 괴기스런 달팽이 한 마리, 기묘한 깃발, 세 달 된 태아.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도판이 실린 의학사전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병원 침대에는 숙명적인 날짜가 새겨져 있다. 1932년 7월.

그녀가 의학사전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바로 알기, 그리고 세상 알기. 그런 면에서 프리다의 그림은 바로 '현실'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34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으로 알게 된 디에고의 배신으로 프리다는 모든 걸 잃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건으로 둘은 이혼을 하게 된다.  이 결별은 가면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녀가 가면을 깨뜨리고 돌아가고자 한 곳을 르 클레지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현실은 기억을 태우는 온갖 고통들, 현실의 상처들, 걸인들과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길, 마치 성전에 둘러싸인 듯 부유한 집들 한가운데서 번쩍이는 황금,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조롱당한 혁명에 참여했던 떠돌이 군인들, 일상의 느린 잔혹함, 무거운 짐 아래 허리가 굽은 여인들, 여인들의 억센 손, 아득한 시간에 닳아버린 보석 같은, 희망 없고 기약 없는 삶에 씻겨버린 여인들의 눈길.

그렇지만 디에고에게 다시 돌아온 프리다, 그녀에게 과연 디에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전히 사랑이었을까?
그러나 '벌어진 상처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끔찍한 흉터들과 같다.

그녀의 그림 "몇개의 작은 상처" 혹은 "단지 몇 번 찔렸을 뿐"이다. 이 그림처럼 디에고가 남긴 상처를 그녀는 평생 안고 산다. 책에서 볼 때는 많은 그림 중에 하나였는데, 미술관에서 직접 보니 가장 아픈 그림이다. 디에고의 칼에 찔려 흘린 피는 그녀의 몸에 침대의 흰 시트에 그리고 바닥에만 있지 않다. 그림의 프레임에까지 붉게 묻어 있다. 그녀의 아픔은 그렇게 그림을 뚫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그림과 삶에서 멕시코 인디오의 정신과 세계관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여 다음 기회로 미룬다. 나중에 알아볼 것들은 테우아칸 여자, 아즈텍의 음양사상, 이원론적 세계관이 될 것이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 썩어가는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다. 그때 그녀가 남긴 말은 그녀의 고통을 넘는 놀라운 힘을 느끼게 한다.

발 무엇을 위해 그것을 원하지?
나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그리고 죽기 전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말.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침묵하기를 요구하는 말이다.

행복한 외출이 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리다 칼로를 이렇게 말한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리본 두른 폭탄이다.

프리다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소통수단도 아니고 상징체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녀 자신이 되고, 존재하고, 감정과 육신의 파멸을 딛고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사실, 예술이 그녀의 전부였고, 바로 그래서 그녀는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미를 변질시키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타협도 말이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후견을 거부했고, 마찬가지로 끝까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정치적 해석과 손쉬운 목적을 거부한다.

르 클레지오는 디에고와 프리다의 삶을 그려내면서 그가 찾던 지배되지 않는 인간, 혁명의 환희를 아는 인간, 그리고 무수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사랑의 관계는 멕시코 자체와 닮았다. 땅과 계절의 흐름과, 대비되는 기후와 문화를 닮았다. 그것은 고통과 잔인함으로 이루어진 관계이지만 절대적 필연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프리다는 고대 멕시코였다. 조상의 가면을 쓰고서 느린 종교적 춤을 추며 인간들 사이에 내려온 대지의 여신이고, 산맥처럼 강인한 품에 아이를 안고서 천상의 수액인 젖을 먹이는 거대한 인디오 여인이었다. 그녀는 시장에서 돌절구 위로 몸을 숙인 여인들, 부유한 동네를 떠돌며 저택의 개들을 짖게 만드는 흙짐 진 여인들의 말 없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이들의 외롭고 겁에 질린 눈길이고, 산모의 피 묻은 몸이었으며, 비벤다스 뜰에 웅크린 채 영원한 고독에서 끌어내 저주의 주문을 읊조리는 백발 마녀의 형체였다. 그녀는 인디오의 창조적 정신이었다. 서양 세계에서 무엇도 빌려오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살점을 뜯어내듯, 신화를 피를 머금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실려 일렁이는, 매우 오래된 의식의 편린들을 길어내는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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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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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잘 알려진,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난 루이스 세풀베다의 동화 같은 소설이다. 아니 8세부터 88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동화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생쥐의 친구가 된 고양이>에 이은 세 번째 창작동화라고 하는데 이 세 권의 동화의 제목은 우리가 흔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어긋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느림의 대명사인 달팽이가 느닷없이 느림의 중요성을 깨닫다니?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을 읽고서 제목도 재미있었지만, 그 내용이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을 안고 있던 탓에 제목만으로, 그리고 저자의 이름만으로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이 동화의 주인공은 느리면 느린 대로 체념하며 살던 달팽이들과는 달리 왜 자신이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어 한다. 더불어 다른 존재들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왜 자신들에게는 없는지 너무나 궁금해 관습처럼 모여 앉는 자리에서 질문을 던져 다른 달팽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다른 달팽이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질문이며, 저 자식만 사라지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이 왜 느린지 궁금한, 이름이 없는 게 신경 쓰이는 달팽이는 알기 위해 길을 떠난다.  달팽이는 워낙 아는 것이 많다는 수리부엉이에게 물어본다. 수리부엉이는 자신이 '사라져 버린 나무들에 대한 추억이 쌓이면서 몸이 너무 무거워지는 바람에 이젠 날 수 없게 되었다'며 '네가 무거운 이유도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길을 떠난 달팽이는 '기억'이라는 거북이를 만난다. 거북이는 인간과 함께 살며 기억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인간들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고 말한다. 거북이는 '그렇게 빨리 하려고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라든지 '꼭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해지는 걸까?'처럼 거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두고 보토 '반항아'라고 한다고 하며 '반항아'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반항아'는 길을 떠나 인간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 다다른다. 자신의 발도 느리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둥근 다리와 금속 심장을 가진 힘이 장사인 동물을 타고 다니며, 별 없는 밤보다 더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흙보다도 더 시커먼 걸로 동물들이 살고 있는 들판을 뒤덮고 있다. 이런 위험을 알리러 달팽이는 동족들에게 부지런히 돌아온다. 달팽이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민들레 나라'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달팽이의 말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눈으로 그것을 보고도 거부반응을 보이는 달팽이들의 일부를 데리고 '반항아'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다.

'기억'이라는 거북이는 '만약 느리지 않았다면 둘의 만남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달팽이가 느리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들, 우리가 놓치고 외면했던 것들을 세풀베다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기억은 결국 반항이다.'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거대한 음모가 있는 듯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두고두고 새겨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얼른 잊어버리라고 부추기며 '기억'하려는 자들은 다들 국가에 민족에 '반항'하는 자들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이 있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인간이 보지 못한 것들, 아주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르신들의 말씀이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새로운 민들레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는 도중에 우리가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 새로운 민들레 나라는 앞에 있지, 뒤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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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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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조금 징그러울 정도로 늙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크지도 않은 분량으로 잘 다루고 있습니다. - 김영하의 지식인의 서재에서

오랜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었다. 읽기 전에 이 책의 내용을 기억해내려고 애썼지만, 기껏해야 기억나는 것은 장례식 장면과 주인공이 외롭게 죽었다는 그 어떤 막연한 감상(?)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읽고 난 지금,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과 아니 우리가 기억하고 살아야 할 어떤 것과 내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전에는 별 감동이 없이 읽었던 부분이 찡한 울림으로 다가왔고, 많은 문장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에브리맨'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보석점의 이름이다.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이야기는 장례식 장면을 주인공인 '그'가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 한 명의 자발적인 참여자인 딸 낸시와 그녀의 초대로 오게 된 몇 명의 사람들. 그는 왜 이렇게 쓸쓸한 장례식을 갖게 된 걸까? 절대 나는 그렇지 않을 거니까 공감하지 않으며, 주인공이 어떻게 살았나 궁금해하는 것에 그치고 말지만, 책의 중간 부분부터는 격하게 책에 빠져들며 모든 문장이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머릿속을 치고 들어온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애인들과 자식들과 성공을 안겨준 흥미로운 일자리를 가졌지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 p.76

요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잘 나가던 한 남자는, 비록 세 번의 결혼이 모두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심장동맥 성형수술을 한 후 점차 늙음과 죽음에 매달려 살게 된다. 자신 있었던 그동안의 삶에서 멀리 치워두었던 사람들이 소중함을 느끼고, 자신이 그동안 관심 갖지 않았던 것들이 무섭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멀어짐,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멀어짐, 그것이 주는 공허와 외로움이 그를 가슴을 치며 울게 한다.
이번에 읽을 때는 특히 두 부분이 나를 붙들었다. 한 곳은 동료들과의 세 통의 전화, 그리고 나머지 한 부분은 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인부와의 대화. 함께 일하던 동료의 부고란을 접한 뒤(이 세 동료는 한 명은 우울증, 또 한 명은 말기 암, 또 다른 한 명은 심장과 뇌졸중을 앓았다) 그는 이 세 명에게 전화를 한다. (물론 이미 죽은 한 동료의 경우는 그의 부인과)

연속된 전화 세 통 뒤에-그리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진부하기만 하고 쓸모는 없는 격려 발언을 늘어놓은 뒤에, 옛날의 에스프리를 소생시켜보려고 동료들의 삶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힘을 얻어 삶의 마지막 가장자리에서 돌아오게 할 만한 것들을 찾아내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 뒤에- 몇 시간 동안 그는 딸과 통화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딸은 피비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전화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자신의 에스프리를 소생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나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아직 노년의 전투, 노년의 대학살을 몸으로 느낄 나이는 아니지만,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갑자기 느껴진 두려움으로 여러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마치 다시 보기 힘들 것처럼.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심장제세동기를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갔다. 그 순간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 랜디나 로니보다 훨씬 잘 알 수 있었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자처럼 사납게 자기 가슴을 쳤다. 이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수, 모든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는 실수들로 인한 가책에 시달리다-자신의 비참한 한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면서도,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하위도 없어! 이렇게, 심지어 하위도 없이 끝이 나다니!" p.164-165

'심지어 하위도 없어!' 자신의 형인 하위. 언제나 자신의 편이며 자신의 위로였던 형도 자신보다 건강하기에 질투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도 곁에 없다. 그는 이렇게 후회와 외로움에 울부짖는다.

"엄마, 아빠, 하위, 피비, 낸시, 랜디, 로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말 안 들려? 나 떠나고 있다고! 다 끝났고, 나는 이제 당신들을 모두 다 떠나고 있어!" 그가 그들에게서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바른 속도로 자신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고개만 돌려,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소리쳤다.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알게 된 때는 너무 늦은 그때일 것이다. 특히 예고된 죽음(이를테면 암이나 그런 것으로 인한 )이 아닌 이상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살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날 수도 있다. 두려워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책을 통해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을 알게 된다. 죽음, 그리고 늙음.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p.188

갑자기 힘이 확 풀렸다.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그 어떤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 하지만 유한한 존재이기에 피할 수 없는 당연히 맞이해야 할 그것. 있음에서 풀려나(사실 간혹 이렇게 풀려나고 싶은 때가 있긴 하다)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
필립 로스는 188페이지의 짧은 이야기 속에 죽음을 담아 놓았다.
조금 더 내가 늙음과 죽음에 가까워질 때, 이 책의 어떤 문장이 나를 사로잡을지 궁금해진다. 간혹 때때로 이 책을 꺼내 다시 읽어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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