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습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 빅토르 위고

그 줄거리를 이야기 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소설,
한 좀도둑이 성자가 되는 위대한 이야기,
혁명과 혁명 사이의 작은 혁명...
레미제라블....

장발장은 말하자면 특별한(extraordinary)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힘이 셌고, 미리엘 주교와 같은 귀인을 만났으며, 수완이 좋아 누구보다 부자가 될 수 있었고, 인내는 물론 사격술마저 뛰어난 슈퍼맨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만큼 힘이 세지도 못하고 돈도 없고 인내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 소설은 그리 큰 관계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과연 위고는 이런 슈퍼맨같은 비현실적 인물을 그의 소설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걸까? 빅토르 위고는 위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장발장 같은 슈퍼맨을 이야기한 소설이 아니라는 걸... 당시 슈퍼맨이 될 수 없었던 수 많은 민중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로 `les miserables`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으나, 혁명은 좌절되고 만다. 토마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따르면 그 당시 민중의 삶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지지 않았고, 빈부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었다. 장발장은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으며, 그의 다섯 조카를 먹이기 위해 결국 빵을 훔치게 된다. 그의 젊음은 그로써 끝이 나버렸다. 19년의 형무소 생활이 끝이 나고 그에게 주어진 건 새로운 삶이 아니라 주홍글씨와도 같은 노란 통행증이었다. 그는 법을 어기지 않고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없었으며, 새로운 삶도 결코 그의 과거를 지우진 못했다. 이런 경직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불꽃은 타올랐으나 곧 꺼져버렸다. 혁명이 되지 못하고 폭동으로 끝났다.

토마피케티에 따르면 이런 민중의 삶을 변화시킨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부의 재분배가 일어났고, 그 후 폭발적인 경제 성장이 있은 후에야 민중은 다섯조카를 먹이기 위해 도둑이 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세상은 다시 전쟁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의 통계는 불평등에 대한 서적이 늘어남이 단지 자본가에 대한 불만에서만은 아님을 말해주었다. 확실히 불평등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듯이 일정수준이상의 불평등과 사회의 경직은 사회를 지속시킬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한국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늘어나는 실업률과 비정규직화, 매춘인구의 증가, 전에 없던 아동, 청소년 자살률은 위고가 말한 무산계습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과 전혀 다를 바 없어보인다. 늘어만 나는 빈부격차에 조금의 다름도 허락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경직성, 한번 무너지고 나면 회생이 힘듬은 당시 프랑스 수준 못지 않을 것 같다. 곳곳에 자베르 경감은 넘쳐나나 미리엘 주교는 찾기가 힘들다. 2014년 한국의 모습이 곧 `les miserables`이다.

지금은 다시 레미제라블을 읽을 때이다. 단언컨대 이런 형태의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전쟁이, 혁명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이미 이 사회는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사회를 정상적으로 돌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4.19, 5.18, 6.10을 통해 항상 희망의 싹을 항상 유지해왔다. 그 희망의 싹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전에 우리는 다시 `les miserables`을 읽어야 한다. 희망은 밟혔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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