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드 여전사가 되어 - 프랑스 여기자의 목숨 건 이슬람국가IS 잠입 르포.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4
안나 에렐 지음, 박상은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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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그냥 소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젠가 진짜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자와 테러리스트의 사랑 이야기로 재탄생하여...

1. IS 진짜 골 때린다. 그냥 이슬람 국가 건설이 목푠줄만 알았다. 전 세계를 거대한 하나의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라니.... 이교도는 무조건 죽인다. 홀로코스트의 재현 선언인가?

2. 취재한 여기자도 골 때린다. 무섭지도 않나? 아직도 경찰의 보호하에 이사를 하며 몸을 사린다고 한다. 순수한 저널리즘의 발현인가? 아니면 비정규직 저널리스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그걸 이용하는 편집부는, 또 그걸 흥미롭게 보고 있는 제 3국의 독자(이를테면 나같은)는?

3. 정말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온 르포인가? 저자는 몸을 던져 정보를 얻어낸다. 그리고 살해 위협을 받고 도망쳐 다닌다. 그러한 저자에게 허용되는 객관성이란 어느정도일까?
그녀에 따르면 IS는 꼴통 정도가 아니라 그냥 악마같다.

재밌게 읽었다. IS의 테러로부터 자유한 3국의 독자로서...
지금 그 곳은 과연 어떠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에, 난 그 현실을 지금 이렇게 읽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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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kkary 2015-05-2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해봤던 생각이지만 이 놈들이 나에게 테러만 시키지 않는다면 또한 개종만 강요하지 않는다면 시리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결혼도 시켜주지 않는가? ㅋ
 

분명히 읽은 책이었다.
읽었다는 기억은 있었으나 그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십년전 그 어린놈의 새끼가 이 책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뒤틀림이라고 해석된 뒤집힘의 근원을 저자는 탐구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저자의 해박한 지식으로 찾고 비판한다.

이미 저자는 삼십년전에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었다.
삼십년이 지난만큼 생각을 공유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나, 삼십년이 지나도 살아남은 이유도 쉽게 알수있다.

이런 류의 책 따위 더이상 필요없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한국교회에 이 책이 유효하다는 사실이 썩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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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시인은 죽어서 시를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인의 이름은 사실 시인,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쓴 시인 것이다. 여기 시인의 시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 시만으로 충분하다. 그 시에 그 시인의 모든게 담겨있으니...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 시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시를 맛보기 위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시인을 알고 시대를 아는 시간, 그렇게 해서야 겨우 시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대가 있었다. 고향땅을 떠나야 했던 시대, 고향의 언어를 쓰지 못했던 시대, 고향의 이름을 바꿔야 했던 시대... 시인이라 불리우는 이들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 시가 아닌 다른 것을 써야 했고,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시인이 있었다. 젊은 시인은 시인으로 불리우지 못하였다. 그저 한사람의 학생이었던, 수많은 시대의 희생자중 한명이었던, 시인은 그렇게 죽어갔다.
시인이 없는 시대를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민족가운데 단 한명의 시인조차 없는 그런 시대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민족을 닮았다. 시대를 살아냈던 민족을 닮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와 민족이 닮겨있다. 시인은 죽었지만 민족은 살았다. 그리고 그의 시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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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kkary 2015-03-0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 책읽는당 신청해서 선정됐다. ㅋ 가제본이라 더 특별했던...
 

책을 많이 사는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책겔지수(?)가 꽤나 높은 편이다.
그래서 사고 싶은 책을 모두 지르지는 못하고 조심하는 마당에 분명 소싯적 읽은 책인데 집에 (무슨 이유로든) 없는 걸 발견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에 돈을 아끼지 않는 이들은 두권씩 막 사고 그런다지만, 왠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그렇다. 북타쿠로 보이기 보다는 합리적인 독서가로 보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어딘가로 떠나보낸 다시 읽고 싶은 책이 개정되어 양장본으로 나왔단 소식은 반가움 반 당혹스러움 반이다.

그래서 살것인가 말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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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8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읽은 책이였고 저보다 필요한 사람 에게 선물로 준 책이 요즘들어 계속 생각나고 읽고싶은거예요.....그런데 절판되서 구할수 없다는것! 그러니 두고 싶은 책은 곁에 두고 즐기세요 읽든 후에 읽든 곁에 있는것 만으로 행복하다면 좋지 않을까요?ㅎㅎ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습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 빅토르 위고

그 줄거리를 이야기 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소설,
한 좀도둑이 성자가 되는 위대한 이야기,
혁명과 혁명 사이의 작은 혁명...
레미제라블....

장발장은 말하자면 특별한(extraordinary)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힘이 셌고, 미리엘 주교와 같은 귀인을 만났으며, 수완이 좋아 누구보다 부자가 될 수 있었고, 인내는 물론 사격술마저 뛰어난 슈퍼맨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만큼 힘이 세지도 못하고 돈도 없고 인내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 소설은 그리 큰 관계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과연 위고는 이런 슈퍼맨같은 비현실적 인물을 그의 소설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걸까? 빅토르 위고는 위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장발장 같은 슈퍼맨을 이야기한 소설이 아니라는 걸... 당시 슈퍼맨이 될 수 없었던 수 많은 민중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로 `les miserables`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으나, 혁명은 좌절되고 만다. 토마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따르면 그 당시 민중의 삶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지지 않았고, 빈부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었다. 장발장은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으며, 그의 다섯 조카를 먹이기 위해 결국 빵을 훔치게 된다. 그의 젊음은 그로써 끝이 나버렸다. 19년의 형무소 생활이 끝이 나고 그에게 주어진 건 새로운 삶이 아니라 주홍글씨와도 같은 노란 통행증이었다. 그는 법을 어기지 않고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없었으며, 새로운 삶도 결코 그의 과거를 지우진 못했다. 이런 경직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불꽃은 타올랐으나 곧 꺼져버렸다. 혁명이 되지 못하고 폭동으로 끝났다.

토마피케티에 따르면 이런 민중의 삶을 변화시킨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부의 재분배가 일어났고, 그 후 폭발적인 경제 성장이 있은 후에야 민중은 다섯조카를 먹이기 위해 도둑이 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세상은 다시 전쟁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의 통계는 불평등에 대한 서적이 늘어남이 단지 자본가에 대한 불만에서만은 아님을 말해주었다. 확실히 불평등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듯이 일정수준이상의 불평등과 사회의 경직은 사회를 지속시킬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한국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늘어나는 실업률과 비정규직화, 매춘인구의 증가, 전에 없던 아동, 청소년 자살률은 위고가 말한 무산계습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과 전혀 다를 바 없어보인다. 늘어만 나는 빈부격차에 조금의 다름도 허락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경직성, 한번 무너지고 나면 회생이 힘듬은 당시 프랑스 수준 못지 않을 것 같다. 곳곳에 자베르 경감은 넘쳐나나 미리엘 주교는 찾기가 힘들다. 2014년 한국의 모습이 곧 `les miserables`이다.

지금은 다시 레미제라블을 읽을 때이다. 단언컨대 이런 형태의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전쟁이, 혁명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이미 이 사회는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사회를 정상적으로 돌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4.19, 5.18, 6.10을 통해 항상 희망의 싹을 항상 유지해왔다. 그 희망의 싹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전에 우리는 다시 `les miserables`을 읽어야 한다. 희망은 밟혔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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